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강(講) : A.D 600~1300년의 교회사
1. 우리는 제1강을 5세기 말에서 끝마치었다.
그러나 제1강에서는 아직 언급하지도 않았던 많은 사건이
이 초기의 수 세기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세계 역사상에서 바로 암흑시대라 알려져 있는
무서운 시대에 들어왔다.
그것은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말할 수 없는 무서운 시대였다.
제도화된 로마 천주교에 의한 박해는, 가혹하고 잔악하며 계속되었다.
고의적인 섬멸전이 끊임없이 그리고 참혹하게 여러 나라로 도피해 간
그리스도인들의 뒤를 따랐다.
어느 곳에나 남아있는 것은 거의 전부 피 흘린 발자취뿐 이었으며
특히 영국, 웨일즈, 아프리카나, 알바니아 및 불가리아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곳 외에도 어느 곳에서나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신실하려고
완강하고도 간절한 노력을 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2. 이제 우리는 에큐메니칼, 또는 전 제국회의라는 공회(종교회의, council)에 대하여
주목하기 바란다.
이러한 모든 공회들은 표면상으로는 사도들과 그의 다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개최하였던 교회 회의(행 15:1을 보라)에
기초를 두었고 또한 그것을 모방한 것 같지만,
(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형제들을 가르치며 이르되, 너희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그러나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처럼 서로 닮지 않은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는 다만 여덟 번의 공회(종교교회)에 대하여 고찰해 보려 한다.
그것은 다 각기 다른 황제들에 의하여 소집되었던 것이며
그중 하나도 “교회”에 의하여 소집된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공회 등은 동방, 또는 그리스 교회들 사이에서 개최되었지만.
때로는 서방 즉 로마 천주교의 대표들도 참석하였던 것이다.
3. 첫 번째 종교회의는 AD 325년 니케 혹은 니케아에서 개최되었고
이는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소집되었던 것인데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두 번째 종교회의는 AD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고,
테오도시우스 대제에 의하여 소집되었으며 150명의 감독들이 출석하였다.
(초대에는 감독이라 하면 단순히 지역 교회의 목사를 의미하였다.)
셋째 번은 티오도시우스 2세와 발렌티안 3세가 소집하였고 250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으며 이는 AD 431년 에베소에서 개최되었다.
넷째 번 공회는 황제 마리안이 AD 451년 칼세돈에서 소집하였다.
500명 내지 600명의 감독들과 메트로폴리탄(감독장)들이 출석하였다.
(‘메트로폴리탄’은 도시교회의 목사 또는 큰 교회의 목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종교 회의에서 소위 오늘날 성모숭배(聖母崇拜)의 교리가 공포되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숭배한다는 굉장한 소동을 일으켰으며
심각하게 반대하는 이도 많이 있었으나
결국 천주교의 항구적인 교리가 됨에 따라 승리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여덟 번의 공회의 중 다섯 번째 것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리었다.
(두 번째 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이는 AD 553년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165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이 회는 주로 어떤 문서를 정죄하기 위하여 개최된 것 같이 보인다.
AD 680년에 여섯 번째의 공회가 개최되었다.
이 역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콘스탄틴 페고네이터 황제에 의하여
이단을 규탄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던 것이다.
이 회의를 통하여 오노리우스라 이름하는 교황이 폐위되었고 파문당했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는
교황의 절대 무오설(敎皇無誤設)이 선포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일곱 번째의 종교회의는 AD 787년 니케아에서 소집되었다.
이는 이곳에서 개최된 두 번째의 공회였다.
아이렌 왕후가 이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성상 숭배와 성인 숭배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같이 보인다.
즉 이러한 회의를 통해서 기독교가 성경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노골적으로 이교도화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소위 동방교회 회의라 불리는 여덟 번째의 공회는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어진 것인데,
AD 86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이는 발실리우스 마레도 황제가 소집했으며,
이때 가톨릭은 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가톨릭의 두 분파 - 동방 및 서방 빛 희랍파와 파와 지파-,
동방 및 서방 즉 희랍파와 로마파-의 영도자 곧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그리스의 폰티우스 총주교와 로마의 니콜라스 1세 사이에
대단히 중대한 성질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시비는 대단히 심각한 것이어서
서로 상대방을 파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잠시 동안이지만 가톨릭의 수장 자라는 비어 있었고
따라서 주로 이러한 난관을
가능한 한 해결해 보려고 이 공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서로 우열(愚劣)을 다투었던 가톨릭 교파의 이 분열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만족할 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분쟁을 돌이키려는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로마 교황청의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고
황제가 아니라 로마의 교황이 모든 교회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기의 종교 회의에 관하여서는 본 장의 끝에서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