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의 혼연(婚宴)
2
(내촌감삼의 주석에서)
요한복음 2장 5-11절 :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하인들'
그리스어의 diakonoi의 역자이다.
하복(manservant)또는 노복의 뜻 아니다.
교회의 집사도 후에는 이 이름으로 불렸다.
즉 일을 처리하는 자를 일컫는 것으로서,
이 경우에 있어서는 거들어 주는 사람(일꾼)을 가리켜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 안에 예수의 제자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것이다.
이것을 '하인'이라 읽으면,
가주(家主)의 빈(貧)을 헤아려 알기 어렵다.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4-5말들이의 돌
항아리 여섯,
거리에 놓여
있었는데, 예수 그들(일꾼)들에게 물을
항아리에 가득
채우라고 하시니,
그들이 아구까지
채웠다. 또 이것을
이제 떠서
가지고 가서,
잔치 맡은
이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했다'(6-8)
'결례대로'
유대인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청결을 좋아한(사랑한)
백성이다.
그들이 식전에 수족을 씻은 것을 성서가 가끔 기록한 바이다.
여기 말한 돌 항아리란 식전에 손을 씻기 위해 쓴 것이었으리라.
'4-5말들이의 돌
항아리'
조금 지나치게 큰 것 같다.
그리스어의 '1메트레테스 Imetretes'를 영량 8갈론 반(8
gallon-1 gallon은 약 4.
5리터)으로 어림잡아서의 계산이다.
고대의 도량권형(weights
and measures)을 오늘의 그것으로 환산함의 어려움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그들이
아구까지 채웠다…'
예수의 명명은 모두 행해졌다.
조수들은 그 무슨 때문인지를 몰랐다.
그것이 포도주로 변해지리라고는 물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바이다.
하지만 예수 자신은 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는 그가 이에 실시한 기적의 완전명료를 위해서이다.
'잔치를
맡은 자,
술로 변한
물을 맛보고,
그 어디에서
온 것을
몰랐다. 하지만 물을
떠낸 하인들은
알았다'(9)
'잔치를
맡은 자'
꼭 집 주인을 말함 아니고.
또 신랑 아님은 물론이다.
혼연에 있어서는 그런 것이 특별히 마련되었던 것이리라.
'술로
변한 물'
이때는 이미 물은 포도주로 변했다.
그것이 어떻게 변했는지 묻지를 마시라.
대저 이는 무익한 문제임으로이다.
물은 수소(hydrogen;
H.)와 산소(Oxygen;
O.)와의 화합물이다.
그리고 포도주에는 알코올(alchol)인 탄소물(carbon;
C)있고 당분 있고 지방 있고,
그 중에 또 질소물(Nitrogen;
N.)의 흔적(traces)마저 있다.
어찌 수소를 변하여 탄소질소로 되게 할 수 있는가?
망탄(a
lie), 미신,
화학의 법칙으로 돌아가,
가능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조소하는 자 많으리라.
하지만 '어떻게 해서'는,
오인이 여기서 공구 할 문제가 아니다.
과학의 진보는 아직 그 끝을 고하지 않았다.
모든 원소(디드춧)는 수소 또는 알미늄(Alminium)의 변형이라는 것은 일찍이 어떤 유력한 과학자가 주창한 것,
수소를 바꾸어 탄소를 함의 술이 발견될 때 없다고 오늘 단정하기는 어렵다.
요는 여기서 일대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즉 무미(無味)의 냉수가 곧 변하여,
감미로운 포도주로 되었다는 일,
이것이다.
잔치 맡은 이는 이것을 못보고 기뻐했다.
신랑신부는 이것 있어서 치욕을 면할 수 있었다.
객은 모두 이것을 상미(appreciation)하여 가주를 송양(admiration)했다.
일대자선적 기적은 행해졌다.
그리고 연석에 임한 이는 한 사람 남김없이 만족할 수 있었다.
회의자는 오인에게 물어 말한다.
'어찌하여서'인가고.
오인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한다.
'맛보라'고.
무위평범의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곧 유위비범인이 되자,
철학자와 비교종교학자는 놀라 말한다.
'어찌하여서'인가고.
그들은 순서(process)를 알지 못하면 결과를 믿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철학에 합하지 않는 사실이 아니면 사자가 갱생하는 일 있대도 이것도 믿지 않는 것이다.
'잔치를
맡은 이는…몰랐다. 하지만 물을
떠낸 사람은
알았다'.
마시는 자는 다만 그 맛을 아는데 그치고,
그것이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떻게 하여 만들어졌는지를 모른다.
하지만 물을 떠낸 자는 이것을 알았다.
전도에 종사하지 않는 자는 참회회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전의 방탕 자식이 지금은 근직(prudent)하여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로 된 것을 볼 뿐.
곧 예수의 명하심에 청종하고 곧 그에게 사역되지 않으면 그의 공적의 절대 함을 알지 못한다.
세상은 불과 그리스도교의 결과를 볼 뿐으로서 그 행동의 비결을 알지 못한다.
가련하다!
'잔치를
맡은 이가,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사람은
먼저 좋은
술을 내고,
술 취한
때, 나쁜 술을
내어놓는데, 그대는 좋은
술을 지금까지
두어 두었도다'(10)
주께 은혜 입은 자는 모두 그러하다.
먼저 나쁜 것 있고 뒤에 좋은 것 있다.
이것 우리들의 가지는 법과 세인의 가지는 법과 정반대이다.
황금시대를 약속한 정치가는 대개 타락패멸로서 끝나고,
앞서 평민주의를 주창한 자는 후에는 벌족(Clique;
clan)의 노복으로 되며,
희망으로서 교회와 선교사에게 환영된 청년은 오속에 침륜(sinking)하여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에 이른다.
희망으로서 시작하여 실의로서 끝난다.
용두(bright
beginning)에 사미(dull
finish),
세상만사 모두 이 같지 않은 것 없다.
하지만 주의 법은 전혀 이것과 다르다.
가령 그의 충복이었던 영국의 재상(the
prime minister) 고 글래드스턴(-9권 26역주)씨 같다.
그는,
청년시절 보수주의를 제창하고,
노년에 이르러 진보주의로 옮긴다.
또 영국의 무관왕 크롤웰(-2권 66역주)
같은 이다.
그는 국적(國賊)으로서 그 무덤 파헤쳐져,
그리고 300년 후의 오늘,
대 애국자로서 그의 국인의 마음에 존숭 된다.
일찍이는 교회를 허는 자로서 배척된 이가 후에는 이것을 세우기 위한 초석으로 된다.
전에는 사랑(jackal
and wolf)으로서 기피(evasion)되던 자가 후에는 성자로서 보인다.
먼저 좋은 것을 약속하는 자에게 주의하라.
대저 그는 속인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가까워짐을 따라서 향기를 발하는 일 많은 자,
이는 참으로 주께 축복 받은 자이다.
저 처음에 세상에 박수갈채로서 환영되는 자 같은 이는,
먼저는 좋은 술을 내어놓고 뒤에는 나쁜 술을 마시게 하는 무정불실의 가주와 같은 무리일 뿐.
'이것을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심은,
표적의 처음으로서,
그 영광을
드러내셨다. 제자, 그를 믿었다'(11)
'표적'
기적을 말함이다.
이것을 '표적'이라 함은,
기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기적은 불필요하다는 자는,
아직 기적,
그리스도,
둘 다 모르는 자이다.
'그
영광을 드러내셨다'
어떠한 영광인가?
왕후의 앞에서 드러낸 영광이 아니다.
인민의 세망(popularity)을 넓힌 영광이 아니다.
빈가의 연석(宴席)에 있어서 신랑신부를 치욕에서 구해 내기 위한
초천연적 행위로서 나타낸 이 영광,
이는 실로 하나님으로서의 행위이며.
또 그의 영광이 아니랴!
예수로서 만약 이 위공을 예루살렘인 헤롯의 궁전에서 올렸다면 이는 그에게 있어서 영광이 못 되었을 것이다.
영광은,
기적의 위대함보다도,
무릇 이것을 시행한 경우 여하에 있다.
그것이 대자비적 행위였기 때문에 영광은 이에 동반했다.
물론 포도주로 변한 것은 위적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것을 빈가의 혼연에 있어서 신랑신부에게 적면(blush)없게 하시렴에서 행하심으로서,
예수는 자신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지명하신 인류의 구주이심을 증명하시었다.
'제자,
그를 믿었다'
술을 맛본 이는,
연회장(잔치를 맡은 이)를 비롯하여,
신랑신부,
가주,
빈객 등,
그 수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물로서 술이 되게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는 겨우 그의 제자뿐이었다.
가련한 사람들이여,
술은 한 밤의 쾌락에 불과하다.
하지만 예수를 아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을 맛보고서 그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기적을 보는데 다만 실리의 한편에서 했다.
하지만도 어리석은 자는 그들에 그치지 않는다.
세인 대개 모두 그들의 유(類)일 뿐.
그들은 이 장대한 우주에 서식하며 그 실리에만 주목하고,
이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를 창조하신 것은 그의 성애를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 금은,
보옥,
곡류를 사랑하고,
이를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다.
말씀 마시라.
'우리가
만약 눈으로
기적을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천 번 백 번 기적을 목격해도 그를 믿지 않는 것이다.
먼저 믿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구하라.
그리하면 기적 아닌 우주의 대(大)기적을 보고 곧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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