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1일 목요일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

〔갈라디아서 2:1-10 십사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바울이 본장에서 자신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기독교 초창기의 설교와 교회 설립에 있어서 처음에 유대교인들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교인들과 이방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교인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많은 사람들은 제의적 율법에 대한 존경심을 보유하고 있었고 율법의 명예를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방인들로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였고 기독교 자체만으로 완전히 순수한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겼고, 이러한 주장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것이었지만 아직 매장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율법을 존중하는 일을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의 사도였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 기독교를 고수하였다.

이제 본장에서 그는 그와 다른 사도를 사이에 일어났던 , 특히 그와 베드로 사이에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차 여행과 거기서 그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1-10).

. 그가 여행하던 당시의 주변 환경. 이에 대하여 그는 특별히 다음 사항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1. 방문 시기.
그것은 " 사년 "였었다.

그런데 사년 후란 그의 일차 방문이 있은

(1:18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사년을 말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대로 그가 회심한 또는 그리스도가 죽으신 사년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같이 유익한 인물을 그렇게 여러 동안 그의 사업에 종사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의 실례이다.

그리고 그가 이처럼 오랫동안 사도들과 헤어져서 그들에게 복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일도 없이 내내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순수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 종사하였다는 것은 그가 그들과 동등한 자격을 지녔다는 증거였다.

만일 그가 그들보다 열등하였고 그의 가르침이 그들에 의하여 부인될 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그들이 그를 불러다가 시험해 보았으리라는 것은 생각해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던 것이다.

2. 여행에 같이 동행한 인물들.

"그는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갔다."

만일 본문의 여행이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여행과 같은 것이었다면(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바나바가 그와 함께 갔는지 이유를 명백히 있다.

왜냐하면 바나바는 안디옥에 있는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바울의 동무가 되고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일에 협조자가 되도록 선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도도 바나바와 같은 역할을 띠고 바울을 수행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디도를 바울이 데리고 간주된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기가 계속해서 전하고 있는 교훈을 주장하는 조금도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디도는 이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설교자가 되었지만 그는 본래 이방인으로 태어났고 무할례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디도를 동료로 수행케 함으로 유대적 기독교인들이 가르침이나 관습이 지엽적인 것에 불과한 것임을 나타내고자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수의 무용성을 증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인정하며 사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것이었다.

3. 방문의 이유.
그것은 그가 방문에 관하여 신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 하였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자신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에 출두하라는 사람의 소환을 받아서 것이 아니었고
하늘로부터 특별한 명령과 지시에 있어서
특별한 신적인 지시를 받을 있었던 것은 그의 특권이었다.

그렇다고 우리도 사사건건 그러한 지시와 명령을 기대해야 한다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본문의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가 시작하려고 하는 모든 중대한 일에 있어서 있는 대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 앞에 길이 명백히 나타나질 있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며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함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 바울은 우리에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행한 내용을 설명해 준다.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행동은 그가 조금도 다른 사도들보다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권위나 자격이 모든 면에 있어서 다른 사도들과 동등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1. "그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였다" 사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사도의 신실함과 신중함을 엿보게 된다.

(1) 그의 신실함.
그는 그들에게 그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내내 전하여 왔고 지금도 전하기로 다짐하고 있는 가르침에 대하여 또한 유대주의의 온갖 혼합 요소를 벗어난 순수 기독교에 대하여 자유롭고도 조리있게 설명을 하였다.

그는 교훈에 대한 말이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함을 안겨 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주장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것을 자유롭고도 우호적인 방법을 통해 그들 앞에 진술하였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은 그들에게 맡겼다. 그러면서도,

(2) 그는 소란을 야기 시키지나 않았을까 하여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하였다.
그는 그의 복음을 제출함에 있어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보다 사사로이 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또한 되는 대로 말한 것이 아니라

"유력한 자들" 사도를 본인들과 유대적 기독교인들 가운데 지도적 인물들에게 그의 복음을 제출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예루살렘에 왔을 "믿기는 하나 율법에 열심있는 수만 명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21: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수만 명이 있으니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그리고 이렇게 주의한 이유는

"그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해서였다."

그를 반대하는 자들을 동요시킴으로 그의 과거의 수고의 성과를 경감시켜 버리거나 또는 그의 미래의 활동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복음의 교의에 관한 견해 차이보다 복음의 진척을 방해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이러한 교리들이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논쟁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킬 복음 증거에 장애가 되었다.
그의 목적은 그의 교훈이 가장 권위를 지니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인정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 받고자 하는 있었고
그들에 의해 인정받으면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소요를 피하기 위하여 그의 복음을 모든 교회에 공개하지 말고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전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사도의 행동은 우리 모두, 특별히 사역자들에게 그들이 신중해야 필요성을 가르쳐 주며 또한 모든 일에 있어서 성실하게 조심스럽게 처신할 것을 가르쳐 준다.

2. 그는 그들 앞에 그가 전하였던 교훈을 확고하게 고수하였다.
바울은 결단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기의 원리들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희랍인인 디도를 데리고 있으면서 그에게 할례를 받도록 괴롭히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전함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도들도 할례를 강조한 것처럼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비록 그들이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할례가 의미있게 여겨지고 있는 것을 묵인하기는 했지만 그들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에는 사도가 "거짓 형제"라고 일컫고 있는 다른 무리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교회에 또는 성도들 가운데로
"몰려 들어 자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가진 자유를 엿보려고" 들어온 자들이었다.

또한 바울이 복음의 내용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는 의식적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얼마나 굳굳하게 방어하고 있는지를 엿보고자 하였다.
그들의 의도는 "교인들을 종으로 삼고자 "에서였다.

그들은 이러한 자기들의 의도를 관철할 있다면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만일 그들이 바울과 다른 사도들로 하여금 디도에게 할례를 베풀도록 시킬 수만 있었다면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쉽사리 할례를 강요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이방인들을 모세의 율법의 멍에 아래 잡아 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저의를 눈치채고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며 가지 경우라도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복음의 진리로 그들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 때문이었다.
그는 문제에 있어서 그가 굴복하게 된다면 생길 있는 ,
순수한 복음이 유대주의와 결합됨으로 생겨 지는 부패를 막으려 하였고
이방 기독교인들, 특히 갈라디아 교인들의 순수하고 완전한 신앙을 보존하게 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할례라고 하는 것은 중요치 않은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 할례는 죄의 문제와는 관계없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까지도 디모데의 경우에서처럼 할례를 때때로 주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16:3).

그러나 할례가 필수적인 것으로 강조되고 가지 경우만이라도 바울이 할례를 허용함으로써 그것이 안수와 같이 장려할 사실로 여겨진다면 이에 순응하는 것이 복음의 순수성과 자유를 위해 우려할 사태임을 바울은 직감하였다.
그는 모세가 정한 의식과 절기를 강조하는 자들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굳건하게 수호하려고 하였다.
모세가 정한 규례도 합리성을 어떤 경우에는 지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저버리지 않고서, 또는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이를 수행할 없을 때는 이러한 규례는 마땅히 거절되어야 한다.

3. 그가 다른 사도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들로부터 무슨 지식을 얻은 것도 또는 권위를 위임받은 것도 아님을 그는 우리에게 알려 준다.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것이 없고).

그가 본문에 "유력하다는 이들"이라고 말은 다른 사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는 나중에
(9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들은 특히 야보고, 베드로,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들에 관하여 바울은 모든 사람에 의해 마땅히 존경받을 자들도 간주한다.
이들 사도들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교회의 기둥들로 여겨졌던 자들로서 그들은 교회를 빛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받드는 가장 요긴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그들은 바울이 박해자 노릇을 하고 있을 이미 사도로 있었고 따라서 바울은 보지 못하였으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몸으로 보았으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이 필요할 그들은 그보다 예수에 대하여 설명하는 유리한 면이 있음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그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이것이 그가 다른 사도들과 동등한 사도가 없다는 이유가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양을 보고 사도들을 취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도로 부르셨고 또한 자유로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도의 자격을 부여하시고 그들을 사도로 채용하실 있었다.
바울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로를 받으셨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나 " 유명한 이들은 그에게 더하여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가 계시로 알고 있는 사실 이외에 어떤 새로운 사실도 그에게 제출한 교훈의 내용을 마디도 반박하지 못하였다.
이로 보건대 그는 저희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며 그들과 같이 사도라 불리울 만한 충분한 이유와 자질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4. 회담의 결과는 다른 사도들도 확실히 그의 사명과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충분히 확신할 있게 되었다는 것과 그도 그들의 동료 사도로서 인정되었다는 사실이었다.
(7-10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그들은 그의 교훈의 내용에 만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또한 복음을 확고히 하는 필요한 기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또한 복음을 확고히 하는데 필요한 기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함을 보았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바울에게 역사하사 그를 이방인의 사도를 삼으신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처럼 그는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라" 마땅히 결론을 내렸다.

또한 그들은 바울에게 주어진 은혜를 알므로(그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도의 명예와 직분을 감당케 하기 위하여 예정된 자였다) 바울과 바나바를 그들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자요
또한 사도들이 "할례자에게 복음을 계속 전하는 동안 그들은 이방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징표로 "교제의 악수"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임무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당한 일이요,
기독교를 가장 널리 전파할 있는 계기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렇게 하여 회의는 완전한 조화와 일치 속에서 끝났다.

그들은 바울의 교훈과 행위를 인정하였고 그에 대하여 대단히 만족하게 여겼으며 진심으로 그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영접하였으며
"다만 바울과 일행이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 부탁한 외에는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일은 바울도 "본래 힘써 행한 것이었다."

당시 유대 지방의 기독교인들은 대단한 빈곤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사도들은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인하여 바울에게 저희의 처지를 알리고 그의 이방인 교회들과의 친분을 활용하여 생필품을 공급해 주기를 건의하였다.
이것은 타당한 요구였다. 왜냐하면
"만일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은 섬기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15:27).

따라서 그는 쾌히 그러한 요구를 수락한다. 여기서 바울은 자비롭고도 관용성 잇는 성품을 보여 주고 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많은 사람들이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거의 호감을 표시하지 않고 있었으나 그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들을 형제로서 받아들일 마음을 갖추고 있었고,
단순한 견해 차이 때문에 그들은 돕는 일에 협조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기독교인이 지녀야 자애의 아름다운 실례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돕고자 해서는 되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여길 만한 사람이면
누구나 구제를 베풀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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