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00년의 교회사 2
9. 침례에 의한 구원과 유아 세례.
이 두 가지 오류는 정설이 되어 있는 역사가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수 세기를 지남에 따라 다른 모든 과오들을 한데 뭉친 것보다도
그리고 2차례의 세계 대전을 제외한 모든 전쟁보다도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흘리게 한 원인이 되었다.
주로 이 두 가지 과오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암흑시대 기간 중에, 특히 12, 13세기 두 세기 동안의 기간만 하더라도
50,000,00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였던 것이다.
10. 다음 3가지의 중요한 특징들이 처음 3세기 기간 중에
많은 교회 가운데 나타나 있음이 역사적으로 밝혀져 있다.
① 모든 교회들의 분리와 독립
② 감독 곧 목사(pastor)의 위치(즉, 한 교회의 종일 뿐이다)
③ 믿는 자만의 침례
다음은 루터파 교회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모세임의 저서에서 인용하기로 한다.
제1편 p.71과 72
“이 황금 시대의 교회 감독이
다음 시대의 감독들과 일치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그 성격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감독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집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독립 교회를 맡아보고 있었으므로
그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실제로는 교회의 봉사자 또는 종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창기의 모든 교회들은 다 독립된 단체였으며
그중 하나도 다른 교회의 관할 밑에 종속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사도 자신들이 세운 교회가 때때로 목회적 의문이 있을 때에는
상의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들이 재판권이나 지배권, 또는 입법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 교회는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점에 있어서 평등한 입장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11. 이 세기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환란과 무서운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놀랄 만한 발전을 하고 있었다.
대 로마제국의 전 영토뿐만 아니라, 전 세계라고는 할 수 없지마는
당시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거의 모든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어떤 교회 역사가들에 의하면
사도들이 세운 많은 교회는 여전히 서 있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실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주 뚜렷하고 현저하게 나타난 과오들이
여러 교회 안에 숨어들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되었으며
마침내 어떤 교회들은 대단히 무질서하게 되어 버렸다.
12. 박해는 더욱더 심하여 갔다.
4세기 초기에 정부가 최초의 박해령을 발표했다.
교회들의 이 놀라운 발전은
로마에 있었던 이교도 지도자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고
갈렐리우스 황제는 더욱더 가혹한 박해의 명령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AD 303년 2월 24일에 일어난 일이다.
이때까지 이교도들은 어떤 일정한 법령 없이 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13. 그러나 이 칙령은
복음의 성장을 저지 시키려는 그 목적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같은 황제 갈렐리우스는 그 후 꼭 8년 만에 (AD 311년)
처음내린 칙령을 철회하고
실제로 신앙의 자유를 용납하는 다른 법령을 발표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을 허용하는 법령이었다.
아마 이것이 교회들에게 유리한 최초의 법령이었을 것이다.
14. A.D 313년에 교회들은 이교도에 대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얻었다.
로마제국의 왕위에 오른 새 황제 콘스탄틴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계속하는 이 교회들에게는 반드시
어떤 신비적인 힘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역사에 의하면 이 훌륭하고도 현실적인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새 황제 콘스탄틴은 창공에 불타는 듯한 빨간 십자가의 환상을 보았고
그 십자가 위에 빨간 문자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너는 이 표시로써 정복하라".
그는 이 말씀을 로마 제국의 세속적인 권력 위에 첨부시킨다면
세계를 쉽사리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사실상 세계의 종교가 되었고
로마 제국은 전 세계의 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15. 그리하여 콘스탄틴 황제의 지도 아래 휴전과
구애(求愛)와 구혼(求婚)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그 황제를 통하여
교회와의 결혼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대의 신령한 권능을 우리에게 부여하라.
그러면 우리는 지상의 일시적인 세상 권력을 그대에게 주리라” 하는 것이었다.
16. 이 부정(不淨)한 결혼을 완성시켜서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공회(혹은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다.
A.D 313년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 대표자들을
회합시키기 위한 소집 통고가 발표되었다.
전부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많은 대표자들이 참석하여 동맹(同盟)을 체결하였다.
이리하여 교권제도(敎權制度)가 형성되었다.
이 교권제도가 조직됨에 따라(-다만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에서 추방되었고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의 머리로 등장하였다.
17. 이 교권제도는 마침내 오늘날 알려져 있는 가톨릭 교회로
발전될 하나의 뚜렷한 시작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가톨릭이 시작된 것은
감독 및 목사들이 성서에 있지 않은 교회정책 운영에 관한
새로운 관념이 현실화되기 시작하였던 2세기 말이나
3세기 초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8.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그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을 때 거기에 응하기를 거부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침례교도)과 교회들이 있었다는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국가와의 혼인관계를 원치 않았으며
중앙집권적인 교회 정치나 또는 지역교회 이외에
어떤 종류의 정치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침례교도)과 교회들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가톨릭의 교권 아래에 들어가지 않았다.
19. 이 교권제도가 창설되었을 때에 그 통솔자가 되었던 콘스탄틴은
그 자신은 당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마는
그와 함께 이 조직체 안에 들어온 그릇되고 무질서한 교회들이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비성경적 교리를 채택함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심각한 의문이 콘스탄틴의 머릿속에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만약 내가 침례로 말미암아 내 죄를 씻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침례를 받은 후에 범하게 될지도 모르는 내 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후세의 모든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질문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침례는 아직 범하지 않은 죄까지라도 씻어 버릴 수 있는 것인가?
또는 침례 받기 전에 범한 죄를
한 가지 방법(즉 침례)으로써 씻어 버릴 수 있으면
침례 받은 후에 범한 죄도
또 다른 하나의 방법으로써 씻어 버릴 수 있을 것인가?
20. 이와같은 여러 가지 의문을 원만히 해결할 수 없었으므로
콘스탄틴은 결국 교회들과 연합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침례만은 자기가 범한 모든 죄를 한꺼번에 씻어 버릴 있도록
생각해서 죽기 직전에 받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침례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21. 전 로마 제국을 위하여 이방종교를 추방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받아들인 콘스탄틴의
이러한 행동은 로마 원로원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그들은 그의 방침을 저지시키려 하였으며 반대를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의 반대는 마침내 황제의 보좌를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고대의 도시이며 후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 개칭하게 됨)
옮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는 두 개의 수도,
곧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생기게 되었고,
서로 대항하는 이 두 도시는 수 세기 후에는 분열된 가톨릭,
즉, 로마 가톨릭과 희랍 정교회를 다스리는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22. 교권제도가 형성되어 교회와 국가가
서로 결합하기 이전에 있었던 교회에 대한 박해는
유대종교와 이방종교에 의하여 행하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중요한 변화가 생기게 되었으니,
곧 이름만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종교라는 그의 새로운 이념에
협조하여 주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멀어져 가는 이 심각한 변화에 대하여
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으므로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정부의 강권을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쳤던 근본 진리에 신실하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혹하고도 참담한
핍박의 시대가 시작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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