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표현
갈라디아서 6장 1-5절 :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갈라디아서의 주요문제는 율법과 복음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할례와 무할례이다.
바울의 주장은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에 의한다.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받을 것 못 된다는 것이었다.
일견하여 아무리해도 무익한 종교론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깊은 도덕상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목적은 하나님 앞에 의(義)됨에 있다.
인간에 대하여 말한다면 완전한 사람이 되는데 있다.
그리고 율법은 사람을 완전케 하는 길이 아니라
복음이야 말로 그 길이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었다.
바울은 모범적 유대인으로서 결코 몽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건전한 실제가였다.
그가 높은 이성을 말한 것은 완전한 행위를 낳기 위해서였다.
이같이 하여 갈라디아서도 로마서 같이
고원한 실제도덕의 제창으로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5장 5절 6절에 있어서 그는 교의를 버리고 도덕으로 옮겼다.
먼저 첫째로 교의,
그런 후에 교의의 결과인 도덕,
바울의 논법은 언제나 이 순서에 의한다.
[우리들은
영에 의해
신앙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는
희망이 채워지는
때를 기다린다.
대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는 할례를
받아도 유익
없고 받지
않아도 유익
없고
다만 사랑에
의해 일하는
바의 신앙만
유익하다]
여기에 바울 도덕의 모두가 명기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첫째로 신앙,
그 보수로서 영을 주시고 영은 의의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영이 신자 속에 있어서 의를 행하시는 까닭에
신자는 의의 나타나심을 대망한다.
그는 영의 그릇으로 화한 것으로서
스스로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자기로서 의를 행하시는 때를 대망한다고 한다.
실로 길이 빙 돌아 먼 길이지만 그래도 겸손하고 확실한 길이다.
그리고 영은 신자가 기다릴 것도 없이 그를 가지고서 곧 완전한 의를 행하시는 것이다.
직접 도덕이 아니라 간접 도덕이라고 하면
완만하고 미적지근한 도덕처럼 들리나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아주 민활한 아주 열렬한 도덕이다.
율법 옳은지 복음 옳은지,
최후의 결정은 그 결과에 의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는
할례도 무익 할례 없음도 무익,
다만 사랑으로서 일하는 바의 신앙만 유익하다고 한다.
테스트는 여기에 있다.
다만 신앙만은 아니다.
사랑으로서 일하는 바의 신앙,
이 신앙이 일하는 곳에 진리는 있다.
하나님은 계시다.
율법으로서 만약 이 치하할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인가?
율법 가하다.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임의 증명도 이것을 제외하고 달리 구할 바 아니다.
인생최후의 문제는 역시 실제문제이다.
나무는 그 열매의 의해 안다.
사랑으로서 일하는 바의 신앙을 맺는 나무는 선한 나무이다.
결실 않는 나무는 나쁜 나무이다.
나는 내 반대론자와 이 점을 가지고서 싸우련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최대의 변론가는 여기서 실제도덕의 주장자로 화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에 그 실례를 들고 있는 것이다.
6장 1절에서 5절까지가 그것이다.
[형제여
만약 이외에도
범죄한 자가
드러나면(만약 범과에
몰리는 사람이
있으면),
영의 감화
아래 있는
너희들은 유화한
마음으로서 그런
사람을 되찾으라.
각각 자기를
살펴보라. 자신도 또한
유혹되는 일
있으리라.
서로의 짐을
지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율법을 이루라.
사람이 만약
아무것도 아닌데
스스로 무엇이
난 것처럼
하면 이는
자기를 속이는
일이다.]
여기에 사랑으로서 일하는 바의 신앙의 실례가 있다.
참된 신앙이란 이러한 것,
참 사랑이란 이러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형제가 죄에 빠져 있는 경우,
혹은 죄에 쫓겨 그 잡힌 바로 되는 경우,
너희 성령을 받아 그 지배하에 있는 자는 유화한 마음으로서
그러한 자를 사랑하고 그 회복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의 책임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죄를 자기 죄로 하여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유화한 마음으로서 그의 죄를 책하지 말고서
자기가 자기 죄를 처분하는 마음으로서
그를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자기 죄로 여기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노를 자기 몸에 받으셨다.
우리들도 또한 그리스도의 이 마음으로서
서로의 죄를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과 달리
형제를 사랑하고 그 죄의 책임을 나누어 가지고 하나님께 쓰이는 길이다.
타인의 죄의 책임을 나누어 가지는 일 같은 것은
이는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자 있는가?
이러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라.
사람 만약 가치 없는데 스스로 가치 있다고 하면
이는 자기를 속이는 일이다.
너희 각각,
자기 행위를 살펴보라.
그리하면 자기가 무가치함을 알 것이다.
가령 하나 둘의 자랑해야 할 행위 있음을 본대도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특별히 타인보다 낫고 그들에 비하여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각각의 죄의 중하를 진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에게 동정해야 할 것이다.
[무릇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은 너희도
그 같이
하라]고
주께서 명하신 것 같이 우리들 각자
자기의 중하(重荷)를 사람에게 나누어 가졌으면 하듯
자기도 또한 남의 죄의 중하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제4절 제5절 난구이다.
나는 정확한 해석을 주었는지 아닌지를 모른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고자 한 바의 요점은 명확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창도이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특별한 사랑이다.
자기가 타인에 대신하여 고난당하는 사랑이다.
[그리스도,
이미 우리
위해 저주
받은 자로
되어
우리들을 속량하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떠나게 하셨다](3:13)고 있음은 이것이다.
자기는 청정한 몸으로서 타인의 죄에 힘 되어 주지 않고
그 죄를 책망하고 책임을 나누지 않고서 죄인을 구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냉담한 무책임한 방법으로서 우리를 속량하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 위해 저주 받으셨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죄로서 받아 달갑게 나무에 달리셨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셨다.
그리스도 신자 된 자는 이 특수한 사랑을 나타내는 자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외아들의 제공,
사람에게 있어서는 신앙의 복종,
그리고 신앙에 응하는 성령의 은사,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현 그리스도교의 대의는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말한 것이 갈라디아서이다.
*내촌감삼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발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