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6장의 대의 2
'내가
끝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라'고.
예수는 세 번 거듭 여기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생명의 근원(원천)이신 그이므로,
그렇듯 분명하게 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부활은 예수 독특의 사업이시다.
이는 그를 떠나서 행해질 수는 없다.
사람은 천연적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에 의해 부활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신다.
'내가
끝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라'고.
'그에게
생명 있다'고 하신 그 예수가,
그가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말이다.
부활을 자연적 현상으로서 해석할 때 이것을 해득할 수는 없다.
부활은 생명의 신(新)
공급이다.
그 신(新)
발전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일이다.
'내가
끝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말로서는 망언의 극이다.
하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말로서는 당연한 말씀이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이시다.
그를 먹고,
사람은 생장하여 마침내 영생에 달하는 것이다.
빵과 물고기의 배증(倍增)의 기적을 기회로 하여,
예수는 여기서 그 자신이 생명이신 그것을 서술하고,
또 역설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물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에 이어서
'그에게
생명 있다'는 것이 진술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계속하여
'빛은 어두움에 비추고,
어두움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더라'는 것에 진술되어야 할 순서이다.
그리고 그것이 60절 이하에 있어서 진술 되어 있는 것이다.
'제자들
중, 여러 사람이,
이것을 듣고,
말하기를,
이는 너무
심한 말씀이다.
누가 능히
이것을 들으랴'(6:60)
고.
이는 회의(懷疑)의 시작이다.
'이
후, 그 제자
많이 돌아가고,
예수와 함께
행하지 않았다(6:66)
고.
이는 회의(懷疑)의 실현이다.
심중의 의혹은 여기서 배반의 실행으로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
(가룟
유다)는 열둘의
하나로, 예수를 팔려한
자이다'(6:71)라고.
이것은 배반의 극점이다.
여기서 예수의 직제자의 한 사람은,
그의 적과 결탁하여 그를 십자가 위에 못 박고,
그로 하여금 굴욕의 죽음을 마치게 한 것이다.
실로 '어두움은 이를
깨닫지 못한지라'이다.
세인은,
만물의 창조주,
우주 주재자,
생명과 빛의 보유자의 체현을 만나,
이를 영광의 주로서 우러러 받들지 않았다.
도리어 이것을 욕되게 하고,
이를 죽이고,
이를 인류의 기억에서 장사해 버리려고 해 던 것이다.
죄의 죄,
악의 악이란 이것이다.
세상의 죄 심함은 그 물리친 빛 여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세상은 생명 그것을 거역하고,
빛 그것을 물리친 것이다.
그들이 정죄되어야 함은 당연했다.
예수는 후에 말씀하셨다.
'내가
만약 와서
말하지 않았다면,
그들 죄
없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 죄에
대하여 핑계할
길이 없다'(15:22)
'내
만약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일을
그들 사이에서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 죄
없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이에 나와
내 아버지를
보고 이를
미워했다'(15:24)
이때 유대인은 예수의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듣고서 그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죄란 실로 크도다 이다.
오늘날 그리스도 신자라 일컫는 자 까지가
예수의 기적을 의심하고 또 부인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이 장에 기록된 기적 같은 것,
사실로서 이를 믿는 자는,
식자로서 자임하는 자 중에 아주 드문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경우는 그대로 두고서,
이 경우에 있어서,
예수가 행했다는 기적을 부인하고서는.
전장의 구성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과학상 또는 역사상의 것은 아닌 것이다.
신앙상의 그것이다.
예수가 기적을 행하지 못하셨더라면,
그의 구주이심에 자격은 소멸되는 것이다.
그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영생의 공급자라는 것이다.
신자는 그에게 부활을 요망하고 영혼을 그에게 맡기고 죽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예수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셨다면,
신자의 희망은 전혀 헛것이 되는 것이다.
신자는 끝 날(말일)에 그에게서 최대의 기적이 시행되기를 바라고 죽는 것이다.
신자가 '주안에서 잠잔다'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최대의 기적인 부활을 행하시는 이는,
지상에서 보다 작은 기적을 행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신자의 부활에 비교하여 볼 때,
빵과 물고기의 배증은 작은 기적이다.
이렇듯 보다 작은 기적을 아주 쉽게 행할 수 있는 까닭에
신자는 예수를 우러러 구주로 모시며,
그에게 영혼을 맡기고,
그의 부활의 약속을 믿고서,
그 안에서 평안이 잠드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이 장의 시초에 기록된 것 같은 기적을 행하지 못하셨더라면,
그는 후에 이르러
'내가
끝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몇 번 거듭했더라도 아무 효력도 없는 것이다.
빵과 물고기조차 만들 수 없는데 死者를 어찌 부활케 할 수 있으랴 이다.
예수에게 기적을 행함의 힘이 없고서는,
그는 인류의 구주는 아닌 것이다.
좋은(선한)
도덕의 교사만으로는 사람을 영원히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은 영의 일이다.
또 몸(육체)의 일이다.
사람에게 완전한 영을 주고 이에 가함에 있어서
영구히 썩지 않는 완전한 몸으로 할 때,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완전한 구원을 실시함에는
만물의 창조자 이하로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유로 기적을 행하시어,
그가 인류의 요구하는 완전한 구주이심을 명시하신 것이다.
기적을 부정하는 자는 학자답게 보인다.
물론 의미 없는 기적은 모두 부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기적은 의미 없는 기적은 아니다.
이에 인류의 영원한 희망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에게 이 능력이 있었기에 만이,
그리고 지금도 있다고 믿기에 만이,
죽음은 만사의 끝이 아님이 신봉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기적을 행할 수 없는 것 같은,
그러한 약한 구주를 믿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구주는 강자이시다.
그는 만물을 자기 장중에 잡고 계시는 이시다.
그리고 이 권능이 있기 까닭에 그는 말씀하여 주저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무릇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은,
내가 하나도
이를 잃어버리지
않고,
끝 날(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게
할 것이다'(6:39)
라고.
*내촌감삼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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