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8일 월요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라디아서의 정신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울려 펴지는 소리는 자유이다.



첫째로 논하는 바는 자유의 전도사이다.

그는 사람에 의해 임명된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서 아니고 사람을 통하여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자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1:1 사람들에게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따라서 그는 그가 말하는 복음을 사람에게서 받은 아니다.

사람에게서 배운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에 의해 이것을 받은 것이다.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가령 그리스도에 접근한 12사도라 해도 사람을 전도사로서 임명할 수는 없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을 교회의 주석이라고 불린

야고보, 베드로, 요한 등에게서 받지 않았다.



아니 베드로가 오류에 빠져 있던 때에는 바울은 베드로까지도 힐책한 경우가 있다.*참조(2).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서 모두 동등하다.

내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음에 있어서 사도이거나 법왕이거나 감독이거나 그들이 어떤 사람이라 해도 내게 있어서 상관이 없는 것이다.



(2: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것이 없고).



나는 특히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일에 있어서 나는 자유이다.

자기 멋대로 있다는 의미에 있어서 자유인 것은 아니다.



전도의 사명을 받는데 있어서 사람에게 아무 힘입는 없다는 의미에 있어서 자유인 것이다.



나는 교회의 안수례를 받아 전도사로 것은 아니다.

감독의 면허를 받아 복음 전파에 종사하는 아니다.

일에 관하여서는 나는 전혀 사람에게서 자유인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대해서만 직접의 책임을 가지고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책임도 짊어진 자가 아니다.





갈라디아서가 둘째로 말하는 바는 자유의 복음이다.



율법과 행위에서 전혀 떠난 복음이다.



의식(儀式) 필요 없고 선업(善業) 필요 없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만 이것만 의지하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서도 할례의 의식에 참여하는 일등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이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를 받아도 유익 없고 받지 않아도 유익 없고

다만 사랑에 의한 신앙만이 유익 있는 것이다.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리에게 복음을 주면서 또한 규칙과 의식을 가지고서 우리를 맨다면 우리들을 다시 노예의 멍에를 메게 하는 일이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랑 외에 아무 속박도 없다. 하나님은 주시고 나는 받는다.

그에게 아버지의 자애 있고 내게 아들의 신실 있어서 나는 구원되는 것이다.



이것을 자유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자유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최대의 자유이다. 그리고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사람의 응답이다.

사랑의 응답 신앙이 있을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가 셋째로 창도하는 바는 자유의 생애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들을 석방하여 자유를 얻게 하셨다고.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고 그는 영을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이다.



명령에 따라 행하는(살아가는) 생애에 대신하여

사랑에 격려되어 행하는(살아가는) 생애를 주신 것이다.



방사, 방종의 자유의 생애가 아니다. 선사실행의 자유의 생애이다.

자유의 경우를 주신 것은 아니다. 자유의 능력을 주신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악을 행하는 자는 악의 노예이다.



(요한복음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래서 그는 그의 영이신 성령을 주시어

우리들의 의지와 사념을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악을 생각치 않게 하시고

스스로 선을 행할 있게끔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생애이다.



자유 없이 법률의 자유는 아무 소용도 되지 못한다.

자유 없이 소위 자유의 백성은 악의 노예이다.



그리스도는 크롬웰도, 워싱턴도, 링컨도 없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했던 것이다.



너희는 성령에 의해(성령의 지도 따라) 행하라(살라). 그리하면 육의 (욕심)대로 하는 없을 것이다(5:16)라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들의 마음에 영접하고 이것을 친한 벗으로 하고.



옳다.



나아가 그를 자아로 하고,

내가 죽고 그가 나를 대신하여 안에서 살기에 이르러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인애, 희락, 평화, 인내, 자비, 양선의 사모할 제덕은

도의에 의해 강요되는 행위로서 내개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맺는바 열매로서 절로 내게 있어서 나타나기에 이르는 것이다.



(5:23 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자유의 전도와 자유의 복음,

여기에 더하는데 자유의 생애,

특히 이것을 말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이다.



이글이 성서 중에 보존되어 완전한 자유는 마침내 인류의 소유로 되지 않을 없다.



() 세상에 있는 동안은 정부도 교회도 오랫동안 압제를 계속할 수는 없다.



() 이것 루터가 그의 철벽으로서 의거했던 ,

() 있었기 때문에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이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글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자유도 확실하다.



글을 일컬어 크리스천의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한다.



아아, 감사할진저, 갈라디아서!





*내촌감삼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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