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성전 청결
마태복음 21장 12-17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참조 ;
(마가복음 11장 15-18절,
누가복음 19장 45-46절,
요한복음 2장 13-22절)
4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두 번 성전청결을 행하셨다.
전도의 처음과,
그 나중에 있어서 이것을 행하셨다.
전자를 기록한 것이 요한복음이다.
후자는 3복음서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
두 번인지 한번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두 번으로 보아 지장 없다고 생각한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수도상경의 당일에 이것을 행하셨다고 있고,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튿날 이것을 행하셨다고 있다.
즉 당일은 조사로 그치고 이튿날 결행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때의 노에 의해 행하신 것이 아니라,
심려의 결과 행하셨다는 것이다.
성전의 속용(세속적 용도)을 깊이 분 내셨기 때문이다.
네 기사 중에서 가장 활기 있는 것은 요한복음의 그것이다.
‘노끈으로서 채찍을
만들어 …’라고 있다.
실로 ‘주의 집을 위한 열심,
나를 삼킬 것이다’(요 2:17참조)의 기개가 있었다.
누구나가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예수는 결코 유화(宥和)한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른바 ‘어린양의 진노’(계시록 6:16)가 유감없이 발휘 되셨다.
(계시록 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예수는 어린양이었다.
하지만 이 어린양에게 노(怒)가 있었다.
그는 구주이신 동시에 심판인 이시다.
그의 눈은 명백한 불의를 사하기에는 너무나 거룩하셨다.
모든 성실한 사람은 노한다.
노하지 않는 사람은 불실의 사람이다.
칼라일(9권 83)의 영웅숭배론에 모하메트(7권 96)의 ‘이마의 푸른 줄기’라는 한 조목이 있다.
모하메트의 성실은 여기에 나타났다고 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에 있어서랴?
참된 사랑은 노한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성전 청결은
‘아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의 탄성을 발한 후에 행했다고 있다.
‘이미 가까이 이른 때,
성중을 보고,
이것 위해 우시고,
말씀하시기를’(19:41)이라고 있다.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 사랑 있어서 이 노하심이 있었던 것이다.
성전청결은 단지 성전청결 만은 아니었다.
성전의 탈환 또는 그 점령이었다.
예수는 여기서 하나님의 정자로서 아버지의 집을 요구하신 것이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부를 것이다’ (마태복음 21:13)라고 하시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한복음 2:16)고 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이다.
그러므로 내 집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예수는 여기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권리를 주장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권리를 주장하실 수 있는 자는 천상천하,
그를 제외하고 달리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하신대로 성전 청결을 하실 수 있는 자는 달리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린 양이 못되는 우리들은 ‘어린양의 진노’ 그대로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사장과 학자는 성정을 사용하고,
예수는 그들의 제거하는 바로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신성으로서 정당한 요구를 철회치 않으신다.
그는 다시 성전에 나타나신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의 손에 거두어들이신다.
그의 재림이 그때이다.
구약 말라기서 3장에 이르기를
“너희가 구하는 바의 주는 홀연히 그 성전에 오실 것이다 너희가 기뻐하는 바의 언약의 주는 보라,
그는 오실 것이다라고 만군의 여호와 말씀하신다.
그가,
오시는 날에 누가 감당할 수 있으랴 그가 나타나는 날에 누가 설 수 있으랴.
그는 금을 연단하여 나누는 불 같도다.
또 표백하는 자가 쓰는 잿물 같도다.
그는 은을 연단하여 나누어 이것을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으실 것이다.
그는 레위의 자손을 깨끗케 하실 것이다.
금은 같이 그들을 끼끗케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 드리게 될 것이다.
이로서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
그 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은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바로 될 것이다.
오랜 옛 날에 있어서와 같이 이전 해에 있었던 것 같이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바로 될 것이다”.(말라기 3:1-4 참조)
예수는 그렇게 다시 나타나 철저하게 성전을 깨끗케 하신다.
그리고 그의 처음의 성전 청결은,
이 나중의 성전 청결을 예표하여 행해진 것이다.
예언은 성취되지 않고서는 마지않는다.
하나님의 성전은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청결될 것이 정해져 있다.
성전 청결은 오늘의 말로서 하면,
교회개혁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성전)으로서,
이것은 지상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그의 이름만이 소리 높여 불리고 그의 뜻은 행해지지 않는다.
교회는 대개에 있어서 지금도 도적의 소굴이고,
또 장사하는 집이다.
이것을 깨끗이 함의 곤란은 옛적의 예루살렘의 성전을 깨끗케 함의 곤란과 한가지이다.
그리고 몇 차례인가 교회개혁의 소리는 올랐으나,
그 철저적 실행은 지금도 행해지지 않는다.
후스,
사보나롤라(1권 237),
위클리프 등이 이것을 시도하여,
교회의 소살하는 바로 되었다.
교회개혁은 지금의 시대에 있어서도 예수의 성전 청결만큼,
그것만큼 무효이다.
그러나 교회 개혁이 철저하게 완전하게 행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은 계약의 사자 즉 그리스도가 홀연히 그 성전에 오시는 그 때이다.
교회개혁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 때까지 기다리면 좋은 것이다.
생명을 걸고서 복음의 진리의 증명을 행하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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