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과 구원
이사야서 1장 21-31절 : 신실하던 도시가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는가! 공의가 거기에 충만하고 의가 거기에 거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22)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즙은 물이 섞였도다.
23) 네 통치자들은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들의 무리이며 모두가 뇌물을 사랑하고 보상을 따라가며 아버지 없는 자들을 위해 재판하지 아니하고 과부의 사정이 자기들에게 이르지 못하게 하는도다.
24)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능하신 이가 말하노라. 아, 내가 내 대적들로부터 떠나 짐을 덜고 내 원수들에게 복수하리라.
25) 내가 또 내 손을 네게로 돌려 네 찌꺼기를 정결하게 제거하며 네 주석을 다 치워 버리고
26)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조언자들을 처음 시작하던 때와 같이 회복하리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도시 신실한 도시, 라 불리리라.
27) 시온은 공의로 구속을 받으며 시온의 회심하는 자들은 의로 구속을 받으리라.
28) 범죄자들과 죄인들은 함께 멸망하고 주를 버리는 자들도 소멸되리니
29) 너희가 원하던 상수리나무들로 말미암아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또한 너희가 택한 동산들로 인하여 너희가 당황하리니
30) 너희는 잎사귀가 시드는 상수리나무같이 되며 물 없는 동산같이 되리라.
31) 강한 자는 삼 부스러기같이 되고 그것을 만든 자는 불꽃같이 되어 그들이 둘 다 함께 탈 터이나 아무도 그들을 끄지 못하리라(한글 KJV).
1장 18, 19절에 있어서의 죄의 소멸의 복음의 선언으로
여호와께서 예언자(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하여 일으킨 대 소송은,
일단 종결을 고했다.
이스라엘은 심판되어, 정죄되고, 그리고 사죄의 약속에 접하여,
일단 천지의 대법정에서 방면되었다.
이것으로 심판이 끝난 것은 아니다. 심판의 경로가 계시된 것이다.
예언은 예언, 복음은 복음이다.
그리고 그 실행과 적용은 별개이다.
나라도, 사람도, 말로 심판되는 것은 아니다.
또 말로 구원되지 않는다.
‘시온은 정의로운 심판 따라 그 돌아온 자는 공의로 구속되리라
하지만 거역(패역)하는 자와 죄인은 동시에 패망되고 여호와를 버리는 자는
멸실되리라’(이사야 1:27-29일역)고 있음은 이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유다와 예루살렘은 어떠했는가 하면, 실로 가련한 상태에 있었다.
성읍은 창기로 되고, 공의는 없어져 살인이 그 안에 가득하다.
권원(방백)은 도적의 짝(한편)이 되고,
사람은 저마다 뇌물을 기뻐하며, 사례물을 구해마지않는 상태였다.
이름은 하나님 나라, 인의(仁義)의 백성인데, 실은 음란국, 수회(愁懷)의 백성이었다.
이에 대하여, 여호와의 노는 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로써 행해지는 죄악은, 사실로써 심판되지 않을 수 없다.
주는 말씀하신다.
‘아아 내가 내 원수에게 향하여 내 마음을 맑게(편케)하였고 내 대적에게 보수하리라
내가 또 내 손을 네 위에 더하여 온전히 네 찌끼를 씻어버리리라.
그리한 후에 너는 공의의 성읍 충실한 성(고을)이라 불리우리라’(1-24-26일역)
죄의 사유(사죄)의 복음 전파(선전)에 의해 눈같이, 양털같이 희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로써 여호와께 심판되어 공의의 성(고을), 충실한 성(고을)으로 불리기에 이른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그렇듯 그 백성을 취급하신다는 것을 듣고서,
그를 무자비하다고 하는 자는 누구인가?
무자비가 아니라, 그 정반대이다.
말에 의해서 회개한 백성은 어디 있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경고의 회초리(채찍:매)를 가하시지 않는다면,
자기 죄를 깨달아 그에게로 돌아온 자는 없다.
이는 인류의 실험(경험)이요,
또 우리들 각자의 실험(실지 체험)이다.
복음의 선전, 설교, 연설 등, 단순히 말의 산포에 의해 사람이 구원된 예(실례)는 없다.
복음이 전해지고, 이것을 증명함에 사실의 심판이 임하여,
나라도 백성도, 얼마쯤(조금) 눈을 뜨는 것이다.
특별히 2500년 전의 이사야의 유다와 예루살렘의 자취를 더듬을 것까지 없다.
다이쇼(대정-3권, 188주) 쇼와(소화-1926년 12월 25일 이후의 일본년호)의
일본과 도쿄(동경)에 있어서, 좋은 예증을 보는 것이다.
성읍(고을)은 기녀(妓女)로 되고,
살인은 그 안에 가득하며 사람마다 뇌물을 좋아 한대서
누가 오늘의 도쿄시(동경시-일본의 수도)를 생각하지 않을 자 있는가?
실로 실로 그대로가 아닌가?
상류 부인까지가 예기, 창기처럼 꾸미는 것 아닌가?
소학교의 교장이 되는 데마저, 시학관에게 증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신문지는 분명히 보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살인은 날마다의 사건으로 그 점에 있어서 일본의 도쿄는
미국의 뉴욕 또는 시카고에 흡사한 성(도시)으로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도쿄 전시(全市)가 유곽이요,
도적의 소굴이라고 하여 과언이 아닌 것 아닌가! 이다 만,
그렇듯 대담하게 말할 수 있는 예언자(선지자)가 없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복음의 선전(전파)만으로, 일본과 도쿄가 구원될 것이라고 누가 믿는가?
사실로써 하는 심판이 필요하지 않은가?
재계의 대동요가 필요하지 않은가?
파산자가 잇달아 생겨나고,
어제까지의 귀족은 오늘의 평민으로 되고,
어제까지의 부호는 오늘은, 사회의 동정을 애걸하기에 이를 필요는 없는가?
실로
‘시온은 정의로운 심판 따라 그 돌아온 자는 공의로써 구속되리라’(일역)이다.
지금 일본인이 얼마쯤 진지하게 하나님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에 이른 것은,
소수의 전도자의 말이, 그들을 움직였기 때문이 아니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판이,
근년에 이르러, 빈번하게 그들 위에 임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다만 일본인에게 한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다.
미국 같은 곳이, 가장 잘 예언자(선지자)의 말에 적중하는 나라이다.
‘어찌하여 충실한 나라는 창기로 되었으랴 옛날은 정의로운 심판으로 가득하고,
공의가 그 가운데 거하더니, 지금은 사람을 죽이는 자로 되었도다’(1:21 일역)고 있는 때,
이사야는 특별히 오늘날의 미국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나 아닌가고 생각된다.
우리들 퓨리탄 사상(내촌 2권 34주) 왕성시대의 미국을 아는 자는,
오늘의 미국을 보고, 실로 금석(今夕)의 감에 견딜 수 없다.
오늘의 미국이 그리스도교국 이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미국은 훨씬 일본 이상, 심판으로써 구속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심판은 심판위한 심판은 아니다.
거룩하게(깨끗이)하기 위한 심판이다.
하나님은 허다한 환난을 내려,
나라와 백성을 다시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있다.
‘공의로서 구속된다’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있어서도, 잇달아 오는 재난이, 얼마쯤 주효하여,
여호와의 이름이 그 백성 사이에 오르고 있음(찬양됨)은, 감사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 노하심은 다만 잠시요 그 은혜는 생명과 함께 길도다.
밤은 종야(終夜) 울며 슬퍼 한 대도 아침에는 기뻐하고 노래하리라’(시편 30:5 일역)
고 있음은 이것이다.
*내촌감삼의(1928년 3월 ‘성서지연구’)를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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