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신앙
히브리서 11장 1-19절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개역개정 한글)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신앙에 의한다. 행위에 의하지 않는다.
그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은 신뢰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서 하나님께 신뢰하고,
의심치 않고서 그 은혜에 참여하는 일이다.
하지만, 신앙의 의미는 신뢰로서 다그치지 않는다.
신앙은 또 확신이다. 내인(인내 patience)이다.
바울은 주로 신뢰의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다른 기자에 의해,
신뢰 이외의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이 주창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에 의해 주창된 신앙은,
바울이 말한 그것과는 조금 뜻을 달리한다.
그는 말했다.
‘대저 신앙은 바라는 바를 의심치 않고,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을 진실로 하는 것이다’(1일역)라고.
이는 퍽 난해의 일절이다.
‘의심치 않는다’고 있는 것은 ‘기초로 한다’로도 역할 수가 있다.
‘진실로 한다’고 있음은 ‘증거’의 뜻이다.
그러므로 밥티스트(침례) 교회역의 신약성서 따라,
‘대저 신앙은 바라는 바의 것의 기초이고, 아직 보지 못한 것의 증거이다’라고 역할 수가 있다.
만약 오늘의 말로서 한다면,
‘신앙은 희망의 기초, 영계의 확인’이라고 간약해도 지장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역한대서, 히브리서 기자가 일컫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할 수는 없다. 제11장 전체가 이 일절의 주석인 것이다.
‘옛 사람 이(믿음)에 의해 미칭을 얻었다’(2일역)
‘옛 사람’ 고로(노인)의 뜻이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가리켜 말한다. 열조라고 하는 말과 같다.
‘미칭을 얻었다’고 있음은, 제4절에 있어서와 같이
‘증거(증명) 되었다’고 역해야 할 것이다.
의자(義者)로서 증거(증명) 되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6절에
‘아브라함, 하나님을 믿어, 그 신앙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었다’(일역)고 있음은 이것이다.
의자로서 인정된 것이다, 의자임의 미칭을 얻었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
그러나 ‘미칭’은 승인의 결과이다. 승인(증명) 그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열조(선조)가 하나님께 그 의를 인정받는 것은 그들의 신앙에 의해서인 것이다.
무용(武勇)에 의해서가 아니다, 재지(才智)에 의해서가 아니다,
기타의 위훈,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다, 신앙에 의해서이다.
이스라엘은 신앙으로서 위대한 국민이다.
이스라엘에서 그 신앙을 제할 때,
그들은 취할 것 못되는 국민이다.
이스라엘의 공적을 칭양하고자 하면 그 신앙을 칭양하는 외에 길은 없다.
이스라엘은 인류에게 신앙의 대가(authority)를 제공하여,
지금도 그 정신적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에 의해, 온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은바 되고, 그렇듯 보이는 바의 것은 볼 수 있는 것에 의해 지은 바 되지 않음을 안다’(3일역)
‘온 세계’ 우주만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어졌다’ 창세기 1장,
시편33:6, 9. 베드로후서 3:5등 참조.
‘말씀’은 언어에 한하지 않는다.
모든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말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속에 무한하게 보유하신 힘(능력)을 밖으로 나타내시어,
천지와 그 중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보이는 바의 것’, ‘보이지 않는 바의 것’
철학의 말로서 한다면, 현상(phenomenon)과 실체(noumenon)이다.
우주만물은 실체가 밖에 나타난 것으로서,
현상의 위에, 혹은 그 속에, 감관으로서는 느낄 수 없는 바의 실체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 철학이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비철학적이었던 이스라엘인은, 현상실체라 하지 않고서,
보이는 바의 것, 보이지 않는 바의 것이라고 했다.
보이는 바의 것은 ‘온 세계’였다.
바울의 이른 바 ‘수조물’(피조물)이었다.
눈으로서 보고, 손으로서 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바’의 것이 있다.
그것은 즉 하나님이었다. 영이었다. 생명이었다.
영의 세계인 내세였다. 바울은 이자를 대조하여 말했다.
‘대저 보이는 것은 잠시이고, 보이지 않는 바의 것은 무궁하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4:18일역)라고.
보이는 바의 것은 보이는 바의 것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바의 것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이 신앙에 의해 아는 일이다.
우리들은 그 일에 관하여 증명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안다.
우리들은 사람의 개인성이란, 보이는 그의 육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의 영에 있어서임을 안다.
보이는 만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이 학자의 증명을 기다리지 않고서 믿는 바이다.
그런데서,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에 한정된 능력이 아니라,
인류통유의 본능성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신앙의 미를 칭양하고,
특히 이스라엘인의 특성을 칭양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통유의 본능성인 신앙의 미에 대하여 말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제1절에서,
‘신앙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명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류전체의 인정하는 바라고,
그는 제3절에 있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 혹은 말하리라.
옛 사람은 그렇게 믿었을 것이나 지금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지금의 사람은 물질의 원인을 물질 이외에 있어서 구하지 않는다,
물질은 물질존재의 가장 확실한 증명이라고.
하지만 대철학자는 오늘이라 해도 그렇게는 믿지 않는 것이다.
칸트(→7권 141)를 비롯하여 스펜서(2권 72)에 이르기까지
물질의 궁극적 원인은 이것을 물질 이상의 힘에 있어서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은 신이라 하고, 혹은 제1원인이라 하나,
그것이 물질 이상적인 점에 있어서는 틀림없다.
혹은 원자(atom)라 하고, 혹은 전자(electron)이라 하나,
그 보이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근세의 가장 진보된 학설에 의해도, 1900년 전의 옛날,
히브리서의 기자에 의해 제출된
‘그렇게 보이는 바의 것은, 볼 수 있는 것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기자는 제1로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했다.
이르기를,
‘신앙은 희망의 기초, 보이지 않는 것의 증명’이라고.
그는 제2로, 신앙이야말로,
이스라엘국 건국의 정신임을 말했다.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고로(열조)는, 신앙에 의해 의자로서 증명되었다’고.
그는 제3으로, 신앙이야말로,
인류의 통유성임을 말했다.
이르기를,
‘우리들(이스라엘인에 한하지 않고, 그리스인도, 에집트인도 인류 전체는), 신앙에 의해,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지은 바 되었다…’고.
그리하여 그는 신앙개론을 진솔하여 마쳤다.
그는 이제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신앙의 실례 및 그 제 방면에 대하여 말하려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인의 신앙사에 있어서 많은 신앙적 영웅이 있었다.
아벨이 있었다. 에녹이 있었다. 노아가 있었다.
아브라함이 있었다. 이삭이 있었다. 야곱이 있었다.
요셉이 있었다. 모세가 있었다. 여호수아가 있었다.
기드온이 있었다. 삼손이 있었다. 사무엘이 있었다. 다윗이 있었다. 아모스가 있었다. 호세아가 있었다. 이사야가 있었다. 예레미야가 있었다.
에스겔이 있었다. 다니엘이 있었다. 기타 매거 하기에 겨를이 없다.
실로 신앙적 영웅의 성라(성군)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신앙을 그 모든 방면에 있어서 대표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장식한다.
인류의 신앙 역사로서 이스라엘의 그것 같이 풍부한 것은 없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가장 균제적(균형적)으로 아브라함에 있어서 나타났다.
아브라함은 가장 원만한 신앙가이다.
그러므로 그를 칭하여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로마서 4:11일역)라고 한다.
그는 즉 모범적 신자이다.
그리고 그 보다 전에 세 신앙적 위인이 있었다.
아벨, 에녹, 노아, 이들이다.
그들 3인은 신앙의 3방면을 대표하고,
각자 그 방면에 있어서 우수했다.
아벨은 그 승(우승)한 제물로서,
에녹은 그 평정한 신앙적 생애로서,
노아는 그 신앙적 파단으로서,
잘 신앙의 세 방면을 대표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 이르러 이들 세 방면은 그 한 사람에 있어서 나타난 것이다.
마치 천연물의 진화에 있어서, 다른 능력은 다른 생물에 있어서 발달하여,
마침내 우수한 생물에 있어서,
모든 능력이 동시에 또는 잇달아(연달아)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하여 배움에 있어서,
우리들은 아벨, 에녹, 노아 세 사람 각자의 신앙에 대하여 배움의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침례 요한이 있어서 그의 선구로 된 것 같이,
아브라함에게 3인의 선구 있어서, 그 위해 신앙의 길을 예비한 것이다.
만약 연대에서 말하면, 아벨이 제1이고, 그 다음이 에녹, 나중이 노아이다.
하지만, 만약 신앙의 성질에서 말한다면,
노아의 신앙이 가장 단순하고, 에녹의 신앙이 이에 다음가고,
아벨의 신앙이 최후, 즉 최상에 위치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또 같은 일을 천연계에서 보는 것이다.
천연계에 있어서도, 최초에 나타난 것은 최하등의 것은 아니다.
이른 바 유형은 비교적 상등식물 또는 동물로서 나타나고,
이에 이어서 열등의 것이 나타나고, 그런 후에 다시 진화의 정도를 진전하는 것이다.
이같이 신앙발달의 순서도 또 진화의 상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성서 기자는 오늘의 이른 바 진화론자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충실하게 사실 그대로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 기사는 절로 천연적이었다.
성서와 과학과의 친밀한 관계는 이 부근에서 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이 그러하매,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하여 배우고자 하는데 있어서,
노아를 먼저하고 에녹과 아벨을 뒤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제7절을 먼저하고, 4절 이하 6절까지를 뒤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 있어서는, 신앙은 최초에 그 가장 단순한 상태,
즉 노아로서 나타나 상태에 있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앙에 의해,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의 계시를 받고, 조심하여, 그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방주를 마련했다. 이것으로 세상 사람의 죄를 정하고, 또 신앙에 의한 의를 받을 사자(상속인)로 되었다. ’(7일역)
‘아직 보지 못한 일’ 보이지 않는 일이다.
미래에 올 하나님의 재판이다.
노아의 경우에 있어서는 홍수이다.
‘계시를 받았다’ 묵시를 받은 일이다.
신언(神言) 그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노아에게 신앙 있으매, 묵시는 그에게 임한 것이다.
혹은 또,
그에게 만약 신앙 없었다면 그는 그에게 임한 묵시를 해득치 못했으리라.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묵시를 부르는 것이고 동시에 또 묵시를 해득하는 것이다.
‘조심하여’ 경외심으로 움직인바 되었다는 뜻이다.
그에게 신앙 있었기 때문에 이 마음(생각)이 생긴 것이다.
그의 주위의 사람들은,
그에게 묵시가 임한 것을 듣고서 조소로서 그를 대했다(베드로전서 3:20 참조).
‘그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애정에 끌려, 자기 가족만을 구하려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성의에 따라, 성예(성가족)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이다.
그의 가족에 의해, 멸망된 세계 중에 거룩한 새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보통의 경우에 있어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먼저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하려는 것은, 지정이라고는 하나,
저속한(낮은) 자아(이기)의 마음이다.
가족은 이것을 하나님 위해, 또 인류 위해 구원해야 할 것이다.
‘배를 마련하였다’ 상자 배(방주 ark)를 준비했다는 뜻이다.
불신의 사람들이 그를 조소했다, 비방하고 있는 동안에,
구원의 기관을 예비했다는 것이다.
노아는 그 동안에, 심히 그의 신앙을 시험받았으리라(마태복음 24:38 참조).
‘이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의 죄를 정하고…’
홍수가 올 때까지는,
세상 사람들은 지자(知者)이고, 노아 혼자 광인(狂人)이었다.
저 방대한 방주(ark) 이것 무엇 위해서 인가고 그들은 비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홍수에 의해, 의자로서 증거 되고, 세상 사람은 그 죄 확정되었던 것이다.
홍수에 의해, 노아의 신앙은 사실로 되어 나타난 것이다.
노아의 경우에 있어서 도 또 ‘신앙은 희망이 기초, 아직 보지 못한 것의 증명’이었다.
홍수가 임하기까지, 노아는 다만 신앙으로서
그의 희망을 유지하며, 신앙을 가지고서 미래에 대비했다.
국인 모두가 평안을 즐기며 안일에 잠기고 있는 동안에,
그 한 사람(물론 그의 가족과 함께) 신앙을 가지고서,
실로 임하려한 대이변에 대비했다.
‘신앙으로 받는 의…’
노아는 본래 의인이었다(창세기 6:9 참조).
그는 정의의 선전자였다(베드로후서 2:5).
그런데 대홍수에 처하여 그가 단행한 신앙적 행위에 의해,
그는 다시 ‘신앙에 의한 의’를 받는 자로 된 것이다.
‘신앙에 의한 의’
신앙에 합한 의. 신앙의 결과로서 자신에 느끼는 정의의 자각이다.
바울의 이른 바 ‘신앙의 의’란 조금 뜻(취의)을 달리한다.
전자는 의의 자각인데 대하여 후자는 의의 은사이다.
이자 물론 한 가지로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사임에 틀림없지만도,
이것을 자기가 획득한 획득물로서 느끼는 것과,
하나님에게서 주신 은사로서 느끼는 것과,
그 사이에 명백한 차위가 있다.
신앙에 의한 의는 신앙적 생애의 초기에 있어서 느끼는 것이고,
‘신앙의 의’는 그 걸음을 더 나아가게 한 후에 실험하는 것이다.
‘받을 후사(상속자)로 되었다’
용어(쓸데없는 말 redundant word)이다.
단지 ‘받는 자로 되었다’고 역할 것이다.
신앙을 실행하여, 그 결과인 정의를 감득하는 자로 되었다는 뜻이다.
노아는 확실히 신앙적 위인이다.
하지만, 그의 신앙은 홍수의 감퇴와 동시에 쇠해졌다.
홍수 이후의 노아의 생애는 실로 가련한 것이었다.
사실(기록)은 창세기 6장 20절 이하에 자세하다.
노아의 신앙은 일시적이었다.
그는 바락, 기드온, 삼손 등과 흡사하여,
어떤 특별한 경우에 임해서만 위대했다.
마치 용사가 강적을 만나 그 용기 전부를 쏟음 같다.
그의 일생의 공적은 홍수내습의 때에 이룩된 것이다.
홍수이전의 노아의 신앙에 불만한 것 없다.
이후의 그는 타락의 그분이다.
하지만 홍수 당시의 그의 공적은 영원히 덮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 때에 있어서의 그의 용감적 행위에 의해 그의 이름은 영구히 썩지 않을 것으로 되었다.
세상의 조소의 면전에 서서 홀로 하나님의 정의를 가지고 선 일,
사람의 비방에 처하여 그의 신앙을 굽히지 않은 일,
세상은 일제히 하나님께 거역하고 섰는데,
그 혼자서 하나님과 함께 선 일…
인류의 신앙 사상에 있어서의 노아의 행적은 위대하다.
용감하다. 사람은 누구이건, 그 일생 동안에 한번은 노아 따라,
홀로 정의를 가지고 서서, 세론에 항거하고,
전국을 상대로 신앙의 선전을 싸울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도 또한 이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인 그는,
그의 신앙의 생애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노아의 신앙으로서 시작했던 것이다.
용행, 과단, 정실의 배척, 이 세상과의 절연,
하나님을 친구로서 가지기 위해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가짐의 각오,
하나님의 명 따라, 이웃의 비방을 무릅쓰고,
단연 구고를 떠나서 사막의 저편에 새 홈(home)을 구한 일 …
아브라함은 신앙의 생애의 출발에 있어서, 노아에 따라, 구를 버리고 새 것에 임한 것이다.
‘신앙에 의해, 아브라함은, 그 상속받을 땅으로 가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 가는 곳을 모르고서 떠났다’(8일역)
사실(기록)은 창세기 제12장에 자세하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로서, 그 아내 사라, 그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 땅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향했다고 있다.
그는 그 때 갈 곳을 지시받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명을 믿어,
일가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이향을 향해 여로에 오른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신앙이다.
다만 ‘가라’는 명이었다. 이 부패의 땅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은 지시되지 않았다.
여호와의 말씀에 이것을 증명할 빙거(evidence)는 없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의심치 않고서 이것을 믿었던 것이다.
믿을 이유 없는데 믿었으므로 미신이라고 하면 그대로이다.
하지만, 신앙과 미신은 외부에서 이것을 구별할 수는 없다.
신앙은 사람에 따라서는 미신같이 보인다.
신앙은 확실히 일종의 모험이다.
이에 따라서, 혹은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는 자는 신앙이 미신 아닌 것을 안다.
신앙은 마음에 울려오는 하나님의 소리(음성)에 대한 신자의 응락이다.
그는 형체를 본 것 아니다. 또 증명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믿는 것이다.
옳다, 믿도록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앙 그것이 보이지 않는 바의 것의 증거로 되는 것이다.
그는 말하는 것이다. 내게 신앙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에 응함의 실물 없을 수 없다고.
실물로서 신앙을 증명할 수는 없다. 신앙으로서 실물은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다.
이 힘없이, 신앙은 이것을 신앙이라 칭하기에 족하지 못한다.
실로, ‘신앙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의 증거’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신앙 있는 곳에는 반드시 희망이 있는 것이다.
희망은, 신앙에 응하는 사물의 실현을 가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희망은 신앙의 자매라고.
또 말한다,
‘신앙은 바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을 바꾸어 하면, ‘신앙은 희망의 기초이다’라고.
아브라함은 그가 속한 옛 부패한 사회를 탈출하라는 여호와의 명을 받고,
여기서 큰 희망을 가지고서, 행선의 목적 없으나,
단연 뜻을 결하여 하란의 토지를 떠났던 것이다.
그의 구고는 그에게 향하여 말했으리라,
너 떠나 어디로 가려는가?
달할 목적 없이 고향을 떠나는 것은 모험의 극(극도)아니랴?
먼저 갈 곳을 정하고, 그런 후에 떠나라.
네가 일컫는 여호와의 명이란 네 자신의 망상이 아니랴?고.
아브라함은 이에 대답하여 말했으리라,
나는 믿는다. 여호와의 말씀이 확실하게 내 마음에 임한 것을.
나는 너희에게 제공하는데 증거로써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신앙 그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나는 너희의 조소를 개의치 않는다.
나는 이미 너희의 불신부패의 사회에 견딜 수 없다.
나는 지금부터 새로운 향토를 구하고,
거기서 새로운 마음으로서 내 여호와 하나님께 쓰이고자 한다. 고.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는, 노아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신앙은 과단이었다. 용감적 행위였다.
그리고 오늘이라 해도 신앙에 이 행위가 없어서는 안 된다.
신앙은 신뢰라고 하여, 다만 의뢰할 줄만 알고,
결단하고 행할 줄을 모르는 자는, 아직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이다.
아브라함에게 강한 신뢰의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생애의 출발에 있어서 신앙을 그 가장 단순한 의미에 있어서 실행했다.
신앙에도 또 그 초보와 오의가 있다.
그리고 많은 신자는 신앙의 초보를 배우지 않고서 곧 그 오의에 달하려 한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완전했음은, 그가 신앙의 초보에 있어서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맹, 과단, 확신의 실행. 종교는 도덕이 아니라고 하여
보통도덕마저 실행할 수 없는 자는, 도저히 종교를 알 수는 없다.
신앙의 일면은 용행이다. 과단이다.
사람의 정실을 물리치고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일이다.
노아의 신앙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또 노아에 배워,
신앙을 이 방면에 있어서 발휘했다.
그도 또한 바울과 한 가지로, 하나님의 성소(聖召)를 입어,
혈육과 꾀(도모)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 처음 그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르 나와,
뒤에 또 아버지와 이별하고 하란 땅을 떠났다.
신앙의 발단은 탈충이다.
먼저 이 세상과 끊지 않고서는, 신앙은 시작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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