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31일 토요일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예수의 시험 받으심 2
성 경: [눅 4:5-8]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눅 4: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
이 두 번째 시험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세상 권세에 대한 정치적 시험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시험과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여기서 누가는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라고 기록해
어디로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평행구절인 마 4:8은 '산'이라고 기록하여,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신 34:1-3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일이 심리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예수께서는 실지로 시험을 받기 위해서 모든 세상을
구석구석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간 곳이 산이든 아니든
천하만국을 보기위해서 설정된 장소였다는 정도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눅 4: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이러한 사단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은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 소유권, 양도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단의 그러한 권한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조만간 모든 '권세와 영광'을 되찾게 될 것이며,
또한 온전한 공의와 사랑으로써 모든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는 예수께 세상 전체를 소유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귀의 주장에 대해서 예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며
그렇다고 마귀의 주장을 인정하시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궁극적 지배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단의 뜻에 의해 좌지우지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단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행위인
우상 숭배를 조건부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시험은
성도들의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크고 작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상이냐, 신앙적 진리냐,
혹은 사단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적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만국의 권세를 초개처럼 버리시는
예수의 단호한 결단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눅 4: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
마귀가 요구하는 절은 단순한 인사형식이 아니라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들을 마귀에게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들의 구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1)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되므로
우리를 위하여 온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2) 성경은 메시야가 먼저 고난을 받고
그 다음에야 '영광에 들어간다'(24:26)고 가르친다.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3) 마귀는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이 시험은 예수가
왕국을 즉시에 받으므로 십자가를 피하게 하여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挫折)시키려는 것이었다.
[눅 4: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방법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제시해 준다.
예수는 사단을 대적함에 있어 신 6:13을 인용하심으로써
(신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하나님께 순종한 마지막 아담,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곧 완전한 인간으로서 마귀를 대적했다.
즉 예수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고 응답하신 것이다.
이렇듯 예수가 구약에서 인용한 말씀들은
마귀를 대적하는데 더없이 훌륭한 무기였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려는 그리스도와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항상 그 뜻을 대적케 하려는 사단의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창 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예수님의 기도처럼 우리도 기도하게 하옵소서.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2021년 7월 30일 금요일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예수의 시험 받으심
성 경: [눅 4:1-13]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눅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이 구절은 3:22에 연결된다.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 구절은 구약성경과 연결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해 준다.
예수는 '40일 동안 광야'에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wander)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모세가 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40일간 있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
(신 9:9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호 11:1)로 비유한다면
(호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즉,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또는 단일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인도했다.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셨으나
여기서는 사단이 그의 아들을 시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험을 받았을 때 실패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그 시험을 이기셨다.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은 수많은 시험 가운데서
거의 매번 시험에 져 엄청난 죄악들을 범했지만
예수는 광야에서의 몇 차례의 시험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내내 많은 시험들을 당하셨지만 그 모든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 똑같은 유년기,
똑같은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바로 이런 흠 없고 순전(純全)한 어린 양 같은 예수께서
온갖 시험을 이기시면서 우리 인류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신 것이다.
한편 누가가 성령의 사역과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구절에서도 그 사실이 명확해진다.
3:22에서 성령이 예수께 강림하시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식적(公式的)으로 모습을 드러내
메시야적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언급했다.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침례식 이후에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그 인도하심에 따라
활동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는 것 역시
이 가운데 성령의 개입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예수에게 있어 행동 동기였고,
그 이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폭발적 복음운동의 주요 동인(動因)이었다.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눅 4: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 마귀에게(디아볼루) - '마귀' 또는 '사단'을 나타내는 이 단어는
'비방자', '고자질장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70인역(LXX)은 비난자나 적이나 유혹자로서
마귀를 지칭하는데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대상 21: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슥 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한편 이와 유사한 내용의 단어로 '사타나스'('대적자', '적')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사탄에서 유래하였다.
(삼상 29:4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이 두 단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반면에 바울은 대개 '사타나스'를 사용하며
평행구절인 막 1:13도 '사타나스'를 사용하고 있다.
사단이 세상의 왕이요 신이다.
(6절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한 존재로서 사단은 하나님의 것인 영광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사단의 통치 아래 있게 되며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막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행 13: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들이 하는 일은 '디아볼로스'의 일이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결국 사단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갈라놓는 것이며
사단의 궁극적 무기는 사망이다.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마귀의 왕국을 멸망시키게 되고 결국 사단은 하늘로부터 쫓겨나게 되며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요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계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그 결과 사단은 더 이상 비방자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사단과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공동체(共同體)를 상대로 계속된다.
(고전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엡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 시험 -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역성경은 이 세 가지의 경우를 구분하여 따로 기록하지 않고
모두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사단은 사람들을 '시험'(temptation)한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시험을 하시지도 않으며
그 자신이 그런 방법에 의해서 시험을 받으시지도 않는다.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게다가 모든 시험(temptation)이 직접 사단으로부터 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가끔 시험은 우리 자신의 그릇된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약 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2)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앙과 어긋나는 그릇된 요구들을 하므로
하나님을 시험(test)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와 같은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예수가 신 6:16을 인용한 의도도 아마 그 사실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신 6: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3)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수가 광야에서 경험한 것 가운데는
위의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이 포함되어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율법의 준행(遵行) 여부'를 보시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다.
(출 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한편 사단의 시험에 마주쳤을 때 예수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3:22)고 하신 말씀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즉, 예수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을 이겨내셨던 것이다.
▶ 주리신지라 - 본 구절이 보도하는 바는 예수께서 금식을 하는
40일 동안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거나
또는 배고픔에 대해 전혀 자유 했었다(Shurmann)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계속 주리신 가운데 극도의 배고픈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마귀가 유혹을 해왔다는 것이다.
즉 마귀는 예수의 배고픔이 극에 달한 것을 알고는
그 배고픔을 더욱 자극하여 먹는 것으로 예수를 유혹하려고 했던 것이다.
[눅 4: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 여기서 사단이 떡덩이를 언급한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것을 연상시킨다.
(출 16: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던 것과 같은
이적을 베풀어 주리라 기대했었다.
(요 6: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결국 사단이 예수에게 이와 같은 시험을 했던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어떤 일을 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촉구의 목적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객관적 증거를 보려는 것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부추기는데 있었다.
즉, 이 사단의 간악한 시험 배후에는 하나님과 예수의 사이를
와해(瓦解)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예수가 수행할 메시야적 사명을 방해하려는
사악하고도 교활한 간계가 숨어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이겨내는데,
사단의 유혹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그 사실을
더욱 확실히 입증해 준다(I.H. Marshall).
[눅 4: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신 8:3에서 인용한 것이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를 40년 동안
유랑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신’것이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는
그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준수함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동안에 예수는 줄곧 신실했다.
예수께서 보여준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했을 때
그들이 행동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답변한 내용은 예수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철두철미 순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가 시험받을 때 모범이 되는 것이다.
(히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한편 극도의 굶주림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실하심을 갖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는
떡부스러기 하나를 취하시는 것조차도 인류 구속을 위해
거부하시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 주셨다.
(22: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요 6:48-5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따라서 우리는 시험 당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