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2일 월요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예수의 체포

 

마태복음 2647-56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참조: 마가복음 1443-52, 누가복음 22 47-53, 요한복음 181-11.

 

가룟의 유다가 최후로 그 스승 예수께 대하여 한 일은

잔인 냉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유다는 예수의 기도의 장소를 알고서,

그 곳으로 예수의 적을 안내하여,

그를 체포케 한 것이다.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은 그다라고 반역자는 말했다.

 

입맞춤으로서 그 스승을 적에게 판 것이다.

배반도 여기에 이르러 그 극에 달했다고 할 것이다.

 

유다의 이반은 악의로 나온 것이 아니라,

선의로 나왔다는 설은 서지 않는다.

유다는 여기서 극악한 사람으로 된 것이다.

그의 행동이 밝히 그것을 보여준다.

그는 자기를 속이고,

친구를 기만했으며,

냉혈적으로 그 스승을 그 적에게 판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유다처럼, 적어도 3년 동안 예수의 직접의 지도를 받는 자가,

그렇게까지 타락할 수가 있을까?

 

의인의 감화는 심원하다.

유다는 예수께 수종하여 그 감화를 입은 자이다.

그가 어찌 여기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하는 것은,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타락은 높을수록, 그것만큼 심한 것이다.

 

유다는 예수께 접근했기 때문에 그는 타락하자,

절하(切下)에 까지 타락했던 것이다.

 

모든 등승(登勝)에는 이 위험이 따른다.

 

산에 오르는 자,

지위 높은 자,

부를 더하는 자,

학에 우수한 자,

덕에 진보한 자,

모두 떨어짐의 위험이 있다.

 

그리고 높으면 높은 만큼 타락의 정도가 심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접한 일 없는 자는 유다같이 타락치 않는다.

세상에 최악 최추(最醜)의 사람은 타락 신자이다.

유다는 신자의 가장 좋은 모형(type)이다.

 

오늘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격렬하게 증오하는 자는,

일본 같이 비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가 아니라,

영국, 미국같이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이다.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

특히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허다한 유다는 거짓 입맞춤으로서,

그리스도를 그 적에게 팔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다의 이반(離反)은 그 한 사람에 한한 것 아니다.

모든 신자가 유다의 타락에 빠질 위험이 있다.

 

신자는, 오를 만큼 오르지 않으면, 유다같이 떨어질 위험이 있다.

 

유다는 조금 더 라는 곳까지 달하여,

그것 이상으로 오르지 않은 까닭에,

떨어진 것이다.

 

즉 율법의 도정을 마치고, 이제 일보하여 복음에 달하려 하여,

달하지 못한 까닭에 떨어진 것이다.

 

율법이 싫어하는 것으로서 복음 같은 것은 없다.

유다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반은 율법의 복음에 대한 이반이다.

 

유다가 떠나지 못한 율법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가치 없는 비천한 자로서 보였다.

이런 자는 어떻게 취급해도 옳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가능한 만큼의 모욕을 그에게 가하고,

교회가 이단론자를 취급함과 한가지로,

거짓도 속임도 가하다고 믿어,

복음의 실현자인 예수를,

제사장 및 백성의 장로들, 즉 율법의 대표자에게 건넨 것이다.

 

나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 유다 같은 사람을 보았다.

 

그는 전체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내게서 가르침을 받고자 한 것은,

보다 의로운 사람이 되어 크게 우리나라 위해 진력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떤 일로 인하여 그는 급히 나의 적으로 변했다.

그때까지 그의 눈에 이상의 사람으로써 비친 나는,

그때부터 가장 하찮은 사람 같이 보였다.

 

그러므로 그는 나를 취급하는데 수단을 가리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는 나를 속였다. 조소했다. 타기했다.

그리고 나의 비밀을 나의 적에게 파헤쳐,

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커다란 만족을 느꼈다.

 

내게는 아무리 해도 그의 하는 일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처럼 의를 사모하는 사람이,

어찌하여 그렇듯 무자비하게 나를 취급하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물론 내 경우에 있어서는 예수의 경우와 달라, 많은 결점이 있었다.

하지만 일단 스승으로서 섬긴 사람을 그렇게도 냉혹하게 취급하는 것은,

불신자의 사이에 있어서도 없는 일이다.

나는 그가 내게 대하여 취한 태도에 헤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있어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율법이 복음에 대할 때 일어나는 실망이다.

율법의 의(),

즉 도덕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는 경우에,

사도 유다는 반역자 유다로 된 것이다.

 

복음의 전파자가 면하기 어려운 재난이다.

인세의 최대비극은 이 경우에 연출되는 것이다.

즉 정의의 추구자가, 자기가 구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

즉 복음을 제공받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유다는 실망가였다. 실연자였다.

나사렛의 예수께 자기 이상을 구하여 얻지 못한 까닭에,

실망의 결과, 스승에 거슬리고,

그를 부끄럽게 하며, 적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리고 예수로부터 복음을 구하지 않는 자는 모두 그에 대하여 실족하는 것이다.

예수를 이상의 의인으로 보는 자는,

유다와 함께 거슬리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의를 좇아간 이스라엘 사람은 의의 율법에 미치지 못했다.

이는 어떻게 된 이유에서인가?

그들은 신앙에 의하지 않고, 행위에 의해 추구한 까닭에,

거침돌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보라, 내가 걸려 넘어지는 돌 또는 거침의 바위를 시온에 둔다.

무릇 이것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고 기록된 대로이다’(로마서 9:31-33)라고.

 

유다는 불신의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예수를 그 적에게 넘겨 준 것이다.

 

복음의 전파에 있어서 위험한 자란,

정의를 구하고 죄 사함의 복음을 구하지 않는

소위 신자 또는 구도자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은 언제 유다로 화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한번 갑작스레 복음에 거슬리면,

그들의 행위는 잔인(殘忍)흑박을 다한다.

실로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배반한 유다와 제사장, 장로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실로 하나님다움(성스러움)이 있었다.

그에게 조금의 공포가 없었다.

요한복음 18장의 기사가 잘 그것을 보여 준다.

 

그는 여기서 완전히 무저항주의를 나타내셨다.

그리고 그의 무저항은 저항할 능력이 없어서의 무저항이 아니었다.

저항함의 충분한 능력 있어서의 무저항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무저항이다.

 

예수가 이때 베드로를 경계하신 말씀에 이르기를,

 

네 검을 집에 꽂으라. 무릇 검을 쓰는 사람은 검으로 망할 것이다.

나는 지금 12군단 이상의 천사를 내 아버지께 청하여

받을 수 없는 것으로 너희는 생각하느냐’(26:52-53)라고.

 

예수는 이때의 조금 이전에 도망칠 수도 있었다.

또 제자들과 함께 방어하고 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때 자기를 적에게 내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성의(聖意)라고 믿는 까닭에,

고요히 넘겨주신 것이다.

이것은 참 용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바 일이다.

예수는 이 경우에 있어서도 유다를 잊지 않으셨다.

자기를 입 맞추어 적에게 넘겨 주려 한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친구여, 무엇하러 왔느냐?.

 

친구라 부르시고, 적이라 부르시지 않았다.

 

무엇하러 왔느냐’, ‘무슨 목적으로서 왔는가’.

이 나쁜 일을 하려고 세상에 태어나 왔는가?

가련한 사람아의 의의라고 생각한다.

 

말은 간단했다. 그러나 의미는 심원하다.

 

실족하는 일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실족(범죄)케 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러한 자는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드리워져 바다의 깊은데 빠뜨려 지는 편,

오히려 유익할 것이다’(마태복음 18:7)라고

그가 일찍이 하신 말씀을 축소하여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이 경우에 있어서 마저,

자신을 잊고서,

반역자 유다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렇게 까지 사랑하신 스승을 그렇게까지 괴롭힌 유다의 죄는 깊도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자기를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향하여,

 

만약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사하여 가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란,

제자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서

나를 잡으면 잡았지 손을 내 제자에게 대지 말라는 뜻이다.

 

적을 사랑하여 그 상처를 고치시고,

반역자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시고,

제자들의 안전을 도모하셨다.

 

죽음에 면하여 여유작작하다는 것은 이것이다.

자기 자신의 안전은 조금도 문제가 아니다.

적과 종자의 안전이 유일한 걱정이었다.

그런 이가 또 다시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유다는 타락의 절하(絶下)를 보이고,

예수는 향상의 최고(最高)를 나타내셨다.

 

예수의 체포의 장면에 있어서,

지옥과 천국이 상대하여 나타났다.

 

암흑은 그 광명을 그 적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광명 앞에 암흑은 어지러워졌다.

 

유다의 회한(悔恨)은 이때에 시작한 것이리라.

 

그러나 가련하다. 율법관념에 강하게 잡힌 유다도,

예수의 사랑을 해득치 못했다.

그러므로 그의 행선은 죄의 회개가 아니라 자살이었다.

유다는 복음의 바위에 부딪쳐 파멸했던 것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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