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를 고쳐주다
성 경:
[행 3:1-10]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행 3:1]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 제 구시
기도 시간에
- 3시를 가리킨다.
단 6:11;
9: 21에 의하면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제 삼 시(오전 9시),
제 육시(12시),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제 구 시 (오후3시)를 정해놓고 세 번의 기도를 하였다.
(단 6:11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단 9:
21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물론 이것은 구속력있는 율법 규례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 관습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하루 구분법에 의하면 제 구 시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저녁시간이 되어가는 오후 예배 시간을 의미한다.
(출 29:39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공식적 기도시간은
(1) 이른 아침.
(2) 제 구 시,
즉 오후 예배 시간인 이 때공중 기도를 드리는 순서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3) 해질 황혼 무렵에 또 한 번의 기도시간이 있었다.
오늘날도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인간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권장할 만한 방법이라 하겠다.
▶ 베드로와 요한 – 그들 두 제자들은
(1) 함께 어업에 종사한 동업자였다.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눅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2) 침례요한의 때부터 메시야를 고대하던 자들이었다.
(요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3) 개심 후 함께 사도직을 받은 동료 였다.
(마 10: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4) 특별히 예수께 인정받고 사랑을 입은 자들이었다.
(마 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눅 8:51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5)예수께서 수난 받으실 때에 행동을 같이하던 친밀한 친구였다.
(눅 22: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요 18:16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6)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 동역자였다.
(행 8: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성질이 급하고 정열적인 베드로와 조용하고 차분한 요한은 성격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이 두사람은 모든 면에서 함께 행동하였다.
(눅 22: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요 13:24-25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요 18:16-17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요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따라서 이들은 12제자의 선봉장(先鋒將)으로 가장 중심 역할을 했으며 지도자로 부각된 인물들이었다.
▶ 성전에 올라갈새
- '그들이 올라가고 있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현재 진행중인 어떤 동작 및 과정을 아주 시각적으로 인상깊게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 갔을까?
여기서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유대인의 율법
의식을 따라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기
보다는 그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므로
복음을 전파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서 올라갔다'는 표현으로 근본적으로 종교상의 경건한 측면에서 비롯되어 나온 말이다
(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요 7: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아울러 사도들이 예수의 승천직후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욱 24:49)고 하신 예수의 명령과
또 그들의 사명이
'예루살렘에서 부터
시작되리라'(1:8)는 말씀과도 일치 되는 것이다.
[행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 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리고 그의
어머니 태에서
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 하나'
가 된다.
이것은 그가 중간에 사고로 다친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40세(4:22)가 되는 지금까지 하체가 마비된 고통을 지닌 것을 보여줌으로써 나을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임을 시사한다.
(4: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 사람들이 메고
오니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 그는 일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동냥을 하며 살아가야 했다.
더욱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매번 다른 사람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하는 불쌍하고 비참한 걸인(乞人)이었다.
한편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를 구태여 성전 문 앞에 둔 이유는 무엇일까?
유대교에서는 남을 구제하는 일이 매우 큰 덕목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이 성전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그 거지들에게 동전을 던져줌으로써 하나님의 상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잘 아는 걸인들이 성전이나 전각 입구에 앉아 구걸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걸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성전 문 앞이야말로 동냥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고 또한 유대인들은 남을 구제하여 하나님의 상을 얻기 위해 성전 문에 걸인이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 미문(the Beautiful Gate) 이라는 이름은 외관상으로 장엄함과 화려함을 지녔기 때문에 붙여진 듯하다.
그런데 이 미문이 예루살렘 성전의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분분하다.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는 성전 동편의 바깔 문인 슈산 문(Meyer,
Alfird), 또는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가노르 문(Knowling,
Alexander) 의 양설이 주로 언급되고 있다.
▶ 두는 자라
- 매일매일 반복되어 앉혀지는 습관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행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 구걸하거늘 - 구걸의 행위가 다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가운데 손을 내밀고 무엇을 받으려는 그때의 정황을 잘 묘사해 주는 누가의 표현법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간절하고도 정중하게 한 푼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표현이다.
[행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 본문에 있는 그대로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행동을 취한 것이며 이 기적 행함에도 똑같이 주님의 종으로서 성령의 능력 따라 행한 것이다.
단지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것은 행동파적인 기질이 있어 그의 적극적인 성격을 반영한다.
지난날 12제자와 함께 있을 때도 베드로는 언제나 제자들의 대변자(代辯者)역할을 서슴없이 하였었다.
(마 16:13–16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누가 앞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활동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당신의 종들을 통해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사실에 초점이 있을진대,
요한 역시 베드로와 똑같이 이 기적의 사건에 참여한 것이다(J.
Calvin, Lenski).
동시에 행동파 베드로와 사색가 요한이 함께 보조를 맞추는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이다.
▶ 주목하여 가로되
- 원문상으로는 '주목(注目)하여'는 걸인이 마흔살이 되는 지금까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였어도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일이 전개됨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왜 주목하여 보았을까?
주님이 그들 두 제자들을 감동시켰을 때에 그들은 이 동냥하는 걸인에게 눈을 고정시킴으로 그 걸인이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게 유도한 것이었다.
▶ 우리를 보라
- 이는 병들거나 아픈 것이 없이 영원히 사는 천국 복음에 대해 전파하는 사도들에게 단지 한 푼의 돈을 동냥하는 걸인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단호하고 권위있는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명령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이제 앉은뱅이가 돈 몇 푼을 구하는 상태에서 떠나 하나님의 은혜를 소원(訴願)하도록 요구한 말이고 신기하고도 이례적(異例的)인 하늘의 축복을 소망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행 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 바라보거늘 -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의를 사도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생동감있게 묘사한 말이다.
몇 푼을 던져주고 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우리를 보라'고까지 말한 그들에게 이제 이 걸인은 '평상시보다도 더 많은,
뭔가 대단한 것을 얻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주의를 집중하여 쳐다본 것이다(Lenski).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앉은뱅이에게 보기드문 기대감을 잔뜩 불러 일으켜 놓고 베드로가 한 이 말은 은과 금을 구하던 걸인으로 하여금 허탈감에 빠지게 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곧 이어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했기 때문에 낙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제 베드로의 이 선언을 통해서 돈 몇 푼이 아닌 자신의 처지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빛을 기대하는 희망의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곧바로 선언되는 베드로의 선포는 앉은뱅이로 하여금 어떤 신기한 기대감(期待感)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베드로의 선언 속에는
우리는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적용하며 사도들에게 물질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의 뜻에 따라 앉은뱅이에게 은이나 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하늘의 능력을 그에게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차원에서 그렇게 선포한 것이다.
▶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사도들이 소유한 최고의 보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하여 걸인이 구하던 은과 금,
즉 세상의 보화들을 배설물로 여겨버린 자들이었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서 '이름으로'라고 표현한 것을 먼저 주목해 보자.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및 본질 즉 그 사람의 존재를 대표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나 신앙심을 가지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믿는 예수의 능력과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생명의 근원이 되신 예수께서 크신 능력을 베푸셔서 병자를 낫게 하신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는 말이 암시해 주듯 당시 나사렛은 천한 지방으로 간주되었기에 주님께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는 것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경멸과 조롱의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대망의 메시야였으며 그 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 베푸심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걸으라 - 이 말은 시작과 계속의 개념을 가진 현재 명령형으로서 '걷기 시작하라.
그리고 지금부터
계속 걸으라'는 뜻이다.
이 명령은 주님이 뜻을 선포하는 말씀이므로 놀라운 권능을 동반하는 권위있는 선언이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이 말을 믿었다는 문자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도의 말에 항변(抗辯)
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순응한 것을 보아 그가 베드로의 권위있는 명령을 듣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도의 이 명령과 함께 성령의 크신 역사가 순간적으로 불쌍한 걸인에게 임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의 이 '걸으라'는 명령과 함께 성령이 얼어붙은 영혼을 혼들어 놓았던 것이다.
40년 동안 말라붙어 있던 하반신에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불어 넣어짐으로써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었다.
[행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 '잡아 일으킨다'는 말은 주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선포한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의심없이 믿고 확신하여 손수 불구자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걸인의 편에서 보면 베드로의 명령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그의 믿음을 더욱 복돋아 주기 위하여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이다.(John
Joseph H. Mayfield).
▶ 발과 발목이
- 앉은뱅이가 치유될 때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하여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특수한 단어들은 한결같이 의학적 성격을 띤 용어들로서 그의 전직(前職)이 의사였음을 여실히 드러낸다(Kowling).
'발'의 헬라어 '바세이스'는 '발바닥'
또는 '발꿈치'를 가리킨다.
그리고 '발목'의 헬라어 '스퓌드라'는 '복사뼈'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두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타난 의학적 용어이다.
(Henry Alford).
▶ 곧 힘을
얻고 - 이것은 앉은뱅이가 걷지 못한 근본 이유가 발과 발목에 힘이 없었기 때문임을 말함과 동시에 이제 당장 발과 발목에 기이한 힘이 생겨 정상으로 돌아옴을 뜻한다.
그리고 일순간에 앉은뱅이가 치유 받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반 법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행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 뛰어 서서
걸으며 - '그는 뛰어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이는 베드로의 말이 허풍(虛風)을 떠는 빈 말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실재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과 그 능력의 놀라움을 증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기적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바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사35:6)라는 메시야의 시대가 실제로 도래 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표적(sign)이 된 것이다.
40여년 동안 불구의 앉은뱅이 신세로 침상을 떠나지 못했던 그가 이제 고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기쁨을 기운차게 표시한 것이다.
▶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 앉은뱅이였던 그가 꿈만 같은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입어 걷게 되자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맨처음 들어간 곳은 성전이었다.
이는 자신의 치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여기서 '뛰기도'(leaping up)의 헬라어 '할레스다이’는 뛰어 오르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는 모습으로 마치 놀란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 다녔다는 뜻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시 100:4)라는 시인의 노래는 새롭게 얻은 몸으로 그야말로 기쁨이 충만하여 사도의 뒤를 따라 성전에 들어가는 이 사람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 하나님을 찬미하니
- 동전 몇 닢을 구걸하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체험함으로써 육신의 치료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으니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찬미함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다.
이렇듯 찬송은 은혜를 입은 자가 마음에서부터 드리는 지극한 감사의 표현이고 입술의 제사임을 본다.
(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행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 기적은 그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앉은뱅이였던 자가 걷고 뛰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그 앉은뱅이 걸인은 수 년 동안의 구걸로 인해 이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신원(身元)이나 치유 사실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행 3: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기이히 여기며'는 어떤 행위를 보고 감정적인 면에서 느끼게 되는 탄복이나 충격적인 놀라움 또는 거룩한 두려움 등을 말한다.
그리고
'놀라니라'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접했을 때 정상적인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해진 상태를 말한다.
(막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막 10: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막 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막 16:5-6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눅 4: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이처럼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심히 놀라게 하는 것은 기적의 결과로 나타나는 첫 단계의 모습으로서 기적 자체가 갖는 영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적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방편이다.
(출 4:2-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5)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6)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7)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9)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
요 11:40-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롬 15:18-19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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