2026년 3월 27일 금요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멸시와 외면을 당하는 메시야

 

성 경: [53:1-3]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 '우리'에 대해서는

 

(1) '선지자 자신'(Calvin, Oehler, Stier),

(2) 52:15'열방들'(혹은 이방인들, G.W. Grogan),

(3) '이스라엘 백성, 특히 선지자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경건한 무리들'(Delitzsch, Leupold),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으나 마지막 견해가 가장 나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들 '우리'는 수난받는 메시야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또 저들의 고백은 거의 회개에 가까운데,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새로운 깨달음을 믿은 유대인들의 심리 상태와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주 앞에서 - 여기 ''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의 삶의 과정은 인간들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벧전 2:4).

 

 

자라나기를(עָלָה 알라 alah) - 문자적인 뜻은 '그가 자라나셨다', 과거 시제(완료형)로 되어 있다.

 

본 동사의 시제를 따른다면 본절이 나타내는 인물은 본서 저자 이사야의 과거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세, , 예레미야 등을 거론할 수 있지만 본장이 묘사하는 종과는 비교되 될 수 없다.

 

결국 이 종은 메시야이신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자가 과거로 시제를 적은 이유는 본서 저자가 미래를 내다볼 때 자신이 예언하는 메시지의 성취를 너무나도 명백히 보고 있었으므로 자신에게는 그 일이 이미 발생한 것처럼 확신있게 적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을 예언적 기술법 중의 하나인 '예언적 과거'라 부른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며, 특히 '마른 땅'이란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처해 있던 비천한 상황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본절에서 저자는 ''의 비하(卑下)를 좀 더 상세히 묘사한다.

 

멸시를 받아서 - 여기에는 거절과 배척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가 고난의 걸음이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를 거절하고 배척 했다.

고난의 ''에 대한 태도 문제에 있어서 중립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그의 구원을 즐거워하고 그를 높이거나, 아니면 그를 배척하고 멸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무관심 역시 그에 대한 적의를 품고있는 것이다.

 

질고를 아는 - 문자적인 뜻은 '병을 잘 아는'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가 육체적으로 허약하여 이런저런 질병에 계속 걸렸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를 묘사하는 비유적 술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미 육체적 질병을 비유로 해서 유다의 죄악 상태를 드러낸 바 있다.

 

(1:5-6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많이 맞으려 하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려 하는도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그 안에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멍든 것과 곪은 종기뿐이거늘 그것들을 꿰매고 싸매고 향유를 발라 아픔을 달래지 못하였도다).

 

따라서 성취될 구원은 궁극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인 것이 분명하다.

 

 

2026년 3월 26일 목요일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구원의 선포 3

 

성 경: [52:11-15]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여 행하지 아니하리라

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15)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52:12]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여 행하지 아니하리라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 황급히 나와야 했던 출애굽 때와는 대비를 이루는 상황이 제시된다.

 

(12:33 이집트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었도다, 하며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급히 내보내려 하였으므로,

 

39 그들이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반죽으로 누룩 없는 납작한 빵을 구웠으니

이는 그것이 발효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그들이 이집트에서 쫓겨났으므로

지체할 수 없었으며 또한 자기들을 위해 아무 양식도 예비하지 못하였더라;

 

16:3 그것과 아울러 누룩 있는 빵을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누룩 없는 빵 곧 고난의 빵을 그것과 아울러 먹을지니라. 이는 네가 이집트 땅에서 급히 나왔기 때문이니 이로써 네 평생 동안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52: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보라(הִנֵּה 힌네 hinneh) - 저자는 본서 곳곳에서 주의를 새롭게 환기시킬 목적이 있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무려 70여 회나 된다.

 

이제 저자가 새롭게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려고 하는 대상은 40장 이후에 계속 나온 '여호와의 종'이다.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 본 하반절은 상반절에서 진술된 것에 의해서 나타나는 결과를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은 본 하반절을 이루고 있는 세 개의 동사의 의미를 통해 잘 드러난다.

 

첫 번째 동사는, 'יָרוּם 야룸인데, 이것은 '그가 일어날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두 번째 동사는, 'נִשָּׂא 니사로서, '그가 자신을 일으킬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마지막 동사는, 'גָבַהּ 가바로서, 하나의 상태를 나타내므로 '그가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로 번역된다.

 

주목할 점은, 이 세 동사가 모두 승귀(承句)의 최고 정점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신약 성경을 삽입하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노평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9-11).

 

본서 저자와 빌립보서 저자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할 때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분의 승귀(承句)라는 위대한 주제를 진술할 수 있었다.

 

 

[52:14]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

 

여기 '놀랐다'는 선지자 에스겔이 두로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된 'שָׁמֵם 샤멤 shamem'인데,

 

에스겔은 섬들의 거민들이 한때 교만하던 두로가 엄청난 하나님의 응징을 받은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질리는 것을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본 동사를 사용한 바 있다.

 

(27:35 섬들의 모든 거주민들이 너로 인해 놀라며 그들의 왕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 있으리로다).

 

본절에서도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동일한 동사가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본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질리듯 놀란 것은 종의 모습이 너무 상하여서 사람의 모습 같지 않을 정도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두로 처럼 그 종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52:15]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 여기 '후에는'은 시간적 경과를 나타내는 부사가 아니라 14절에 나오는 '상하였으므로'와 본절의 동사가 동시 동작임을 암시하는 부사이다.

 

말하자면 그가 상해 있는 동안에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부사라는 말이다.

 

한편, '놀랠 것이며'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해당하는 '예제'를 어떤 학자들은 '기뻐 뛰게 할 것이다', '경배할 것이다' 등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전에 팔레스틴에서 발견된 매우 오래된 본서 사본에 따르면,

본 동사는 '뿌릴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다(sprinkle, KJV).

 

이 번역은 맛소라 본문의 직역과 동일하다.

더 나아가 뿌린다는 것은 레 4:6;8:11;14:7등에 나오는 것처럼 결례 집행을 암시한다.

 

(4:6 손가락을 그 피에 담그고 주 앞에서 곧 성소의 휘장 앞에서 그 피를 일곱 번 뿌릴 것이며;

 

8:11 또 그것의 일부를 제단 위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제단과 그것의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것의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거룩히 구별하며;

 

14:7 나병에서 정결하게 될 자에게 일곱 번 뿌려 그를 정결하다고 선언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빈 들판에 놓아줄지니라)

 

결례를 집행하기 위하여 뿌리던 자는 제사장이었다.

그렇다면 본서의 ''의 사역 역시 제사장의 사역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부사 '후에는'과 연결시켜 보면 그 ''은 그토록 무섭게 상해 있는 동안 바로 이 결례를 집행하신다는 뜻이 된다.

 

많은 무리에게 전적으로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 바로 그 분이 오히려 대제사장으로서 물과 피를 뿌릴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열방을 정결케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그분은 너무도 고난을 많이 당하신 수난자로서 그 일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고난들은 속죄적 정결을 위한 것이다.

 

입을 봉하리니 - 이 표현은 어떤 소식에 압도되어버린 상태를 나타낼 때 처한 것은 수난과 종의 사역이 성공적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형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본 예언을 복음 자체에다 다음과 같이 적용시키고 있다 :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본절을 포함한 13-14절은,

 

(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53장에서 전개될 위대한 주제의 요약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