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3일 금요일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형식적 율법주의

 

성 경: [2:17-19] 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17]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 첫머리에

'이데'('보라'), 혹은 '에이 데'('그러나 만약')가 있다.

 

흠정역(KJV)이 번역한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은 전자를 취하지만,

대부분의 사본들과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A, B, D, K, )은 후자를 취하였다.

 

'에이 데'는 직설법과 함께 사용되어

실제로 발생될 수 있는 상태를 가정하는 조건절을 갖는다.

따라서 본절의 '에이'('만약')20절까지 조건문으로 취한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 '칭하는'의 헬라어 '에포노마제'

'이름을 붙이다' 또는 '칭함을 받다'라는 뜻을 가진

'에포노마조'의 현재 조건문으로

그 의미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유다이오스)

'히브리인'(헤브라이오스)이나 '이스라엘인'(이스라엘리터스)이라는 용어와 구별된다.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은 언어 군()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고,

이스라엘인이라는 호칭은 구속사적인 개념을 강조하는데,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헬라인이나 이방인들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모세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반영한다.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특권을 자랑할 뿐 아니라 그 특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월감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타났으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은 특권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에 걸맞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려면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언약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음을 무시했다.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내세웠으나

실상은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부여받은 특권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침례 요한의 책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얻게 된 유익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셔야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구원 계시'를 가리키지만

좀 더 폭넓게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계시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이 요청된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본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자들마다 약간씩 견해가 다르다.

 

예를 들어 틴델(Tyndale)'선악에 대한 경험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며,

모펫(Moffat)'종교에 있어서 생동력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영역 성경 중에서 이 구절을

'도덕적인 구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한다(NEB).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칼빈(Calvin)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선악을 구별하는 것을 동시에 인정한다.

이러한 해석은 메튜 헨리(Mattew Henry)같은 주석가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본문이 뜻하는 바는 칼빈의 첫번째 견해에 더 접근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은 유대인들이 단순히 선악간에 판단 한다기 보다는

율법의 선한 교훈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선한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그 선을 옳은 원리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에 따르는 선한 삶을 살지 않은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1:21)

이방인들의 어리석음과 동일하다.

 

 

 

[2: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을

부산 구문의 형식으로, 직역하면

‘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서'가 된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으로 이해하여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므로'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영역 성경 중에서도 이 구절을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because)를 사용하여 번역했다(NIV).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흐름상 적합하다고 본다.

 

한편 '지식''진리'는 특별한 의미상의 구별 없이

중복어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다(Black).

 

그리고 '규모'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포시스'

'모양'이나 '외모'를 뜻하지만 외적인 모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참된 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Barmby).

 

그래서 혹자는 '모르포시스'

'본질'(휘포스타시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Black).

 

간혹 학자들 중에는 '모르포시스'

유대인들의 '외식'과 같이 '과장된 외형'(Calvin)이나

'경건이 없는 겉 모양'(Matthew Henry)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성격상 적합하지 않다.

 

본문에서는 유대인이 율법을 통해 가진 지식이나 진리가

거짓되다든지 알맹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한 참된 지식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Murray, Barmby) 그 지식을 좇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행하는 것을 책망하는 데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 성경에서 소경과 어두움에 있는 자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서 헤매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42: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56:10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요일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여기서도 바울은 역시 중복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어두움에 있는 자들의 빛'이라는 표현은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사명을 시사한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자기의 등불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토라를 소유한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명마저도 자신들의 특권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고 말았다.

 

오늘날 성도들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라고 고백하면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빛 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자랑하려 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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