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해설
본권은 저자(내촌감삼)의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및 갈라디아서에 관한 주해를 모은 것으로
고린도 전서에 관한 것 25편,
고린도후서에 관한 것6편,
갈라디아서에 관한 것 8편,
계 39편 및 [갈라디아서의 정신]으로 되어 있다.
이들 제편은 1901년 7월,
1928년 11월까지의 28년간에 저자 주필의
[세이 쇼노 겡뀨우 성서지연구]지상에 발표된 것이다.
(다만 이중 2편은 [세이 쇼노 겡뀨우.
. ]가 약 10개월간에 걸쳐
[싱기 보우]로 개제되어 있던 기간 중에 속한다).
이 중 [혼인의 의의]
[바울의 부활론(1)]의 2편 및
[갈라디아서의 정신]은 각각 후에 동명의 서적으로 간행되었다.
저자는 사도 바울의 제자였다.
성서 인물 중에서 가장 강하고 깊은 감화와 영향을 저자에게 준 이는
바울이었다(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별도로 한다).
이 점에서 모세도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멀리 미치지 못하였다.
저자의 신앙은 모두 바울의 신앙이었다.
저자의 그리스도교는 바울의 그리스도교였다.
아마도 저자의 사람됨까지도 극히 바울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저자는 바울이 낳은 최대의 제자의 일인이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another
Paul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앙과 사람을 가장 잘 말하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는 저자 특애의 서였는데
특히 바울이 구체적인 문제에 관련하여 단적으로 또는 전투적으로
그의 신앙을 토로하는 고린도서와 갈라디아서와는 저자에게 있어서는
그대로 저자 자신의 책이었다.
그러므로 본권의 모두에게
[바울의 신앙은 나의 신앙이다.
나는 여기서 바울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본권의 저자는 자기 자신의 신앙을 말하는 사람의
확신과 투철과 용기와 자기의 은사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의
친애의 정과 기쁨에 넘치는 것이다.
이 3서간이 바울을 알기 위한 최량의 자료이듯
본권은 가장 잘 저자의 신앙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시험 삼아 독자가 고린도전서 제1-3장의 주해인
[바울의 신앙](1면)에서 [만물의 소유자]까지의 수십 면을 정독한다면
바울의 신앙의 정수가 바울의 말 그대로
정기와 박력으로 넘쳐 철저하게 당당히 전개되어
유례 드문 그리스도교가 말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리라.
바울의 신앙,
즉 저자의 신앙이란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세워져 우리들의 지혜가 되시고 의와 성과 속량이 되셨다]는 것으로 전부이다.
이 복음을 믿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개죽음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
율법,
도덕 등을 일체 구원의 조건으로 하지 않는 일이다.
또 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력하게 하지 않기 위해
침례를 행하지 않을 뿐더러 일체 쓰지 않는 일이다.
이 때문에 십자가의 그리스도 이외는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바울의 신앙으로 살고 또 그것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저자가 교회에 속하지 않고 또 교회를 만들지 않은 것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사는 것 이외에 크리스천의 사는 길을 알지 못하고
또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서
성결한 하나님의 교회 그것을 부정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또 저자가 좀처럼 침례를 주지 않은 것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영으로 씻음 받아 성결해지는 이외에
영을 거룩하게 하는 길을 알지 못하고 또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서
아름다운 침례 그것을 부정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34).
저자는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만을 전하기 위해
다만 교회를 만들지 않고 침례를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혜라든가 지식을 이용하고 수단 및 방법에 의뢰하는 일을 일체 물리쳤다.
그는 신학,
교의,
철학,
사상,
혹은 폐창운동,
사회개혁운동,
평화운동 등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플러스하여 말하는 것 같은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전도의 방책을 강구하고 수단을 써서
효과를 추구하는 일 같은 것은 결코 하지 않았다.
저자는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는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이용하고 또 무엇인가에 의뢰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이상한(것으로 보이는)
그리스도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신앙,
십자가 신앙,
혹은 그리스도교,
십자가교라고 부르는 이외에 불러야 할 이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종생,
자기의 신앙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저자의 일요집회는 [도쿄 세이쇼고우엥카이-동경성서강연회]
또는
[우찌무라칸조우세이쇼겡규우카이 -내촌감삼 성서연구회]였고
저자의 전도기관지는 [내촌감삼 주필,성서지연구]였다.
저자 자신 때로 자기의 그리스도교는 십자가교이다.
무교회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는데
그러나 그 이름을 선전하거나 공식으로 쓰거나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저자의 만년에 제자 중에서 [무교회주의]를 고창하는 자가 나타나
고린도 교회에 일(작용)했던 신앙속화의 법칙이
저자의 주의에도 침윤하여 급속하게 타락의 징후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의 신앙에 만족하지 않은 자들의 사이에
지혜라든가 지식이 중시되어 파벌정신이 생겨나고
[무교회주의]로 으쓱대는 자가 속출하여
고린도교회의 경우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위태롭게 되자,
그는 단호히 그들을 방축하고 감연히
[나는 오늘 유행은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그리고 죽어갔던 것이다.
실로 본권에 말해져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의 신앙,
자유와 독립의 신앙에서
이른 바 [무교회주의]라든가 [무침례주의]
등이 생겨날리는 없다.
이 세상의 교회에 속하지 않았던 저자가
이 세상의 [무교회주의]
등에 속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저자가 만약 본권의 신앙으로 성실하게 살아간 것이라면
그리고 무엇을 의심할 수 있대도 저자의 이 성실만은 의심할 수 없다.
저자가 오늘 세계적으로 극구 칭양되는 [무교회주의의 시조]로 되어
[무교회주의]로 자랑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이다.
저자는 본권에 의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기가 말해 낸 [무교회주의]
마저 모른다고 할 정도로
바울의 복음에 산바 명예 한 없는 성서의 사람,
십자가의 사도,
그리스도의 종인 것을 스스로 웅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제4장 이하의
제 문제인 순결,
소송,
우상,
사랑,
부활 등에 대해서는 저자는
바울의 말하는 바를 거의 그대로 말하고 있다(다만 영의 은사,
방언 등에 대해서는 저자의 해결은 극히 실제적이고(예컨대 소송문제의 경우같이),
또 동양적이고 일본적이다(예컨대 혼인문제의 경우처럼).
그리고 언제 어떠한 경우에도
복음 신앙이 근저이고 중심이며,
전부이고,
동시에 극히 견실하다.
제15장의 부활론에 대해서는
[부활의 희망] 이하의 세편에 의해 상세하게 철저하게 주해되는데
다시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의해 재림 신앙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확증된다.
부활 문제가 저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대한 문제였던가가 이해된다.
또 [고린도전서 제1장 1-3절]은 [습주록.
]인 주해 문집 중의 일편이다.
문중의 [날마다 생애]란 [세이쇼노 겡규우.
] 지의 권두의 저자의 영문에 저자 자신이 붙인 역문이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인병(인품)을 가장 잘 전해주는 서간이라고 하는데
이 글을 주해하는 저자의 제편도 저자의 인병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의 활살력 [불행의 전용]에 이르는 6편은 독자에게 저자는 어쩌면 역설법에 의해 사람의 의표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감을 주는 것들뿐이다.
그러나 이들 각 편을 숙독하면 그것은 전혀 피상적인 오해인 것으로서
저자가 바울의 전한 바를 깊은 신앙과 고요한 사색과 인생의 실험에 기초하여
충실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들 제 편은 저자 독특의 주해로서
읽는 자에게 무한한 위로와 격려와 희망을 주어마지않는다.
갈라디아서는 저자의 성서였다.
저자는 루터와 함께 갈라디아서를 [내 글(책)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바울의 그리스도교가 갈라디아서로 결정되고
루터의 프로테스탄트가 갈라디아서에 의해 생긴 것처럼
저자의 그리스도교도 갈라디아서 그것이었다.
저자는 갈라디아서를 자유의 서로 보았다.
자유의 전도,
자유의 복음,
자유의 생애의 세 가지 자유를 부르짖는
갈라디아서[갈라디아서의 정신]
저자의 신앙과 전도와 생애와 사업과의 의거하여 선 기반이었고
싸움의 기치였고 승리의 관이었다.
갈라디아서 없이는 저자의 저 자유와 독립과 싸움의 생애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갈라디아서를 말하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갈라디아서의 정신]은 갈라디아서를 유일한 무기로 하여
신앙의 싸움터에서 싸우고 이긴 저자의 전승보고서이다.
이것은 1924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매 일요일의 성서 연구회에서 강의되고
이어서 [세이쇼노겡뀨우-성서지연구]
지에 연재되고
다시 동명의 서적으로서 1926년 봄에 발행된 것이다.
그때 저자가 이 글(책)에 실은 서문은 다음과 같다.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일컬어 이것은 내 글(책)이다]라고 했다.
나는 또한 그를 따라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은 나의 글(책)이다]라고.
하지만 내가 갈라디아서에 힘입은 바는 루터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루터는 로마천주교회에 반대한 후에
자기의 교회를 만들어 마침내 법왕 이상의 법왕 되기에 이르렀으나
나는 모든 교회에 반대하고 종생 무교회적 신앙을 계속 했기 때문이다.
만약 법왕이나 감독이 내게 향하여
[네 무교회주의의 성서적 기초는 어디 있는가?]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답하여 말한다.
[바울의 갈라디아서간에 있어서이다]라고.
갈라디아서는 실로 신자의 신앙 자유를 확보케 하는 글이다.
성서에 이 글이 있는 동안은 반교회적 정신은 꺼지지 않고
법왕,
감독,
기타의 교직들을 신자의 자유와 독립을 빼앗을 수는 없다.
나는 오늘이라 해도 내 자유를 노리려는 이들 교직 앞에 바울의 말을 들이대 말했다.
[이후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말라.
그것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기 때문이다](6:17)라고.
루터가 이 서간으로서 부패한 중고시대의 로마교회를 깨뜨린 것 같이
우리들도 또 하나님의 도우심 따라
이 갈라디아서를 가지고 부패한 오늘의 영국교회 또 미국교회를 깨뜨릴 것이다.
실로 미국교회는 현대의 로마교회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잊어버리고 사회봉사를 말한다.
그들은 신앙에 의하지 않고 사업에 의해 구원되고자 한다.
옳다.
그들은 자기는 구원되려 않고 다만 남을 구원하려 한다.
그리고 소위 구제사업에 다망함을 일컬어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라고 한다.
실로 바울이 말한 복음을 잘못되게 하는 것으로서 오늘의 미국교회 같은 것은 없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강대한 이 [제20세기의 로마교회]에 대항하고자 할 때
우리들이 잡을 최량의 무기는 갈라디아서이다.
사람은 [금후 세계를 멸하는 것은 미국주의이다]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이 강대한 미국주의에 이겨내고도 남음이 있는 것은
갈라디아서에 명기된 바울의 복음이다.
이 글(책)은 갈라디아서의 정신을 전하려고 노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상세에 걸쳐 주해를 시도하기 보다는 간단하게 정신을 말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생각하여 이 소저술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바이다.
이 서문이 기록된 때,
저자는 66세 안으로는 [세이쇼노겡뀨우-성서지연구]
창간 이미 26년에 달하여
300호를 넘고 필생의 대저 [로마의 연구]는 발행되고
다시 영문 월간 잡지도 발간되어 세계의 식자의 주목을 받고 많은 제자들은
그의 주의에 회집하여 유능한 조수는 그의 전도를 돕고
그 사이에 차츰 [무교회주의]
고양의 신흥기운이 힘차게 싹트기 시작하여
그는 전도 30년의 수확,
더구나 훌륭한 수확을 거두고 있는 듯한 감이 있었다.
또 밖으로는 미국의 배일 이민법안이 통과 하여
크게 저자의 의분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서문이 삽상한 기개와 헌앙한 의기로 불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당시의 저자의 주위의 사정은 어떠하든
또 그것이 저자의 말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다 해도
이 서문은 저자가 갈라디아서에서 얻고
그것에 의해 생애를 싸운 바의 신앙과 자유와 독립을 갈파한 것이다.
저자는 이 제12권을 가지고서 아니 본주해 전집17권을 가지고서
이 갈라디아서의 신앙과 정신을 분명히 하는 것에 의해
영원히 사는 영원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는 갈라디아서의 신앙과 정신에 의해
[제20세기의 로마교회]와 싸워내고
[무교회주의]로 살아냈다.
동시에 갈라디아서의 신앙과 정신에 의해
[무교회주의의 법왕]으로 되는 것도 단호 거부했던 것이다.
만약 저자가 [제 20세기의 로마교회]에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의 생애를 일관하면서 최후에
[무교회주의의 시조, 법왕]으로서 높여지고 섬겨지는 것을 감수했더라면
혹은 기뻐하면서 죽어갔더라면
저자는 결국 갈라디아서의 정신을 짓밟고
자기 자신의 손으로 자기 자신을 장사해버린 것으로 된다.
그리고 이미 먼 먼 과거의 사람으로 되어 버렸을 것이리라.
물론 사후 30년의 오늘,
이 [내촌감삼 성서주해전집]
전 17권이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정신에 따라 무교회주의를 부르짖으면서
같은 갈라디아서의 정신 따라,
자기의 주장한 무교회주의마저
부정하기까지에 성서와 신앙으로 발랄하게 선 저자는
바울과 함께 영원히 사는 사람이다.
이 제 12권은 [우찌무라칸조우의 책]이라 부르기에 좋은 책이다.
또 저자의 성서주해에 관한 일반적인 해설에 대해서는 제1권의 해설을 참조했으면 한다.
*내촌감삼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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