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의 혼연(婚宴)
(내촌감삼의 주석에서)
요한복음 2장 1-11절 :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제3일(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의
가나에서 혼연이
있었는데,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셨다'(1)
'제3일에'
요단 저편인 벧바라의 땅에서,
예수,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고,
거기서 베드로,
빌립,
안드레,
나다나엘의 제자를 얻은 후,
거촌 나사렛을 향해 귀로에 오르신 데서 3일째,
그러므로 예수께 이때 이미 5-6인의 제자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갈릴리의
가나'
나사렛의 동북,
4-5마일(6-8km)의 곳에 있는 소촌이다.
사도 나다나엘 생육의 땅이다.
저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자'라고 그리스도에게 평된 것을 보아,
그 촌민(村民)이 얼마나 순박(simplicity)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의
어머니'
물론 마리아이다.
근면한 빈가의 주부.
구비(oral
tradition)에 의하면,
예수는 18세에 그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이고 보면,
이때 그녀는 과부로 된지 이미 13,
4년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
있었다'(거기 계셨다-한글역)는 것은,
가나의 촌에 마침 있었달지!
혹은 조력 위해 그 땅에 간 것으로 보아도 무관하리라.
'예수도
그 제자와
혼연에 초대되었다'(2)
소촌 가나의 혼연(marriage;
feast),
이는 왕후귀족(princes
and peors)의 연석과 다르다.
예수 이에 초대되어 기꺼이 갔다.
가서 그 희락을 돕기 위해서이다.
만약 신상 공리의 혼연 이었더라면 그는 결코 여기에 임석하지 않았으리라.
저 신상공리의 무리에게 귀빈의 아유(flattery)하는 바 있고,
악인(musician)의 악을 연주하는 일 있으며,
술이 모자라는 염려 없고,
따라서 예수께서 여기에 임석할 필요 없다.
세상의 주해자는,
예수가 이 잔치에 가신 것을 가지고서,
혼인의 신성을 인정하시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는 혼인의 신성을 인정하심보다는,
보다도 빈의 신성을 인정하시기 위해서였음을 이 한 가지를 마음에 두지 않고서,
전후 수절의 진의를 해득하기 어렵다.
'포도주가
모자라매, 어머니, 예수에게 이르시기를,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3)
빈자(貧者)의 연회,
헤아려 알고도 남는다.
아무리 예상외의 객을 청했대도,
곧 포도주가 떨어졌다니,
공핍(exhaustion)의 비애,
또한 추량할 수 있지 않으랴!
이는 가주의 치욕(disgrace),
만약 이것이 폭로 될 것이면 일좌 흥을 잃어,
가촉의 흥락(merriment)도 실의로서 끝나리라.
말씀 마시라.
이는 벽촌의 일소사일 뿐이라고.
(그러나) 가주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이는 종생의 일대사이다.
말씀 마시라.
하늘의 하나님은 서민(the
common people)의 사사로운 일에 동통(pain)을 느끼시지 않는다고.
그는,
혹 제왕의 대군이 위기에 처한 때 손가락 하나로도 이를 돕지 않는 일 있으리라.
하지만 죄 없는 촌민의 이 회합에 그는 그들 중에 계셔서 일대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랴!
'예수께서
그(어머니)에게 이르시기를,
여자여,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나이다'(4)
이것 그가 어머니에 대하는 말로서는 좀 무례한 말 같다.
어찌 어머님이라 않는가?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란
모자(母子)의 정으로서는 감내(endurance)키 어려운 말 아니랴!
옳다.
이는 예수가 범상(common)치 않은 주이신 증거의 하나이다.
마리아는 생모(生母)이다.
그러므로 그는 잘 그녀에게 '순종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녀의 구주이시다.
인류의 구주로서의 예수는 그 공직을 누구에게도 좌우 받을 것 아니다.
마리아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그 아들의 초자연적 능력을 사용할 것은 못된다.
그런데 그녀가 목전의 번극(pressure
of business)에 쫓겨,
그녀의 성자가 어떠한 인지(認知)를 잊어버리고,
그에게서 비상한 원조를 빌려 했다.
그는 물론 이것을 빌려 드리기에 인색할 것 없었다.
하지만 이를 행함에 있어서 그는 이 부드러운 견책의 말로서 그녀의 주의를 촉구했다.
'여자여'
(그리스어의 gunai 영어로 woman등과 같은 격렬한 말 아니다).
당신은 그저 내 어머니로만 생각하지 마소서,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를 압니다.
내게는 나의 천여의 공직 있어,
이는 사람의 사용할 것 아닙니다.
당신이 번극 중에 있대도 이것을 잊지 마소서라고.
예수에게 있어서 그렇다.
오인 평범인에게 있어서도 역시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지 않으랴!
오인도 역시 부모의 유체(body
handed down)일 뿐 아니다.
오인도 어떤 천직을 가지고서 이 세상엘 태어나온 자이다.
오인은 물론 가능한 한 오인의 부모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다.
오인은 사욕사분 때문에 그들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이 이제 30에 달하고,
대체로 오인의 공직을 자각하기에 이르러,
오인의 능력은 오인 자신 위해서만 사용할 것이 아님은 물론,
오인의 부모일지라도 그들의 편익(convenicnce)위해 오인을 사용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자녀는 우마기구와 달라 사유품이 아니다.
이는 양육의 임무를 가지고서 하나님께로부터 의탁된 것,
이미 그 하늘에서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때에 있어서는,
부모 된 자는 삼가 그 성직을 익찬 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진정한 효도란 부모의 명에 그저 복종하는 것만을 말함이 아니다.
오인이 오인의 천여의 공직에 충실하여 비로소 진정한 효자일 수 있다.
예수의 이 말씀,
오인의 경독심사 해야 할 일 아니랴!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나이다'
공공연하게 구주로서 세상에 나타나실 때를 말한다.
예수는 어머니의 원을 들으셨다.
하지만 그의 이번의 행위는 그를 제자들에게 나타내는 것으로 그치고 널리 그를 세상에 소개하는데 이르지 않았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향하여, 저(예수)가 너희에게
명하는 대로
하라고 일러두었다'(5)
예수의 그 어머니에 대한 말씀에 좀 보통과 다른 데가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인 마리아는 곧 그 아들의 진의를 알았다.
그녀(마리아)는 그가 비난의 말을 함과 동시에 그녀의 원의를 받아들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명하는데 이 말이 있었다.
'저
(예수)가 너희에게
명하는 대로하라'
내 아들의 하는 일에 틀리는 일(오류)없다.
그의 명대로 하라이다.
선량한 어머니여,
당신은 그 아들의 비난의 소리를 듣고서 노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믿어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명에 따르게 하셨도다.
세상에 당신 같은 어머니 있어서 진정한 효자는 있을 수 있었나이다.
아들의 진의를 살피는데 신속히,
또 그를 노하게 하는 일 없이
* 참조 (에베소서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 선을 격려하여 직분을 도우셨나이다.
원하기는 사리사욕으로서 충만 된 이 세상에 당신 같은 어머니가 많이 있으옵소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