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7일 토요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죽으시고 장사 되셨다가

 

마태복음 2750-6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참조: 요한복음 1931-42, 히브리서 28-18.

 

예수는 시편 제22편의 제1절을 말씀하시면서 숨지셨다.

 

(시편 22:1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는 일로부터 또 나의 울부짖는 말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나이까?)

 

그것과 동시에 세 가지 이상이 나타나셨다고 한다.

 

성전의 휘장,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땅이 흔들려 바위가 터지고라는 것이 그 이이다.

무덤이 열리며(잠자던) 많은 성도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그 삼이다.

 

모두 홍대(hugeness)한 기적인 것으로서

그러한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하면 그것뿐이다.

 

하지만 신자는 그것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한 기적은 아니다.

신자를 가르쳐 인도하기 위한 이상이다.

모두 의미 있는 예수의 죽으심의 의의를 표명하는 기적이다.

만물을 지배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이 이 순간에 있어서 특히 행하신 기적이시다.

성전의 휘장, 위에서 아래로까지 찢어져 둘로 되었다고 한다.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이 휘장이 찢어져 두 곳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즉 성소와 지성소만큼, 그것만큼 거룩해진 것이다.

제사장이 연 1,

속죄의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서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누구라도 이제 곧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히브리서 9장 참조).

 

그리고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속죄의 죽으심에 의해 실제로 성취하신 일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성전의 휘장은 찢어져

신자는 누구나 사람인 제사장,

즉 법왕, 감독, 목사 등 사람이 정한 교직에 의함 없이,

곧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신자의 자유는

촉루산상(해골 곳)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획득된 것이다.

이 일을 표호하는 데 가장 적절한 사건은,

성소와 지성소와를 구분하는 성전 휘장이 분단된 일이다.

이것을 잘 설명하는 것이 히브리서 9장과 10장이다.

 

1019절 이하에 이르기를,

이 때문에 형제여, 우리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그 유체인 휘장을 거쳐 우리에게 열려진 새로운 길로, 담대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대제사장을 얻었으매

마음을 씻음받아 양심의 문책을 버리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져,

참 마음과 완전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것이다라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에 의해,

성전과 교직과 의식은 무용으로 된 것이다.

 

신자는 스스로 구하여 자유를 임의대로 하는 것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죽음으로서 그에게 주신 자유를 배수하여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손으로서 성전의 장막을 찢으시고,

우리들을 불러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너희 위해 예비한 어린양의 피에 의해 담대히 내 슬하로 나오라.

나는 곧 너희를 축복하마.

 

이밖에, 대지진과 사자의 부활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세상 끝에 있어서 나타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십자가에 의해,

세상은 심판 받고 신자는 구원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진은 심판을 나타내고, 부활은 구원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 나팔이 울려 올 때, 일순간에 될 것이다.

 

그것은 나팔이 울려올 때, 죽은 사람 부활하여 썩지 않고,

우리도 또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52)라고

바울이 말한 대로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예표한 것이 이 두 가지 기적이다.

소기적을 가지고서 하는 대기적의 예표였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주적 의의가 있는 사건임을 보이신 기적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렇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한사람의 의인이 주의를 지켜 죽었다는 것은 아니다.

만유의 주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시고, 죽음을 멸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야말로 실로 무한대이다.

이에 의해 조화의 근본에 변화가 온 것이다.

신조화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예루살렘 성 밖, 촉루언덕(갈보리 언덕)에서

죄인이 찌른 창에 숨질 때, 온 땅이 흔들리고 사자(死者)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여

조금도 이상한 것 없는 것이다.

그러했음이 당연하다.

사람의 마음이 그 육체에 나타나듯 하나님의 마음이 만물에 나타나는 것이다.

 

거의 12시경부터 3시에 이르기까지 온 땅,

암흑으로 되고, 햇빛이 어두어지고,

성전 안의 휘장 한가운데서 부터 찢어졌다’(누가복음 23:44-45)

 

하나님의 마음은 그처럼 사물에 나타난 것이다. 굉장함이 있다. 또 귀한 데가 있다.

그리스도는 확실히 죽으셨다. 그의 죽으심은 상상이 아니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서 승천하고,

사람이신 예수만이 죽으셨다는 일파의 사람들의 설은 서지 않는다(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해서는 확실한 증인이 있다.

갈릴리에서 그에게 따르고 섬긴 사람들 안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및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들은 멀리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목격했다.

 

요한복음의 기자도 또 그 목격자의 1인이었다.

그는 정력을 다하여 기록해 말했다.

 

한 군인,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것을 본 자, 증거를 한다. 그 증거는 참이다.

그는 그 말하는 바가 참임을 안다.

이는 너희에게도 믿게 하기 위해 서이다’(요한복음 19:34-35)라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확증하는 것은,

그 일면에 있어서는 속죄를 확실히 하기위해 필요하다.

다른 일면에서는 부활을 확실히 하기위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확실한 죽음 없이 확실한 구원은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복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으셨다.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다.

장사는 죽음을 증명한다.

 

유대인으로 아리마대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최고재판소(산헤드린 -1155역주)의 의원이었고, 부자이며 또 귀인이었다.

그는 니고데모와 한가지로 세평(世評)을 꺼려 남의 눈을 피하여

예수의 제자로 된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권리를 이용하여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청하여 이것을 받아가지고서 베로 감싸,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 없는,

새로이 암석에 판 무덤 안에 모셨다.(누가복음 23:50-53; 19:38).

 

이렇게 하여 예수는 죄인으로서 죽음 당했으나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었다.

여기 있어서인가, 하나님의 종에 관한 예언자의 말씀이 문자대로 실현된 것이다.

 

그 무덤은 악한 자와 함께 마련되었으나,

죽는 때는 부자와 함께 되었다’(이사야 53:9)가 있다.

 

악인과 함께 죽고,

그들과 함께 같은 묘지에 장사될 것이나 귀인의 무덤에 장사되셨다.

경우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경우를 주장하시어 예언을 실현시키셨다고 볼 수가 있다.

일은 사고한 것처럼 보이나 사소한 것 아니다.

그 안에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부자 반드시 악인은 아니다.

예수는 빈자의 친구였는데, 그렇다고 또 부자의 적은 아니었다.

 

그는 인류의 구주로서 왕후 귀족도 또 그로 말미암아 구원될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마대의 요셉은 이른바 상류사회를 대표하여,

여기서 예수의 시체에 대하여 정중한 장의(葬儀)로서 모신 것이다.

 

실로 적당한 봉사인 것으로,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셨음에 틀림이 없다.

또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 자신이 귀인이시다.

그는 그의 지상의 생활을 빈자로서 보내셨다 해도,

그의 시체만이라도 귀인으로 취급되는 것은 아주 적합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체로서 지상에 나타나,

다만 일회, 그것도 사후에,

그 시체만이 귀인으로서의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무어라할 풍자랴, 하지만도 인생은 그러한 것이다.

 

사도신조의 일절에 이르기를,

그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그 고난을 받고, 죽어 장사되었다가라고.

 

이것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신앙개조였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것에 이어서 말한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확인한 것은 그의 부활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죽어 장사 되었다가라고.

 

보통 사람에 대하여 이 일을 확인함의 필요는 없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 것,

죽었대도 무어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죽지 않아야 할 분이었다.

그런데 종교 많다고 해도, 그 조사의 죽음을 신앙개조로 한 것은 없다.

시험 삼아 석가는 죽었다고 주창하고 그 증거를 들것인가?

누구도 이것을 괴이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에게는 당연치 않았다.

 

하나님은

그 성자를 썩게 하지 않으셨다고 있어서 그분만은 죽음을 맛보셔야 할 분이 아니셨다.

그리스도는 다만 의인으로서 성자로서 만 그 일생을 마치신 것일까?

우리들은 그의 거룩한 생애에 있어서만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도덕임에 그치고, 복음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깊은 의미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만약 죽지 않으셨다면,

죄의 제거될 희망은 없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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