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일 목요일

A.D 600-1200년의 교회사 2

 4. 한편 필자(J.M. Carrol)가 주의하여 오지 않았던

한 가지 새로운 교리가 있는데,

그 외에도 더러 있겠지만 특히 유아 성찬이라는 것이다.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받아들여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였고

그들도 역시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의 만찬을 베푸는 방법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빵을 포도주에 적셔서 주는 것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교리가 첨가되었으니

이러한 유아 성찬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교리가 첨가되어진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 강의의 후편에서 다시 말씀드리기로 한다.

 

 

5. 5세기 동안에 곧 A.D 451년 칼세돈에서 개최된 제4회 공회의에서는

급속도로 늘어가고 있는 교리의 목록에 새로운 또 하나의 교리가 오르게 되었다.

 

이 교리는 성모 숭배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숭배라 불리었다.

새로운 중보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의 중보자,

설령 그가 하나님의 아들 곧 육신을 입으신 참 하나님의 그리스도라 할지라도

또 하나의 중보자로서 마리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기도는 마리아를 향하여 드리게 되었고,

마리아는 그들의 기도를 그리스도에게 전달하도록 결정되었던 것이다.

 

 

6. 8세기에 다른 두 가지의 새로운 교리가 천주교의 신앙에 첨가되었으니

이는 A.D 787년 니케아에서 열렸던 두 번째의 공회의에서 선포되었던 것이다.

 

그중 하나가 성상(聖像) 숭배이며, 바로 하나님의 계명 중

그 하나를 모독하는 것이었다.

 

 

(출애굽 20:4,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이는 이방 종교에서 첨가된 또 하나의 교리였다.

이에 따라서 성인 숭배라는 것이 행해졌다.

 

그러나 이 교리는 성경 안에 장려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단 한 번 성인 숭배의 실례가 성서에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인 숭배라는 것이 아주 어리석은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죽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기원하였던 것이 그 예인 것이다.

 

(누가 16: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너희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들 가운데서 높게 평가받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니라.

 

19-31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더라.

20) 또 나사로라 하는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더라. 또한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더라.

22)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 그 부자도 죽어 묻히게 되었더라.

23)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가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아들아, 너는 너의 평생에 너의 좋은 것들을 받았고 그와 같이 나사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26)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하는 자들이 갈 수 없고 거기서 오려 하는 자들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느니라, 하니

27) 이에 그가 이르되, 그러므로 아버지여, 간구하건대 아버지께서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소서.

28)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가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않게 하소서, 하거늘

29)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대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저들의 말을 들을 것이니라, 하매

30) 그가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 하니

31)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그들이 모세와 대언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지라도 그들이 설득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러한 것들은 교회 역사상 이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서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많은 변화 중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7. 이 시기를 통하여 박해를 당하였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명칭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 명칭 중에는

도나티스트, 페이터린, 카타리, 홀리시안 및 아나 밥티니스트 등이 있었으며,

후대에 와서는 페트로-브루시안, 아놀디스트, 헨리시안, 알비젠시스 및 월덴시스

등이 있었다.

 

이와같이 그들은 때에 따라서 여러 이름들로 불렸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 중에는 그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심한 핍박을

당하여 왔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쓰여진 것도 있었다.

 

 

8. 그렇다고 해서 박해를 받았던 그 사람들이

항상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신실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 중 얼마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처해 있었던 환경을

고려해 볼 때 놀랄 만큼 신실하였다.

 

아득한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약이든 구약이든

그 일부분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은 양피지나 짐승의 가죽에

손으로 기록하여 필연적으로 방대한 분량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령 어떤 가정이나 개체 교회가

성경의 일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성경 66권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곳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아마 성경의 66권이 정경으로 제정되기(4세기 말) 이전까지는

완전한 신약성서의 사본이란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지금 알려져 있는 수천의 사본 중에서 신약 전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겨우 30부 정도밖에 없다.

 

 

9. 더욱이 암흑시대와 이 핍박 시기에는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얼마 되지 않는 성경의 사본까지라도

없애 버리려는 극심한 박해가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의 극히 일부분만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0. 또 주의하여 바라볼 것은

가톨릭의 교리에 위반되는 어떠한 견해이거나

또 그것이 전파되어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아주 극단적인 계획과 수단이 감행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첫째로,

어떤 종류의 책이든지 그것이 천주교 이외의 서적일 때에는

다 모아 불살라 버렸으며,특히 성경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러한 계획과 수단은 여러 세기 동안 강력하게 꾸준히 계속되어 왔었다.

 

역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정확한 역사를 알아내기 어려운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저술가와 설교자들 역시 순교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는 실로 피비린내 나는 시대였다.

 

모든 완고한 이단자들”(그들은 이렇게 불렸다)

어떤 특수한 이름으로 불리었거나 또한 어떠한 곳에 살고 있든지를 막론하고

처참한 핍박을 받아 왔던 것이다.

 

도나티스트와 폴리시안들은 초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현저하게 드러난 사람들이었다.

 

이상하게 보일는지 모르나

가톨릭은 그들의 신앙에서 벗어나서 자기들과 같이 믿기를 거부한

모든 사람들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즉 이단이라 비난하였고 처단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가톨릭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이교화되었으며 유대교화되었고,

복음의 능력보다는 세상 권세의 힘으로써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 말씀에 따라 실행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새 법률을 만들었던 것이다.

 


2023년 5월 31일 수요일

A.D 600~1300년의 교회사

 3 () : A.D 6001300년의 교회사

 

 

1. 우리는 제1강을 5세기 말에서 끝마치었다.

그러나 제1강에서는 아직 언급하지도 않았던 많은 사건이

이 초기의 수 세기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세계 역사상에서 바로 암흑시대라 알려져 있는

무서운 시대에 들어왔다.

 

그것은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말할 수 없는 무서운 시대였다.

제도화된 로마 천주교에 의한 박해는, 가혹하고 잔악하며 계속되었다.

고의적인 섬멸전이 끊임없이 그리고 참혹하게 여러 나라로 도피해 간

그리스도인들의 뒤를 따랐다.

 

어느 곳에나 남아있는 것은 거의 전부 피 흘린 발자취뿐 이었으며

특히 영국, 웨일즈, 아프리카나, 알바니아 및 불가리아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곳 외에도 어느 곳에서나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신실하려고

완강하고도 간절한 노력을 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2. 이제 우리는 에큐메니칼, 또는 전 제국회의라는 공회(종교회의, council)에 대하여

주목하기 바란다.

 

이러한 모든 공회들은 표면상으로는 사도들과 그의 다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개최하였던 교회 회의(15:1을 보라)

기초를 두었고 또한 그것을 모방한 것 같지만,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형제들을 가르치며 이르되, 너희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그러나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처럼 서로 닮지 않은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는 다만 여덟 번의 공회(종교교회)에 대하여 고찰해 보려 한다.

그것은 다 각기 다른 황제들에 의하여 소집되었던 것이며

그중 하나도 교회에 의하여 소집된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공회 등은 동방, 또는 그리스 교회들 사이에서 개최되었지만.

때로는 서방 즉 로마 천주교의 대표들도 참석하였던 것이다.

 

 

 

3. 첫 번째 종교회의는 AD 325년 니케 혹은 니케아에서 개최되었고

이는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소집되었던 것인데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두 번째 종교회의는 AD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고,

테오도시우스 대제에 의하여 소집되었으며 150명의 감독들이 출석하였다.

(초대에는 감독이라 하면 단순히 지역 교회의 목사를 의미하였다.)

 

 

셋째 번은 티오도시우스 2세와 발렌티안 3세가 소집하였고 250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으며 이는 AD 431년 에베소에서 개최되었다.

 

 

넷째 번 공회는 황제 마리안이 AD 451년 칼세돈에서 소집하였다.

500명 내지 600명의 감독들과 메트로폴리탄(감독장)들이 출석하였다.

(‘메트로폴리탄은 도시교회의 목사 또는 큰 교회의 목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종교 회의에서 소위 오늘날 성모숭배(聖母崇拜)의 교리가 공포되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숭배한다는 굉장한 소동을 일으켰으며

심각하게 반대하는 이도 많이 있었으나

결국 천주교의 항구적인 교리가 됨에 따라 승리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여덟 번의 공회의 중 다섯 번째 것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리었다.

(두 번째 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이는 AD 553년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165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이 회는 주로 어떤 문서를 정죄하기 위하여 개최된 것 같이 보인다.

 

AD 680년에 여섯 번째의 공회가 개최되었다.

이 역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콘스탄틴 페고네이터 황제에 의하여

이단을 규탄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던 것이다.

이 회의를 통하여 오노리우스라 이름하는 교황이 폐위되었고 파문당했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는

교황의 절대 무오설(敎皇無誤設)이 선포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일곱 번째의 종교회의는 AD 787년 니케아에서 소집되었다.

이는 이곳에서 개최된 두 번째의 공회였다.

아이렌 왕후가 이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성상 숭배와 성인 숭배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같이 보인다.

 

즉 이러한 회의를 통해서 기독교가 성경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노골적으로 이교도화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소위 동방교회 회의라 불리는 여덟 번째의 공회는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어진 것인데,

AD 86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이는 발실리우스 마레도 황제가 소집했으며,

이때 가톨릭은 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가톨릭의 두 분파 - 동방 및 서방 빛 희랍파와 파와 지파-,

 

동방 및 서방 즉 희랍파와 로마파-의 영도자 곧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그리스의 폰티우스 총주교와 로마의 니콜라스 1세 사이에

대단히 중대한 성질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시비는 대단히 심각한 것이어서

서로 상대방을 파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잠시 동안이지만 가톨릭의 수장 자라는 비어 있었고

따라서 주로 이러한 난관을

가능한 한 해결해 보려고 이 공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서로 우열(愚劣)을 다투었던 가톨릭 교파의 이 분열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만족할 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분쟁을 돌이키려는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로마 교황청의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고

황제가 아니라 로마의 교황이 모든 교회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기의 종교 회의에 관하여서는 본 장의 끝에서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