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의 이상(理想) 부인(婦人)
잠언 31장 10-31절 :
부인문제는 소문제 같으면서도,
실은 소문제가 아니다.
나아가서 남자문제로 되고,
인류문제, 세계문제로 된다.
근래에 부인 문제의 논의가 한창임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부인을 어떻게 보는가?
이는 크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부인관이
아메리카의 부인관과 혼동되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 구별을 명백히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메리카의 부인관은 그리스도교의 부인관은 아니다.
우리들은 성서에 의해서만 그리스도교의 부인관을 아는 것이다.
성서의 부인에 관한 기사는 일괄되어 있지 않다.
전부에 걸쳐서 있다.
이는 연구에 불편한 듯하나,
실은 크게 연구를 자극하는 것이다.
먼저 구약에서 본대도,
부인을 취급하는 기사가 상당히 많은데 놀란다.
지나(1권 015주)에 있어서는
여자와 소인은 부양하기 어렵다고 하지만도,
성서는 부인을 존중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남녀가 전적으로 평등한 것으로 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다른 점이다.
예컨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이스라엘인의 이상부인이다.
모세의 자매 미리암도 또한 그렇다.
기타, 사사기에는 여선지(여예언자) 드보라의 전(傳) 있다.
사무엘서에는 현모 한나의 사적(史蹟) 있다.
종순정숙의 룻,
이방인으로서 독신의 라합,
열왕기하 22장의 여선지 홀다,
느혜미야 6장 14절의 여선지 노아댜,
신약에 보이는 안나,
사도행전에 있는 빌립의 집에서 예언하는 4인의 딸들,
모두 유수(劉秀)한 부인이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구약성서 39권중,
2권은 부인의 전기라는 사실이다.
즉 룻기는 종순하는 여자의 모범을 보이고,
에스더서는 여(女) 애국자의 전이다.
저 유다의 부림절(3권 288주)은
에스더를 기념하는 성의이다.
이렇게 보아오며,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부인의 지위에 실로 존귀한 데가 있다.
혹은 어머니로서,
혹은 선지자로서,
혹은 딸로서,
각각 중대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잠언 제 31장 제 10-제 31절은,
유대의 이상부인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도, 요한,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도,
침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모두 이 잠언에 의해 양육된 것이다.
'누가 현숙한 여자를 찾아낼 수 있으랴! 그 값은 진주보다 귀하다.
그 남편의 마음은 그녀를 믿고, 그의 산업은 핍절치 않으리라.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 남편에게 선한 일을 하고, 악을 행치 않는 도다.
그녀는 양의 털을 구하고, 즐겨 손수 일하는도다'(31:10-13 일역)
'진주'라고 있음은,
루비 혹은 산호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것이든 간에,
가장 아름다운 보석보다도 귀하다고 하는 것이다.
또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에 그녀가 교육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조금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유대의 이상부인은 어머니 또는 아내이고,
소위 노양은 예외였음은 확실하다.
'그녀는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 그 집 사람에게 양식을 (나누어) 준다.
그녀는 그 손에(실은 잣는) 물레를 잡고,
그 손가락에 방추(물레가락)를 쥐는도다'(15-19 일역일부)
그녀는 현대의 교육 있어,
제멋대로 하는 부인처럼 늦잠자지 않았던 것이다.
근면(부지런)하고, 노력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오늘에 있어서는,
물레를 잡을 필요가 없다. 물레 가락을 쥘 수는 없다.
하지만, 유대의 이상처럼,
근면은 현대부인의 이상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또 제 19절은 유대의 부인이
단순히 소극적으로 가사를 처리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진하여 그 손으로 짠 것을 팔아,
가정을 위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같이 하여, 물건을 파는 것은,
조금도 그녀의 수치로 여기는 바 아니었다.
일본의 가정에 있어서의 오꾸사마가,
그저 앉아 명령만 하는 것과는 비상한 차이이다.
이것은 유대인이 열심히 일해 벌이하는 위대한 반면을 전해 주는 것이다.
'그녀는 집사람들을 위해 눈을 겁내지 않는다.
대저 그 집 사람은 모두 홍색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21 일역)
홍색 옷이란,
좋은(부녹함 없는) 의복의 뜻이다.
근면하고 항상 마음을 생활에 쓰는 까닭에,
눈이 온대도, 추위로 인한 두려움은 없는 것이다.
또 '그녀는 상인의 배 같다. 먼 나라에서 그 양식을 운반하다. '(14-일역)고.
어떤 주석가는,
유대의 부인은 외국에서 수입한 것을 가정에서 쓴다고 하는데,
이는 너무나 산문적인 해석이다.
그보다는 먼 원려로 말미암아
마치 일본에 있어서의 야마노우찌 가즈도요노쯔마에 비해야 할 것이다.
'논 밭을 간품하여 이것을 사고, 그 손의 수고(일)로 포도원을 심는다'(16 일역)고.
이것은 부인의 일로서는 과도한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주부에게 이 마음가짐이 없으면
언제까지든 셋방살이를 면치 못한다.
또 우리들은 실제로 20여년이나 신고(辛苦)하여 돈을 저축하고,
남편 위해 빚진 돈 전부를 갚은 어진 아내의 예도 알고 있다.
이상 진술한 것은, 유대의 이상부인의 일면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독립의 이면에는, 언제나 가계(家戒)의 독립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시 한걸음 진보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그 손을 가난한 자에게 펴며,
그 손을 고생하는 자(궁핍한 자)에게 편다'(20-일역)고.
한편으로 저축하고, 다른 한편으로 준다.
이것은 언제나 동반을 요한다.
또 실제, 참으로 동정 많은 사람은 근면한 사람 가운데 많은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게으른 자 만큼 자선에 냉담한 자는 없다.
근면하는 사람은,
시여(구제)를 좋아한다.
게으름과 불인정(몰인정),
근면과 연민은,
실로 손을 잡고 간다.
이 대조 중에,
영적 도덕적인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칼라일(1권 182주)이 후에 가정을 가진 때,
가난한 자에게 1실링의 은화를 시여한 학생시대를 추상하여,
'나는 이제 한번 이 즐거움을 맛보았으면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아내가 내 대신 빈자에게 돈(물건)을 시여한다.
실로 고마운 일이다'라고,
그 아내가 동정 많음을 기뻐한 가화이다.
이러한 부인이야말로 이상적인 여자이다.
'능력(힘)과 존귀는 그녀의 옷이다. 그녀는 후일을 웃는다.
그녀는 입을 열어 지혜를 말한다. 그녀의 혀에 인애의 가르침(법)이 있다. '(25-26)
여자의 잘 눈 띄는 곳(주의하는 곳)은 의복이다.
그러므로 옷에 비교하여 부인의 덕을 칭찬한 것이다.
재능과 존엄을 겸비하는 여성은,
절로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부인이 우리들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고 하자.
그녀의 말하는 바는
신학이 아니라, 철학이 아니라,
참된 지혜이다.
이유(도리)가 아니고, 의론이 아니라,
인애의 말이다.
그리고 최후로는,
유대의 이상부인의 교육문제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성질을 어떻게 해서 키울 수 있을까의 문제이다.
'반들거림(곱다람)은 거짓이다. 아름다움은 김(호흡)같다.
다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 '(30)라고.
이상부인 양성의 비결은 여호와를 아는 일, 이것이다.
이는 성서가 명백하게 보여주는 바이다.
교육이란 속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 일이다.
그런데 무엇이 좋은 성질을 끌어 낼 수 있으랴!
여호와를 아는 일을 두고서는 달리 없는 것이다.
현대인은 교육을 시끄럽게 말해댄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가하다. 하지만도 지혜는 다른데서 얻으라'고.
성서는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혜의 시작이라'고.
이점에 있어서 여호와는 다른 모든 신과 다르다.
여호와는 지식이다.
이 지식은 다른 학문이 주는 바의 지식보다도 근본적인 것이다.
이 지식은 현대의 교육의 결함을 모두 다 충족시키는 것이다.
대학교육은 많은 해(害)를 가르친다.
하지만 여호와를 앎의 지혜는 선한 열매만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년 남녀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여호와를 아는 일이다.
나는 여자교육을 폐지하라고 논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식물학, 문학, 철학이
여호와를 앎의 지식에 대신할 힘 (능력)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유대의 이상부인인 마리아는 가난한 보통 여자였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 있는 부인의 어떠한 자 보다도
지혜에 부하고, 식견에 뛰어나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두 사람의 자녀가 있어,
한편은 여자대학에서 배우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다른 한편은 소학교육을 받음으로 그쳤지만도
여호와를 알았다고 하자.
그들은 30년 후에 이르러 어찌 될 것인가?
단순히 지식, 학문의 점에서 보더라도,
후자는 훨씬 전자를 능가함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아는 자는
자발적으로 그 지식을 연마하는 길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인을 어머니로서,
그 아이들은 그녀를 존경치 않을 수 없다.
이를 아내로 하여,
그 남편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녀의 자식은 일어나서 그녀를 기뻐 감사한다.
그 남편은 그녀를 칭찬하여 말하다. "세상에 어진 여인 많다. 하지만도
그대는 그들 모두보다 낫도다"고'(29-29)
끝으로
'그 한 일로 인하여 그녀를 성문에서 칭찬하라'(31)고.
이는 그리스(헬라) 철학의 부인관과 현저하게 다른 점이다.
그리스 철학자는 말한다.
'여자에게는 모든 일을 시키라 하지만 드러나게(대중 앞에서)
그 공적을 인정하지 말라'고,
이는 부인을 소홀히 하는(경시적) 생각이다.
유대의 부인관은 그렇지 않다.
단순히 가정에 있어서 존경할 뿐 아니라 그녀를 공개로 성문에서 칭찬하고,
그 공적을 세상 앞에 추상하며,
그리하여 일반부인의 모범이 되게 하라는 말이다.
성서는 이상부인을 대우함에는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상은 유대의 부인관의 대략이다.
이에 연관하여 생각나는 것은,
시인 휘티어(3권 141누 참조)의 가편 '눈에 갇혀서'이다.
‘나는 어제 저녁의 대설 가운데를 산보하면서,
오래간만에 그 아름다운 수질을 송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는 뉴잉글랜드에 있어서의 퓨리탄(청교도-1권 251, 2권 34)의
단순한 가정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나는 이 휘티어의 시에 보이는
부인이 유대의 이상 부인에 흡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부인의 존귀와 아름다움을 여기서 보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소위 신부인은 아니다.
그러나 깊은 지혜를 갖는다.
혹은 실을 감고, 혹은 근면하게 일함은,
옛 일본 여성에게서도 볼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유대의 이상부인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께 의지하는 여자이다.
이 점은 전혀 옛 구식 일본의 여자와 다르다.
여호와를 앎의 지혜로 찬 여자,
이가 가장 완전하게 발달한 부인이다.
이상에 의해 보면,
유대의 이상적 부인은,
미국의 이상보다도 훨씬 일본의 그것에 가깝다.
남편을 제일로 하여 이에 쓰임의 점에 있어서,
일본부인은 미국부인보다도 훨씬 성서적이다.
베드로전서 3장 6절이 명시하는
'사라가 아브라함에 순종하여 이를 주라 함 같다'(일본)는
가르치심 같은 것은,
일본부인이 잘 해득하는 일로서,
미국부인에게 있어서는 도리어 커다란 굴욕으로 느껴지는 일의 것이다.
미국 선교사가 일본인에게 전한 많은 오류 가운데,
부인에 관한 오류가, 가장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부인의 이상을 채용하여,
일본의 가정은 파괴되지 않을 수 없다.
* 내촌감삼의 글 (1919년 4월 '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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