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탄생
성 경: [눅 2:1-4]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눅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 그 때에 - 2장을 시작하는 이 말은
1:80의 언급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새로운 사건의 시작을 알림과 아울러
상황의 변화로 인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 가이사 아구스도(카이사로스 아우구스투) - '카이사로스'는
하나의 인명일 수도 있고 후대적 용법에서 처럼 칭호일 수도 있다.
아구스도는 원래 라틴어인데 헬라어로는
보통 '황제'(세바스토스)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행 25: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이다.
그는 B.C.27-A.D.14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고
그 후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B.C.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 이란 뜻)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그 후 그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로 명명되고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 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란 칭호를 받아들여
모든 종교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게다가 그는 피살(被殺)된 자신의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그를 신으로 받들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 5:2의 예언을
성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Hendriksen).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 영(도그마) -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며 '원리', '법령' 등의 뜻이다.
동사로는 '법령을 제정하다', '칙령을 공포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는 황제의 포고령을 가리킨다.
▶ 천하 - 이는 원어상 '거주지'란 뜻이다.
고대 학자들은 이방인의 땅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헬라인의 거주지를
이 단어로써 나타냈으며 그 후에
'로마제국'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행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17: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 호적(戶籍) - 황제의 칙령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인구 조사에 관한 것이었다.
'호적'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그라포'는 '등록하다', '기록하다'는 말로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히 12: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세금 징수를 위한 파피루스로 된 공식기록부를 가리키며,
이 기록부에는 성명, 직업, 재산, 친척관계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인구 조사는
예수의 탄생을 세계 역사의 맥락 속에 넣어
하나님이 그의 섭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상의 통치자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눅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 구레뇨 –B.C.12년에 마르마리대(Marmaridae)를
군사적으로 장악하여 집정관이 된 후
구레뇨는 갈라디아의 남쪽 접경에 있던 산적 떼의 후손인,
호모나덴세스(Homonadenses) 족을 정복하였다.
그후 그는 A.D. 3-4년 가이우스 시이저(Gaius Caesar)의 고문역을,
A.D. 6-9년에는 시리아의 황제 파견관을 역임한 후 A.D. 21년에 죽었다.
▶ 수리아 - 시리아(수리아)는 B.C. 64에 로마제국에 합병되었다.
A.D. 70까지 유대는 별도로 자체의 행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시리아에 복속되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시리아는
유대 지역까지 포함된 로마제국의 통치령이었다.
▶ 첫 번 한 것이라 - 제1차 인구 조사는
흔히 예수의 탄생보다 훨씬 이후인 A.D. 6년경
구레뇨가 통치하던 시기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행 5:37과 요세푸스의 저서(Antiq. , 26.1)에도
제1차 인구조사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행 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누가가 A.D. 6년에 실시되었던
제1차 인구조사를 그 이전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혼동했다고 추측한다.
그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견해들이 제시되었지만 다음 두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첫째,
어떤 사본에는 구레뇨가 '두 번째'로 '시리이의 총독'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 사본의 내용이 애매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구레뇨는 예수가 태어날 당시와 그 후의 몇 년이 지난 뒤,
곧 두 차례에 걸쳐 시리아의 총독 직위에 있었다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F.F. Bruce, Quirinius, NBD, p.1069).
둘째,
'첫 번'의 헬라어 '프로테'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첫 번째의'라고 번역되었지만 그 단어는 그 의미보다
'이전의' 또는 '앞의'를 뜻할 수 있다.
만약 '첫 번'이라는 단어가 '이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본 구절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 되기 이전에'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본문의 기록의 역사성에 대해 회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만일 이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면
초대의 기독교 논박자들이 이를 지적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며
또한 당대의 교양있는 사람들에게 써 보낸
누가의 기록 속에 터무니없는 내용이 수록 되었을 리도 없겠기 때문이다.
[눅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
인구 조사는 각 사람의 고향에서 실시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렇게 많은 불편을 감수하며 자기의 고향까지 가서
호적을 하는 것은 유대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이었다.
로마의 호적제도는 자신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인적 사항만을 기록하는 훨씬 더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로마의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은
이 호적명령이 로마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자신들의 독자적(獨自的)인 방법과 의사에 의해
행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모든 사실들을 자세히 미루어 살펴본 누가가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던 인구 조사를 강조하여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
'집'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내어
'민족', '족속', '나라' 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족속'은 문자 그대로의 뜻을 나타내나
이 곳에서는 둘이 서로 동의어로 사용된 것 같다.
마 1:6, 16에서도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본 구절에서 다윗의 집 혹은 다윗의 동네라는 말이 거듭 언급되는 것은,
예수께서 육신상으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함과 아울러
다윗 왕가의 후손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께서 일개 초라한 시골민의 가정에서 태어남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삼상 20:6에서 베들레헴은 '다윗 성'이라 불리운다.
(삼상 20:6 네 아버지께서 만일 나에 대하여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읍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락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다윗은 약 천년전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양떼를 돌보던 곳도 이 마을 근처의 언덕이었다.
(삼상 17: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7.2Km 떨어졌고
나사렛에서는 약 144Km 떨어진 곳이며 그것의 옛 이름은 에브라다이고
라헬이 장사된 곳이기도 하다.
(창 35: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이 마을 이름의 뜻은 '떡집'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다윗이 자라난 곳이고
미 5:2에 나타난 대로 메시야가 출생한 곳이라는데 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다윗성에서 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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