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31일 수요일

A.D 600~1300년의 교회사

 3 () : A.D 6001300년의 교회사

 

 

1. 우리는 제1강을 5세기 말에서 끝마치었다.

그러나 제1강에서는 아직 언급하지도 않았던 많은 사건이

이 초기의 수 세기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세계 역사상에서 바로 암흑시대라 알려져 있는

무서운 시대에 들어왔다.

 

그것은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말할 수 없는 무서운 시대였다.

제도화된 로마 천주교에 의한 박해는, 가혹하고 잔악하며 계속되었다.

고의적인 섬멸전이 끊임없이 그리고 참혹하게 여러 나라로 도피해 간

그리스도인들의 뒤를 따랐다.

 

어느 곳에나 남아있는 것은 거의 전부 피 흘린 발자취뿐 이었으며

특히 영국, 웨일즈, 아프리카나, 알바니아 및 불가리아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곳 외에도 어느 곳에서나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신실하려고

완강하고도 간절한 노력을 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2. 이제 우리는 에큐메니칼, 또는 전 제국회의라는 공회(종교회의, council)에 대하여

주목하기 바란다.

 

이러한 모든 공회들은 표면상으로는 사도들과 그의 다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개최하였던 교회 회의(15:1을 보라)

기초를 두었고 또한 그것을 모방한 것 같지만,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형제들을 가르치며 이르되, 너희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그러나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처럼 서로 닮지 않은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는 다만 여덟 번의 공회(종교교회)에 대하여 고찰해 보려 한다.

그것은 다 각기 다른 황제들에 의하여 소집되었던 것이며

그중 하나도 교회에 의하여 소집된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공회 등은 동방, 또는 그리스 교회들 사이에서 개최되었지만.

때로는 서방 즉 로마 천주교의 대표들도 참석하였던 것이다.

 

 

 

3. 첫 번째 종교회의는 AD 325년 니케 혹은 니케아에서 개최되었고

이는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소집되었던 것인데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두 번째 종교회의는 AD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고,

테오도시우스 대제에 의하여 소집되었으며 150명의 감독들이 출석하였다.

(초대에는 감독이라 하면 단순히 지역 교회의 목사를 의미하였다.)

 

 

셋째 번은 티오도시우스 2세와 발렌티안 3세가 소집하였고 250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으며 이는 AD 431년 에베소에서 개최되었다.

 

 

넷째 번 공회는 황제 마리안이 AD 451년 칼세돈에서 소집하였다.

500명 내지 600명의 감독들과 메트로폴리탄(감독장)들이 출석하였다.

(‘메트로폴리탄은 도시교회의 목사 또는 큰 교회의 목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종교 회의에서 소위 오늘날 성모숭배(聖母崇拜)의 교리가 공포되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숭배한다는 굉장한 소동을 일으켰으며

심각하게 반대하는 이도 많이 있었으나

결국 천주교의 항구적인 교리가 됨에 따라 승리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여덟 번의 공회의 중 다섯 번째 것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리었다.

(두 번째 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이는 AD 553년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165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이 회는 주로 어떤 문서를 정죄하기 위하여 개최된 것 같이 보인다.

 

AD 680년에 여섯 번째의 공회가 개최되었다.

이 역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콘스탄틴 페고네이터 황제에 의하여

이단을 규탄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던 것이다.

이 회의를 통하여 오노리우스라 이름하는 교황이 폐위되었고 파문당했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는

교황의 절대 무오설(敎皇無誤設)이 선포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일곱 번째의 종교회의는 AD 787년 니케아에서 소집되었다.

이는 이곳에서 개최된 두 번째의 공회였다.

아이렌 왕후가 이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성상 숭배와 성인 숭배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같이 보인다.

 

즉 이러한 회의를 통해서 기독교가 성경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노골적으로 이교도화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소위 동방교회 회의라 불리는 여덟 번째의 공회는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어진 것인데,

AD 86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이는 발실리우스 마레도 황제가 소집했으며,

이때 가톨릭은 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가톨릭의 두 분파 - 동방 및 서방 빛 희랍파와 파와 지파-,

 

동방 및 서방 즉 희랍파와 로마파-의 영도자 곧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그리스의 폰티우스 총주교와 로마의 니콜라스 1세 사이에

대단히 중대한 성질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시비는 대단히 심각한 것이어서

서로 상대방을 파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잠시 동안이지만 가톨릭의 수장 자라는 비어 있었고

따라서 주로 이러한 난관을

가능한 한 해결해 보려고 이 공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서로 우열(愚劣)을 다투었던 가톨릭 교파의 이 분열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만족할 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분쟁을 돌이키려는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로마 교황청의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고

황제가 아니라 로마의 교황이 모든 교회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기의 종교 회의에 관하여서는 본 장의 끝에서 다루기로 한다.

2023년 5월 30일 화요일

A.D 30-500년의 교회사 3

 30-500년의 교회사 3

 

23. 지금 우리는 주후 3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콘스탄틴의 영도 하에 조직된 교권제도는

소위 오늘날 천주교라고 알려져 있는 것으로

급속도로 발전되어 갔다.

 

새로 발족된 이 교회는 세속적인 정부와 결합하여,

이미 신약성경에 완성되어 있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실행기관이 아니라 말씀을 수정 또는 삭제하면서

신약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기관이 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24. 이 입법부가 제정한 최초의 법령이며 결과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법령은 유아세례를 법으로써 제정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법률로 말미암아 유아세례는 의무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이는 A.D.416년에 되어진 사실이다.

이미 유아들은 이에 앞서 한 세기 전부터 세례를 받아 왔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률이 발효됨에 따라

신약성경에 있는 두 가지의 중요한 가르침이 폐기되었으니,

이는 믿는 자만이 침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과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침례에의 순종이다.

 

 

 

25. 이 새로운 교리와 법률의 필연적인 결과로써

이러한 잘못된 교회들은 곧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로써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리 오래지 않아서 회원의 대부분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로 이루어지게 됨으로 인해

거룩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이

거듭나지 아니한 세속적인 권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26. 물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이 새로운 법을 거부하였다.

 

믿는 자의 침례”,

즉 신약 성경적인 침례만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법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아이들이 세례받는 것을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비성경적으로 조직된 교회에서 세례받는 것까지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조직체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였던 교회의 회원이

성경적인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할 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간증과 재침례가 요구되었다.

 

 

 

27. 물론 충성된 교회들의 그 정책은

곧 국가 교회 주의자를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많은 사람들의 심한 원망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이 칭호는 그때부터

잘못된 법령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던

신실한 성도들에게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이름을 빼앗기고

대신 많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그들은 몬타니스트, 터툴리안, 노바티안, 파테린 등등으로 불렸으며

또한 그들이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침례를 베푼다는 이유로

아나 밥티스트(Ana-Baptist, 재침례교도)라 불렀던 것이다.

 

 

 

28. A.D 426년 곧 유아세례가 법령으로 제공된 지

10년 만에 암흑시대라 불리는 무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얼마나 무섭고 캄캄하며 피 비린내 나는 시기였는지!!!

 

이때부터 시작하여 10세기 이상 동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발자취는

대부분 그들 자신이 흘린 피로 씻기게 되었다.



도표에 나타나 있는 박해받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이름에

유의하시기 바란다.

 

때때로 이러한 명칭은 어떤 특수한 지도자들에 의하여

때로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사람들에게 붙여진 명칭이라 할지라도

시대와 국가가 달라짐에 따라 그 명칭이 변하여 갔다.

 

 

 

29. 실제로 교황제도가 뚜렷하게 시작된 것은 암흑시대의 초기였으며

이는 A.D. 440년에서 461년에 있었던 레오 2세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교황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천주교 역사와 비슷한 이 칭호는 크게 발전하였는데

이는 A.D 296년에서 304년까지

로마에 있었던 감독에게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A.D 384년에서 398년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감독으로 있었던

시리시우스가 공식적으로 이를 채택하였고,

그 다음에 레오 2(A.D 440~461)가 정식으로 이를 사용하였다.

 

A.D 707년부터는 이 칭호가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되었고

수 세기 후에는 그레고리 7세에 의하여

교황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칭호로 선언되었다.

 

 

 

30. 이제 이 처음 5세기 동안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자치적인 치제에서 수직적인 위계 체계로의 변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구원에서 침례에 의한 구원으로의 변화.

 

믿는 자의 침례에서 유아세례로의 변화.

 

교권 제도의 확립. 교회와 국가와의 결혼.

 

황제의 거처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것.

 

유아세례가 법령으로써 제정되어 의무적으로 된 것.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

 

A.D 426년에 암흑시대가 시작된 것.

 

복음보다도 검()과 횃불이 구원을 받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 것.

 

신앙의 자유라고 볼 만한 모든 것은 시들어 매장되었으며,

매장된 그대로 여러 세기를 지나게 된 것.

 

신실한 성경적 신약 교회들은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든지 간에

가톨릭의 새로운 세속적인 권력에 의하여

최후의 곤경에까지 쫓기게 되었다는 것.

 

온 세상에 흩어진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숲이나 산속,

그리고 산골짜기나 동굴 속에서 불안한 피난처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