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30일 수요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바리새인과 그리스도교회

 

마태복음 231-12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참조 ; 마가복음 1238-40.

 

예수와 교직(敎職)과의 충돌에 있어서,

그는 최후까지 인내의 태도를 취하셨다.

 

그들의 책문(censorious question)에 대하여,

그는 어디까지나 설명유도의 길로 나가셨다.

그는 그들이 멸망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여서라도 그들로 하여금 그가 구주이신지를 알게 하여,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대죄를 범하는 일 없게 하시려고 애쓰셨다.

 

하지만 예수의 노력은 무효였다.

그와 교직과의 사이에는,

오해의 가교를 놓을 수 없는 깊고 넓은 도량(gutter)이 가로놓여 있었다.

 

문답은 마침내 파열에 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십자가는 보일보 가까워 왔다.

그리고 파열에 앞서서 주의가 있었다.

이미 교직에 주의함의 필요는 없었다.

학자와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사람이 그 죄를 회개치 않는 경우에는,

그에게 비추어 보아 그 죄를 피할 필요가 있다.

 

너희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피하). 이것 위선이다’(누가복음 12:1)라고

가르치심은 이것이다.

 

학자와 바리새인에 배우지(본받지)말라.

예수의 제자인 자는, 그들과 전연 그 행동을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의 주의는, 거짓 교사를 배척하는 일이다.

 

학자와 바리새인은 모세의 자리에 않는다.

그러므로 모두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바를 지켜 행하라.

하지만 그들이 행하는 바를 하지 말라.

대저 그들은 말할 뿐이고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교직은 교직으로서 존경할 것이다.

모세의 권위로서 말하는 자에게,

모세에 대한 같은 존경으로서 대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를 통하여 임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삼가 이에 복종할 것이다.

 

하지만 교사의 행위에 따르고 (배우고) 않는 것은 우리들의 자유이다.

 

그리고 거짓 교사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고,

그 행위는 따르지 말라는 가르치심이다.

 

참으로 깊은 지혜가 있는 가르치심이다.

교사의 행위로써 그 가르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이 가르침이 복응될 것인가,

허다한 교회소동은 없이 지낼 것이다.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가장 악한 교사가 가장 선한 가르침을 전한다.

 

물을 옮겨 운반하는 관을 마시는 것 아니다. 생명의 물을 마시는 것이다.

관의 선악에 의해 물의 선악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행동은 별개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것을 행동으로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행동에 있어서 우리들은 바리새인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무겁고 또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게하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이것을 움직이려 않는다.

 

즉 계율을 내릴 뿐으로서 이것을 행함의 능력을 주지 않는다.

하라, 하지 말라고 명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함의 동기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는 그러한 교사가 아니었다.

그의 계명은 엄격했다.

그는 그것과 함께 이것을 행함의 능력을 주셨다.

그 자신이 우리들의 죄를 지고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셨다.

 

간략히 말한다면, 바리새인의 가르침은 율법이지 복음은 아니었다.

은혜가 따르지 않는 도덕이었다.

그들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둥하였다.

 

우리들은 그들의 자취를 밟으면서,

십자가의 구원이 따르지 않는 산상의 수훈을 말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바리새종이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

사회에 인정되기 위한 종교,

교사라 불리고 사부라 불리며 박사로서 높임받기 위한 종교였다.

즉 전연 속화(俗化)된 종교였다.

 

그리고 예수는 불사르시는 열심으로서 이 종교를 배척하셨다.

그는 학자와 바리새인의 종교와 자기의 종교를 비교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쳐 말씀하셨다.

 

너희 중, 큰 자는, 너희의 종이어야 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추어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여질 것이다. ’(마태복음 23:11)라고.

 

의미는 아주 명료하여 누구도 이것을 오해할 것 아니다.

경문이란, 성서의 구를 써서 이것을 수호패 처럼, 이마 또는 팔에 맨 것이다.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예수의 말씀의 의미가 아니라,

그의 제자라고 칭하는 이들이

이 명백한 그의 말씀에 문자대로 거슬려 오늘에 이를 것이다.

 

오늘도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그리고 자칫하면 우리들 사이에 있어서,

바리새파가 문자대로 실현되는 것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보이기를 바란다.

사회에 인정되는 것으로서 세력을 얻었다고 하여 기뻐한다.

 

일본 기독교회와, 조합교회와, 일본 메도디스트교회와 일본성공회가

일본의 4대교회로서, 종교적 일본의 천하는 그들 사이에

4분 될 것이라고 공언하여 주저치 않는다.

 

너희는 랍비의 칭을 받지 말라고 예수는 분명히 가르쳐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신학사, 신학박사, 감독, 장로 등의 칭호를 만들고,

그리고 교사들은 이것을 받고서 기뻐하고, 또 자랑하는 것이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마태복음 23:9참조)는 명훈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천주교회는 그 수장을 일컬어 파파 또는 포프라고 한다.

법왕은 의역이고, ‘아버지라는 것이 그 자역이다.

 

예수는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가르치신데 대하여,

천주교회는 우리들은 교회의 수장을 아버지라 부른다고 분명히 반대를 표시하고 있다.

 

예수는 분명히 스승의 칭을 받지 말라고 했음에도,

모든 그리스도교회는 마치 주의 이 계명에 정반대를 표시하는 듯한 태도로서

그 교사를 부르는데 Reverend의 경칭으로서 한다.

 

이같이 하여 마태복음 235절 이하 11절까지의

주 예수의 말씀은 전부 하나하나,

그의 이름으로서 불리는 교회에 의해 깨뜨려져 있다.

세상에 이상(기이)한 일로서 그 같은 일은 없다.

 

그렇지 않은 것이 그리스도교회의 특징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은 단지 교사의 죄는 아니다.

 

이른바 평신도도 또 크게 관여하여 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이 곧 그리스도에게 인도되려 않고서 교사에 의지하는 까닭에,

교사는 절로

학자 또는 바리새인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는 스승은 한 사람,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신자는 모두 동등한 형제자매이다.

이것을 모르는 자는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열(range)할 자격이 없는 자이다.

 

사람의 약함을 말하여 교직제도의 필요를 부르짖는 자는,

아직 복음은 사람의 약함에 이기는 능력 있음을 모르는 자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