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9일 목요일

공적 활동 시작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출세

 

누가복음 31-38

 

예수는 12세의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 초예(초참예)를 한 이래,

108년간, 숨은 생애를 보내셨다.

이 동안에 대해서는 기사로 증명할 길 없다 해도,

아마도 보통 사람처럼 지냈을 것이리라.

 

오랜 전설에 말한다.

아버지 요셉은 예수 18세 무렵 죽고,

이후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수의 직을 취하셨다고.

 

다만 목수라고 하지만 임금 받는 피고용자는 아니다.

집에서 수공업을 업으로 하는 독립의 경영자이다(joinery, 즉 목수, 소목 같은 것은 거의 이에 가까운 것이리라).

 

저스틴 마터의 글()에 기초하여 그려진 고화(古畵),

25세 즈음에 청년 예수가 부지런히 농부가 쓰는 삽(가래 spade)을 만드는 그림이 있다.

생각건대 알려지지 않은 생애에 있어서도 잘 생계상의 독립을 지키고,

사람을 속이지 않는 좋은 기구를 산출하여,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것을 표출(표현 presentation)한 것이다.

 

즉 사람은 모른대도 다만 하나님께만 의뢰하고,

날마다의 일의 확실로서 무언의 설교를 하는 생활인 것으로서,

실로 하나님의 아들다운 생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드디어 세상에 나가서(출세하여),

자기의 전생활로서 하나님을 나타내야 할 때가 왔다.

 

누가복음 제3장은 즉 그리스도 출세의 기사이다.

 

그리고 누가는 그 서문의 모두에서 말한 대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세히 고구 한 결과, 역사적 정세를 전했다고 하는 것이다.

때는 로마황제 디베료 가이사의 제15년으로서 유다의 총독은 본디오 빌라도였고,

사린의 분봉왕은 헤롯, 빌립(필리포), 및 루사니아였고,

또 예루살렘의 제사장은 안나스, 가야바(835 역주 참조)의 양인이었다고

 

(1-2 이제 카이사르 티베리우스의 통치 제십오년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사분영주로, 그의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사분영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사분영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니라).

 

그렇듯 상밀 한 역사적 서술은,

곧 그 사실이 어느 특별한 때와 곳(장소)에서 일어났었던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기사의 내용의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아주 유력한 재료이다.

 

이에 의해 누가복음의 신용을 더하는 것 한층 더 있다.

다만 누가복음뿐 아니라,

복음서의 서법(필법 how to write)은 모두 그러하다.

이 점에 있어서, 복음서는 보다 공맹의 서에 가깝고,

불교의 경전과 거리가 멀다.

 

누가복음 31, 2절 같은 것은,

적어도 사안을 갖춘 자가

쉽게 간과(overlooking)해서 안 될 기사이다.

뿐만 아니라 디베료 가이사(티베리우스)라고 하면

로마제국 제2세의 황제이다.

 

당시의 로마는 세계적 대제국이었다.

오늘 구주(Europe)에 웅비(vigorous action)하는 제방(제국)같은 것은

실로 당시의 로마 제국의 계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근세문명의 연원(origin)은 당시의 로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출세(공적활동개시)

그 지위에서 본대도 독특한 것이었다.

 

그는 석가(2282역주), 공자(611역주)처럼

인류 역사의 본류 중에,

더구나 그것이 판연(distinct)

세계적으로 된 곳에 나타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출세에 앞서서 그를 세상에 소개한 이는 침례 요한이었다.

요한과 그리스도는 그 어머니 동지가 친척이었던 데서,

또 서로 혈연의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성질은 아주 달랐다.

 

요한은 정의 일방(one side)의 극히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옛 예언자의 생애를 그대로 실행하기를 원하여,

집을 버리고 황야(광야)로 나가,

가난하고도 청결한 생활을 보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따뜻한 가정에서 보통사람으로서 자라고,

일상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이웃을 행복하게 했다.

 

그는 실로 '은총과 진리로 찬'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처럼 그 성격을 달리했다고 하나,

그리스도는 먼저 요한에게 소개되어 세상에 나서야 했다.

 

무릇 위인으로서 참신한 가르침을 제창하려 하는 자였을 때

반드시 누구인가 이것을 세상에 소개함의 필요가 있다.

이는 다만 소개되는 그 사람 위해서 뿐 아니라

또 이것을 받는 세상사람 위해 필요하다.

 

특히 그 사람이 위대하면 한 만큼 소개의 필요도 또한 크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종내 그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로서 그 같이 중대한 임무는 없다.

 

영국의 칼라일,

당초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일 몇 년,

뒤에 바다를 건너 찾아 온 에머슨(5376역주)

미국에 돌아가 그의 위를 소개한데서,

사람은 겨우 칼라일의 이름을 알았던 것이다.

 

만약 에머슨이 없었더라면,

칼라일을 모르는 우리들의 불행은 얼마였으랴?

 

하물며 그리스도의 세상 출발(공생에 개시)에 있어서는,

그와 백성을 관계 맺게 해야 할

특수한 사람의 존재는 없어서 안 될 요건이었다.

왕자의 거동(imperial visit)에 있어서는

백성은 먼저 도로공사(도병청)를 하고서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 같이, 하나님의 아들의 출현에 있어서는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모든 꾀를 평탄히 하고, 굽은 길을 곧게 하고, 험한 것을 쉽게'

하고서 이를 영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처럼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통로(passage)를 곧게 한 자가

곧 침례 요한이었던 것이다.

요한은 또 그리스도의 소개자로서 가장 적당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사람을 요한다.

그리스도는 정치가가 아니다. 미술가가 아니다.

그를 소개하려 할 때, 그 세력 그 미를 칭양해도 무익하다.

 

가령 대 철학자 플라톤(3219)이 나선다 해도,

그리스도의 소개자로서는 적당하지 않다.

 

다만 우리들의 죄를 보이고 회개를 촉구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완전한 그리스도의 소개자이다.

 

그리고 요한은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와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고 물은데 대하여

 

'두벌 겉옷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음식물을 가진 자도 또한 그리하라.'고 대답하고,

 

세리에 대해서는,

'정례의 세은 외에 많이 취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하고,

 

병졸에 대해서는

'사람을 위협하고, 혹은 모함하여 고소하는 일을 하지 말라.

얻는 바 급료로서 족하게 여기라'고 가르쳐,

 

그리하여 각각 그 급소를 찌른 것이다.

몸소 무욕의 생활을 실행하고, 그리고 엄정정의를 사람에게 가르쳤다.

그 같은 이는 실로 적당한 그리스도의 소개자였다.

 

오늘 우리의 실험(경험)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최상의 준비는 무엇인가?

 

그리스어(헬라어)의 지식일까?

철학의 연구일까?

아니, 이러한 것은 극히 미약한 준비임에 지나지 않는다.

 

최상의 준비란 다름 아니다.

엄숙(엄호)히 바른 생애를

(보내는 자가) 가르쳐 주는 것 이것이다.

 

나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것도 역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그 제1은 나의 아버지다.

그는 특별한 위인이 아니었지만도,

그 정직의 일점에 이르러서는, 드물게 보는 바였다.

 

실로 그는 무엇보다도 정직을 중히 여겼다.

따라서 그 아들에게 임()하는데 준엄 일보를 유예치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함의 최량의 교육이었다.

 

그 제2는 칼라일이다.

그는 근세에 있어서의 침례 요한이다.

그의 문학은 이것을 일언으로 다 할 수가 있다.

 

'거짓말하지 말라(속이지 말라)'.

 

그리고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는 자는 양심의 예빈 한

칼라일 같은 사람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엄격하여 침노할 수 없는 침례 요한에게 인도 될 때,

사람은 아주 잘 그리스도에게 나감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집에 엄격한 부형 있음을 하소연하지 말라.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하라.

그들의 감화 하에 준비되어,

신앙은 가장 확실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의 씨(종자)를 심는데 최량의 토지는,

침례 요한에 의해 밭갈이 된 밭이다.

 

침례 요한이란다. 그는 실로 침례를 주었다.

그는 요단강의 사해에 흘러들어 가려는 부근에서,

물로 침례를 준 것이다.

하지만,

요한의 침례는 후에 그리스도께서 베푸신(주신) 침례와는

전연 그 의미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자 한가지로 천연의 물로 잠기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침례는 죄를 씻기 위해서였다.

즉 참된 침례였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의 침례는 신앙의 표백이다.

죽어 장사되고,

3일 후에 부활하신 것을 믿는바 신앙의 표백(고백)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이에 따르는 우리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의 표명이다.

 

침례에 죄를 씻는 힘 없다.

죄를 속량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죄에서 깨끗이 하는 것은 성령의 힘이다.

우리들은 침례를 받았다고 하여 죄에서 멀어지는 것 아니다.

 

다만 이에 의해,

구주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공공연하게 표방하는 것이다.

 

이 의미를 잘못 아는데 있어서는,

침례는 식으로서 귀한 식이다.

넘쳐흐르는 청류에 몸을 담구고,

증인들 앞에 서서 새로운 신앙의 표백을 하는 것은,

육을 가지는 우리들을 돕는 일 지대하다.

 

내 만약 침례를 베푼다면.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이것을 주려하는 자이다.

그리스도도 역시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셨다.

어떤 이들은 이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증거 하는 것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죄를 회개함의 필요 없었음은

성서 전체가 명시하는 바이다.

 

그리스도가 침례를 받은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 인류를 대표하여 받으신 것이다.

 

그는 우리들 대신하여 침례를 받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다.

 

그의 생애는 일면에 있어서 인류를 대표하는 생애였다.

 

(114일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 (19172'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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