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8일 일요일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

요한복음 5 40-47 :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너희의 바라는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면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1992 당시 김영삼 대통령 후보는
"김영삼의 개혁, 경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고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했겠지요?

"김영삼의 개혁, 경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아무튼 그것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김영삼 후보는
멋지게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국민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선서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영광은 5년이 지나고 다시 대통령 선거를 2주를 남겼을
국제 통화기금(IMF) 부터 IMF 사상 최대의 구제 금융을 굴욕적으로
얻어 와야 하는 경제의 국치일을 맞는 수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I am F - 나는 F 학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국은 난파 지경이 국가의 대통령 자리를 위해
서로가 난파선의 선장이 되겠다고 외치는 함성으로 귀가 막힐 지경입니다.

저는 사실 경제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아니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해서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 정치와 경제를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실정을 논박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광스럽게 살고 싶어 합니다.
영광을 누리며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광스럽게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고달픈 인생을 살아갑니다.

권력만 있으면 영광이 찾아올 알고 권력의 이동에 민감합니다.
여기를 따라가 보기도 하고, 저기에 기웃거려 보기도 합니다.
어제만 해도 여기에 있던 사람이 어느새 정당을 바꾸어 저기에 있습니다.
권력의 얻을 있는 기회가 저곳에 많다고 생각하고 결정한 탓일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유혹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서 시험을 받으신 번째의 것이
바로 권력에의 유혹이지 않았습니까?
엄청난 유혹입니다.

그러나 유혹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어쩌면 김영삼 대통령 정권에서 7명의 경제 각료들이 명멸했던 것에서
있었던 것처럼 권력은 참된 영광의 상징이 아닙니다.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파리 목숨 같은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것입니까?

어떤 이들은 -경제력만 있으면 어떤 영광도 누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만 좇아 다닙니다. 눈에 핏발이 서도록 돈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돈도 우리의 영광은 아닙니다.

거부였던  펠러 말을 들어보십시오.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삶은 돈밖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다.".

진리의 고백 아닙니까?
돈이 부유함과 영광의 상징이 아닙니다.
부유함으로 우리 인생의 참된 영광을 수는 없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선교하시는 정재화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가지고는 선교가 안됩니다.
돈과 다른 부수적인 것들은 오히려 복음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오직 복음으로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돈이 있다고 그들에게 구원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있다가 금방 없어지는 영광은 영광이라 없습니다.
그것은 불안한 영광입니다.
영광을 누리면서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영광이
기쁨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매달려 있는 , 눈앞에 드러난 것에 의해 움직이는 삶은
우리의 영광스런 삶의 목표일 없습니다.

진정한 영광이 되려면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이라야 영광스러운 삶이 됩니다.

소멸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루 아침에 생겨났다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최소한 그런 것을 위하여 투자하는 삶이 되어야 영광스러운 삶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영원히 있어야 하는 것에는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장에 표가 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눈은 해에 바뀌어 버리고 ,
아니 안에 바뀔 패션과 같은 것에 눈이 매혹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의 길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4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눈앞에 것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이라는 것은 전혀 매력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당장 드러나지도 않는
영원한 것에 투자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증권시장에 가보신 분이 계십니까?
가보시면 하루 종일 그곳에 상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식값이 상승하고 하락하는 것에 의해 희비가 엇갈립니다.

요즘 한국처럼 주식 포인트가 400이하로 떨어지면 아예 낙망해버리고 맙니다.
주식 값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아버린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영원한 것이 있는 예수님께로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예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께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 아닌 다른 ,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지요.
당장 변화가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과 칭송은 바로 눈앞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들 때문에 영광을 누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매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는 영광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김영삼 대통령이든, 노태우 대통령이든,
아니 영원히 권력을 잡고 싶었던 유신 정권의 박정희 정권이든 영원할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우리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우리도 걸어야 그리스도인이라 불림을 받을 있습니다.
영광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혹시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수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안의 누구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삽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영광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사람에게서 영광을 얻으려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1986 5 15일자 아틀란타 져널에 놀라운 기사가 소개되었습니다.
월남전에 참전한 병사가 전쟁터에서 다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고통과 좌절의 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대 피나는 노력으로
불구의 몸이지만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California State University
체육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그가 성경 로마서를 읽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남아있는 손으로 대륙 횡단을 결심하고
결국 2,784마일이나 되는
로스엔젤리스에서 워싱턴 D.C.까지의 횡단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금된 돈이 엄청난 액수인 3십만 5천불이 되었는데
돈을 고스란히 가난한 이웃들에게 보내어 버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Bob Wieland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살아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과는 다른 것을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39절로 되돌아가 보실까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읽을수록 사람들에게서 얻는 영광에서 멀어질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서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분주합니다.
또한 서로 좋은 평판과 칭찬을 주고 받기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좋은 평판과 칭찬을 받으면 삶에 용기가 생깁니다.
그렇지만 반대의 경우가 되면 마음에 불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잠언 25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그러나 자신의 영광을 얻는 일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어도 잘못 읽게 됩니다.
말씀을 자기 편한대로 읽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영원을 사모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들려오는 칭찬과 아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기뻐하기도 하다가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들 중의 사람들이라고 자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러했습니다.
길게 늘여뜨려진 옷을 입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의 목소리를 높이고,
금식과 선행을 드러내고 싶어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이들이 자신들 만을 쳐다봐 주기를 기대하고,
그들만을 칭송해 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안중에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기만 하면,
그들에게 인정받기만 하면 안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기준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잣대로 재보아서 제대로 되었다고만 하면
조금도 두려워 것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 눈에 하나님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람들의 평가만 있으면 되는데 어디에 하나님이 소용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거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영광은
소중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가장 약점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삶의 기준을 제대로 모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나가서 혹시 "기준!"이라고 외쳐 적이 있습니까?

줄서는 것은 아무렇게나 줄서는 것이 아니라
기준에 보고 줄을 서야 합니다.
기준이 어디에 있는 지를 정확하게 보고 거기에 따라가야
제대로 줄을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만일 기준이 왔다갔다 하면 전체가 흔들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사람들이 가진 잣대가 아닙니다.
사람의 인정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멋진 평가가 있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가 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누가 이렇게 평가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살피시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고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치는 외적인 몸으로, 외적인 조건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신체적인 무게보다
영혼의 무게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무게-돈이든지 권력이든지 학벌이든지
무엇이든 그런 무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바로 우리 영혼의 무게를 늘여
우리에게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2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번 죽고 마는 인생이 아니라
새롭게 살게 인생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서 오는 영광을 위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것들은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알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의 것들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민 생활에서 사업을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대요.
되는 사업이 있으면 옆에 동일한 업종을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상하지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질시하고 경쟁합니다.
결국은 서로 원수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결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왜요?

결국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맡길 아는 사람들은 거래하는 것이나 사업을 때도
사람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니까 걱정하고 고민하고 미워하면서 찡그린 얼굴로
어쩔 수없이 사업하는 것입니다.

옆집에 동일한 업종이 들어온다고 우리가 말릴 있습니까?
들어오면 감사하지만 들어오는 어쩔수 없지 않겠습니까?
건물주가 누군가에게 rent 해준다면 어쩌겠습니까?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과감하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최선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좇겨 다니지 마십시오.
사람들 때문에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 때문에 고민하십시오.
이럴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를 고민하십시오.
결국 사람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때문에 낙심하고, 염려하고,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것에서 벗어나십시다.
우리는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의 무게에 관심을 가지시고 무게를 재어보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서 얻은 권력과 영광의 무게를 가지고는
아무리 하나님의 저울대에 올라서봐야 무게가 나가지 않습니다.
다니엘의 말대로 저울에 달아보면 부족함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과 그들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글을 적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가 경계해야 가장 적이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가지는 전부다 영어로 G 시작합니다.

첫째가 (Gold),
둘째가 명예(Glory),
셋째가 여자(Girl)입니다.

옛날부터 익히 들어온 것입니다.
목사도 어쩔 없이 유명인의 명단에 들어가 보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다른 목회자보다 이름이 나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교회에서 받는 생활비도 마치 자신이 목회에서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쉽게 말하면 권력을 나타내는 수치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멋진 자동차를 몰고 다님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고,
교회의 성도의 숫자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저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그런 것들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목회자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에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는
결국 오늘 말씀 마지막을 통해서 보면 믿음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속에 주님 향한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으로 인해 만족을 누릴 있고,
믿음이 식어지면, 믿음이 없으면
자꾸만 사람의 이야기와 사람의 평가가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열쇠입니다.
믿음의 성숙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믿음을 위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유명한 해군 제독 뤽오버에게 젊은 장교가 인터뷰를 받고 있었습니다.
시사문제, 전투함의 구조, 해군의 전략, 문학등
많은 질문에 이어 가지 질문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대는 해군사관학교 졸업시 석차가 어떠했는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 820 59 했습니다.".

이때 제독은 쏘아 보듯한 눈으로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 성적이 그대의 최선의 결과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대답한 것에 갑자기 제동이 걸렸습니다.

"글쎄 최선을 다했다고는 말할 없는 같기도 합니다만...",

다시 제독의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 그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Why not the best?",

이때부터 젊은 해군 장교의 도전적인 좌우명이 결정되었습니다.

"Why not the best?".
"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젊은 장교가 바로 지미 카터 대통령입니다.

언제인가 우리는 주님 앞에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묻지는 않겠습니까?

"최선을 다했는가?".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믿음의 경주를 했는가 물으실
자신 있게 대답할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영원한 영광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있어야 자리에 있어야 인간답습니다.
자기의 자리매김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뛰어난 사람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자리잡고 있으시겠습니까?

사람이 하는 평가의 자리에서 만족하면서,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많이 갈등하면서
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의 자리, 믿음의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나님의 평가에, 하나님의 인정에 민감하게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누리면서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3,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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