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목양가
시편 제 23편 1-6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제 23편은 구약성서 중의 진주이다.
신자로서 이 시가,
그 입에서 절로 흘러나오도록 되지 않는다면,
깊이 성서를 맛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편은 신약성서에 있어서의 '주의 기도(주기도)'와 함께,
신자가 언제나 마음에 새기어 암송해야 할 것이다.
제23편은, 그 모두에 말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이것은 전편의 주요한 제목이다.
성서를 배우는 비결은,
그 모두의 수어의 깊은 의미에 주의하는 일이다.
창세기 제1장 제1절에 구약의 전부가 포함되고
시편 제 1편 제1절에 시편전체의 서문(머리말)이 있고,
또 마태복음 제 1장 제 1절에 그리스도의 복음 모두가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생각을 가지고서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의 일구를 읽건대,
원어로는 불과 4자이지만,
각각 모두가 중요한 의미의 말임을 알 수 있다.
목자란 무언가?
예수도 자신을 목자에 비교했듯,
목자와 양과는 성서 중에 있어서 깊은 의의를 가진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목자였다.
사무엘 상 17장 이하에는,
그의 목자생활이 상세히 수록(기재)되어 있다.
그는 어떤 때,
그 사랑하는 양떼가 사자와 곰에게 습격당한 것을 되빼앗아 온 이야기도 있다.
사무엘 상 17장 이하에는 그의 목자생활이 상세히 수록(기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양을 키움의 고심(苦心)
기타,
이에 관한 전반의 사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한 때,
그 전생애의 실험이,
이 수어에 짜 넣어져 있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도
(전에는 여러분은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영혼의 목자'라는 말이 있다.
목자의 존귀함을 알기 위해서는 양의 미련함을 아는 것을 필요로 한다.
애당초 양을 사육하는 데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필요하다.
양은 집합적으로 동하고,
뇌동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한마리라도 떼를 떠나기만 하면,
전체가 곧 흩어진다.
지배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양 같은 것은 없다.
이것 목자의 고심거리인 것이다.
이와 같이 양에게 필요한 것은 선한 목자이다.
우리들 인생에 필요한 것은 선한 목자이다.
나라의 정치를 행하고,
지방을 다스리는데도 목민관을 필요로 한다.
선한 목민관이 있고,
없는 것은,
인민의 휴척(休戚)에 대관계가 있다.
하물며 영혼의 경에 있어서랴!
'내 영혼을
소생케 하시고,
주의 이름까닭에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이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들은 실로 선한 목자를 필요로 한다.
지금 세상의 목사는,
과연 오인의 소망을 채워 주는가?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오직 한 분의 목사가 있다.
여호와가 그 분이시다.
여호와 있기 까닭에 오인은 선한 목사 없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가령 나쁜 수다한 목사 있다 해도,
그 최종의 정상에는 여호와이신 대 목사 계시므로,
우리는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나'라 하고 ,
'내'라고 하고서,
'우리들' 혹은
'크리스천'이라고 쓰지 않음은,
주의해야 할 점이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독점하는 뜻이 아니다.
각자 스스로(혼자서 개별적으로)
특별하게 실험(체험)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각자에게 있어서,
특별히 실험(체험;
해득)
되어야 할 대 목사이심은,
이 다윗의 독자의 실험(경험)에 의해 명시되어 있다.
'나' 또는 '내'라고 하고서 단수로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힘이 있고,
소망이 있다.
일반적으로 한다면, 의미는 아주 박약해진다.
이것을 단수로서 말하여,
비로소 친구에 향해 말하는 것 같은 신뢰와 친밀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이다' '이시다'란,
히브리어, 그리스어에 있어서 중요한 문자이다.
특히 어투라든가, 의미를 강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정의 말이다.
이것 역시 깊이 음미해야할 것이다.
게다가, 제1절에 이르기를
'내게 부족한
일 없으리라'고,
정녕 여호와를 목사로서 모시면(앙망하면),
이미 아무런 결핍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결여하는 것이 많다.
감정이 섬세하므로 지식이 부족하고,
지식이 더해지면 신앙이 냉각해지고,
의지가 강하면 사랑을 결여한다.
이것 실로 인간의 약점이다.
하지만 여호와는 전부 이들을 구비하신다.
사랑과 지식과 감정과 의지 모두를 완전하게 소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우러러보면(모시면),
내 요구는 모두 채워지는 것이다.
'여호와는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고,
휴식의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푸른들(초장)은 우리들의 일상식물을 만드는 밭이다.
휴식의 물가(쉴만한 물가-한글역)는,
우리 생명의 물을 공급하며,
휴식을 주는 곳이다.
여호와는 내 식물인 동시에,
생명의 물이시다.
여호와를 믿는 자는 다른데서 휴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휴식을 산에 구하고,
바다로 찾아다니며,
여름에는 피서, 겨울에는 피한 않으면,
신경쇠약을 앓는다고 한다.
하지만 휴식은 산에 없고,
바다에 없다.
여호와께 의지하면, 휴식은 절로 되는 것이다.
서재에 있고 일터에 있으면서 십분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크리스천이 밖에서 휴식을 구하여 마지않는 것은,
의지할 바 휴식할 만한 참 목자가 없기 때문이다.
'내 영혼을
소생케 하시고,
자기
이름으로 하여
나를 바른
길(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소생케 하시고'는 부활이다.
시든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새로운 희망과 힘(능력)을 주시는 일이다.
그리고 이 부활한 영혼을 악마(마귀)의 손에 맡겨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쓰시고자 하여,
의(義)의 길로 인도 하시는 것이다.
단순히 구출하여, 신생명을 불어 넣어 주시는 것 뿐 아니라.
이것을 올바로 인도하여 쓰시는 것이다.
'가령 내가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라고 있다.
'죽음의 그늘의
골짜기'는 죽음에 임하여,
하나님 곁에 있음을 확인한 말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오인의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말이다.
히브리어에, 비슷한 두 말이 있다.
잘마웨트와 찰무트라는 것이다.
전자 잘마웨트는 '죽음의 그늘'을 의미하고,
후자 찰무트는 '어두컴컴한 장소'라는 뜻이다.
이 절은 후자의 뜻으로 해석함이 적절하다.
즉 팔레스틴(1권 299주 참조)의 어두운 골짜기 사이의 많은 평지에 있어서는,
사자 기타의 맹수가 그 속에 숨어,
종종 양을 습격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마치 어두운 골짜기 사이 가까이서 헤매는 양의 생애와 닮아 있다.
생각하지도 않던 곳에 가공할 유혹이 나타나고,
박해가 생겨나, 우리들을 괴롭힌다.
하지만 여호와께 의지하는 자는 그런 재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떠한 때도,
내 곁에 있어서 나를 지키시고,
모든 필요한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휴양을 주시고, 안위를 주신다.
읽으면서 여기를 이르면,
하나님은 그저 고맙기만 하시다.
정토진종(2권 208주 참조)이 말하는 미타(아미타불 2권 209주 참조)와 거의 다른 데가 없다.
하지만
성서의 특색은, 이 후에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단순한 휴식을 주실 뿐 아니라,
휴식 후에 곧 활동을 요구한다.
마가복음 제 9장에도 있는 대로,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신 때,
베드로는 예수, 엘리야,
모세위해 초막을 짓고,
고요히 깨끗한 생을 보낼 것을 말했다.
그런데 예수는 이것을 듣지 않으시고,
산을 내려와 거기서 기다리는 수다한 사람의 구원에 분만 하신 것은,
그리스도교가 활동적이며, 적극적인 좋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므로써,
그 중에 싸움이 있다.
이 세상과 싸움에 필요한 휴양이 이미 끝난 후에는
곧 나가서 의를 위해 싸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적과 싸우는데 있어서는,
여호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즉 '주의 막대기(회초리)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하신다.
막대기도 지팡이도, 적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위로 한다'란 돕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막대기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벌을 가하는 일이다.
사람이 잘못했을 때는 막대기를 써서 이것을 바로 잡는 것이다.
즉 제 4절은,
단순히 외부의 적을 막을 뿐 아니라,
만약 스스로 잘못에 빠졌다면,
하나님께서 막대기를 가하여,
벌을 내릴 필요가 있음을 말하신 것이다.
사랑 짙으면(진하면),
막대기(회초리)
더욱 더 심하다.
우리들은 심령의 적을 응징(징벌)할 때,
하나님의 막대기(회초리)의 고마움을 잘 알 수가 있다.
제 5절부터 아주 제목이 일전한다.
'주께서, 내
원수 앞에
나를 위해
자리를 베푸시고.
'라고.
인생은 싸움이다.
원수 앞에서 공개하면서 주어지는 양식(만나-2권 112p참조)이야 말로 참된 별식이다.
휴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향락 위해서가 아니라,
싸우기 위해서의 장려이다.
위안이다.
마음이 바쁜 중에,
여호와의 별식을 얻고,
곧 다음의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내 머리에는 기름이 부은바 되고,
내 잔은 차고 넘친다.
내 용기도 배가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발(걸음)은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최후로),
제 6절은 두개로 나뉜다.
먼저 '내가 세상에
있는 한은
반드시 은혜와
인자(긍휼)하심이 따르오리이다.
'라고.
이는 여호와께 의지하는 자에게 현세의 위안 풍족함을 노래한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영원토록
여호와의 전(집)에 거하오리이다'라고.
이는 여호와를 대망하는 자에게 내세의 희망 부동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갖가지의 고뇌 중에,
여호와의 은혜와 인자(긍휼)하심으로 위로되고,
이 세상을 떠나서는 영원토록 여호와의 곁에서 천국생활을 보낸다.
이는 크리스천의 특권이다.
여호와께 양육되고,
여호와께 부양되어,
모두 여호와로 말미암아 살고,
일하고, 드디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다.
크리스천의 의지는,
여호와, 여호와, 여호와이시다.
시편 제 23편은 다윗의 종교적 자각을 노래한 가장 아름다운 시이다.
이 편이 시편 중의 웅편(雄篇)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실로 당연하다.
* 내촌감삼의(1919년 6월 성서지연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