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9일 수요일

내가 친히 분노하여 그들을 밟고 친히 격노하여 그들을 짓밟으리니

 단독의 세력

 

이사야서 631-6: 에돔에서 나오며 물들인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나오는 이 자가 누구냐? 의복이 영화롭고 자신의 큰 능력으로 다니는 이 자가 누구냐? 의 안에서 말하는 나니 곧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자니라.

2) 어찌하여 주의 의복이 붉으며 주의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와 같으니이까?

3) 만백성 중에서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노라. 내가 친히 분노하여 그들을 밟고 친히 격노하여 그들을 짓밟으리니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히리라.

4)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속에 있고 내가 구속할 자들의 해가 이르렀으나

5) 내가 보니 도와주는 자가 없었으며 또 떠받쳐 주는 자가 없었으므로 내가 이상히 여겼노라. 그러므로 내 팔이 내게 구원을 가져왔으며 내 격노가 나를 떠받쳤느니라.

6) 내가 친히 분노하여 만백성을 밟으며 내가 친히 격노하여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기력을 땅에까지 끌어내리리라.

 

 

지금은 누구이든 일을 하고자 함에 있어서 다수에 의해 하고자 한다.

 

다수의 찬동을 얻는 것이 성공 제 1() 이지, 이 찬동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오늘의 사람은 믿는다.

 

여기서 선전의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선전의 목적은, 다수의 찬성 환기에 있다.

 

사회의 세론을 불러일으키고, 자기설에 찬성을 얻어 가지고서, 그런 후에 그 실행을 기대하는 것이 지금의 사람이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이다.

 

정치계에 있어서, 정당의 필요가 제창되고, 종교계에 있어서 교회의 필요가 주창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이 단독의 힘(능력)을 믿지 않고, 다수에 의하지 않고서는, 무슨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사람에게 있어서도 다수, 있는 세력이다.

 

의회에 다수를 제어하기까지는, 대진리라 해도, 이에 실력은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로는, 성서는 다수의 세력을 인정치 않는 것이다.

 

성서는 먼저 제일로 하나님의 세력을 인정하고, 그런 후에 하나님께 의뢰하는 개인의 세력을 인정한다.

 

다수는 약한 사람의 다수로서, 위대한 일이 그들에게 행해질 것으로 믿지 않는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라는 것은,

 

단지 왕공 귀족만을 가리켜 한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을 가리켜 한 것이다.

 

정당도 교회도, 단체도 조합도, 사람이라는 사람은, 그 수는 아무리 많다 해도, 모든 풀의 꽃과 같다는 것이다.

 

성서는 군주정치도, 대의정치도 믿지 않는다.

성서는 다수에 의하지 않고서는 일을 할 수 없다고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고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대사를 행하심에 있어서, 다수의 세력으로써 하지 않고서,

단독의 힘으로써 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심에 있어서, 민족운동을 일으키게 하시지 않고서, 모세 한 사람을 택하사, 그를 보내어 그 한 사람으로써 노예 백성에게 자유를 주셨다.

 

더 거슬러 올라가,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려 함에 있어서, 어떤 민족을 택하여 이를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 한 사람으로써 성민, 4천 년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이스라엘의 왕 아랍 치세에 예언자 엘리아는 다만 한 사람, 왕과 바알의 예언자 400인을 상대로, 신앙 혁정의 열매를 올렸다.

 

기타 이사야도 한 사람, 예레미야도 한 사람, 에스겔도 한 사람, 아모스도 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 개혁의 세력이었다.

 

왕에게 의뢰치 않고, 다만 한 사람, 대 타락, 대 부패에 대하여 싸워 근본적인 혁정을 이룩했다.

 

실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국민의 역사를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용자가

혼자 서서 구원을 베푼 그 사적의 기록이다.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같은 방법으로써 세계를 구원하셨다.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을 밟았도다’(이사야 63:3)라는 것은, 세상의 구주께서 발하신 소리였다.

 

예수는 다만 혼자(한 사람), 세상 죄를 몸에 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이를 제거하셨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운동은 아니었다. 예수 1인의 속죄의 생애와 죽으심으로였다.

 

인류는 이에 의해 구원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본받아 스데반은 혼자 순교사하고, 그에게 격려되어 바울은 혼자 세계교화의 길에 올랐다.

 

단테(14p 역주)도 혼자서, 사보나롤라(1237p 역주)도 혼자서 루터도 처음은 혼자였다.

 

() 운동은 모두 민중의 집회에 있어서 시작된 것 아니고, 신자 개개의 밀실에 있어서 시작되었다.

 

세계 개조의 실력은,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신(영혼)에 접하는 곳에서이다.

 

집회 집회라고 하여, 다수의 세력을 기다려,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성서적은 아니다.

또 그리스도적은 아니다.

 

회의 또 회의, 대회 또 대회이다.

 

이 일본에 있어서도 이미 세계 청년회 대회를 보고, 또 세계 일요학교 대회를 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교세는 조금도 오르지 않고, 신앙은 조금도 오르지 않고, 신앙은 조금도 진보되지 않는다. 듣는 것은 여전히 교세 부진의 소리이다.

 

그리고 이제 또 예루살렘에 있어서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 신도의 대회가 개최되려 하고 있다. 그것이 신앙적으로 아무런 영구적 결과를 기대할 것이 없을 것임은 오늘까지의 예에 비추어 보아 분명하다.

다수에 있어서 세력을 인정하는 것은 미국인의 버릇이다.

 

민중은 그들의 우상이다. 민중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그들은 일컬어 성공이라고 한다.

 

그들은 분명히 성서의 가르치심을 어기면서 성서의 가르치심을 세상에 펴려하고 있다.

 

깊이 성서를 상고(공부)하지 않고서, 다만 널리 성서를 반포하여, 세계 교화를 도모()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배워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엘리야, 한 사람의 예레미야가 일어나기를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가 그 한 사람됨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결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멀리 예루살렘까지 그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갈 필요는 조금도 없다.

 

이 일본에 있어서, 이 후지산(47p 역주 참조)를 바라보면서, 이 다마가와의 물을 마시면서, 만군의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그 성령을 받아 능력 있는 자로 될 수가 있다.

 

오인,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나 한 사람은 전 세계보다도 강함 있다.

 

이렇게 말함은, 결코 과대적 망상은 아니다. 진지한 사실이다.

 

다수에 의함은 말과 전차에 의지하는 만큼의 배신이다.

 

우리들은 집회 호사의 미국 종교가에 따를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따라, 먼저 홀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그에게, 힘입음을 얻어,

대중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내촌감삼의 (19282월 성서지연구)를 참조.

2026년 4월 28일 화요일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도움을 구하는 기도

 

성 경: [63:15-19]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17)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18)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19)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63:15]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 본절에서 부터 현재의 재난과 역경의 문제에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되기를 원하는 이스라엘의 탄원이 시작된다.

 

그들의 탄원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의 자녀로 택하신 사실과 과거 그의 조상들을 동일한 어려움에서 구원하셨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간곡한 자비(הָמוֹן 하몬 hamon מֵעֶה 메에 meeh) - '하몬'은 빗소리와 같은 소리,

 

(왕상 18: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많은 빗소리가 있나이다, 하니),

 

노랫소리,

 

(26:13 내가 네 노래 소리를 그치게 하리니 네 하프 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무리의 떠드는 소리,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삼상 4:14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소동하는 소리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니 그 사람이 속히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라;

 

14:19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 내의 소리가 계속 나면서 커지므로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니라)

 

여기서는 '풍요', '풍부' 정도의 의미로 보면 무난하겠다.

 

그리고 '메에''부드럽다'는 뜻의 사용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복부' 혹은 상징적으로 '동정심'을 뜻한다.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할 때 본 구절의 뜻은 '풍부한 자비' 정도가 되겠다.

 

 

[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대비적 표현이다.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야곱)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자들이다.

 

한편, 본문은 49:15을 생각나게 한다:

 

"여인이 어찌 그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63:17]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 인간이 냉소적으로 그리고 완고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는 일을 멈추고 그들로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이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수 없게 되는데, 이 경우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으로 판단하고 불평하게 된다.

본 구절은 바로 이스라엘의 그 같은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Keil & Delitzsch).

 

그러나 16절에서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 구속자로 고백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진 사실을 고백하는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64:5 주께서는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들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만나시거늘, 보소서, 우리가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나 주의 길들이 지속되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리이다).

 

 

[63:18]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주의 거룩한 백성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졌었다.

 

(62:12 그들이 그들을 가리켜, 거룩한 백성이라. 주께서 구속한 자들이라, 하며 또 너를 가리켜, 찾아낸 자라. 버림받지 아니한 도시라, 하리라;

 

7:6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거룩한 백성이니라. 주 네 하나님께서 지면 위의 모든 백성들 위로 너를 높여 자신에게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63:19]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본절은 그 의미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원문과 문맥에 충실하면 의미 규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핵심은 개역 성경의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부분을 정확히 규정하는 일인데 원문은 이렇다:

 

'하이누 메올람 로 마솰타 밤'.

 

이것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당신은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읍니다'이다.

 

바로 앞절에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가나안을 점령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그 언급 후 바로 이어지는 '영원 전부터, 곧 옛적부터 우리는 당신의 것'이라는 고백은

대적이 그들의 본토를 점령한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가능한 추론은 옛적부터 하나님이 택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니 그것을 근거로 그 대적을 본토로부터 몰아내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고백은 자신들의 본국 귀환의 근거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다''그들'이란 이스라엘의 대적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본국 귀환의 또 다른 근거로서, 그 대적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그 같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할 것은 당연하다.

 

이상의 소고(召誥)를 정리할 때 본 절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사실과 그의 대적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민족인 사실을 근거로 자신들의 본토로의 귀환을 호소하는 탄원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