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5일 화요일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 신성

(남성적 그리스도교)

 

요한복음 2 13-17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것을 기억하더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웠다. 예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서, , , 비둘기를 파는 바꾸는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새끼를 만들어, 그들 , 소를 성전에서 쫓아내며,

바꾸는 자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뒤엎으시며,

비둘기를 파는 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가져가라, 아버지의 집을 물건매매의 집으로 삼지 말라고.

제자들, 주의 집을 위한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고 기록된 것을 생각해 냈다'(요한복음 2:13-17)

(624 즈노하즈 자택에서)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그리스도는 자비 일방의 구주시라는 것은,

지금의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지는 일반적 감상입니다.

 

그리스도는 불쌍히 여기서는 ,

용서하시는 ,

그의 안중에는 다만 유서(pardoing),

연민(compassion) 눈물 있을 뿐이라는 것은,

대개의 그리스도 신자가 마음에 생각하시는 바입니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그리스도는 부인 같은 사람입니다.

 

'그대가 나를 귀히 여기는 사랑은 세상의 흔한 아니다.

부인의 사랑보다도 낫다' (사무엘하1:26)라는 것은,

 

신자 전체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품는 관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관념입니다.

그리스도는 부인 같은 구주는 아닙니다.

 

그가 약한 듯이 보인 것은,

그에게 비상히 강한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엄격한, 세찬, 굳은 사랑입니다.

 

성서를 읽고서 그리스도를 부인같이 아는 것은,

오해의 가장 것이라 하지 않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노하셨습니다.

종종 노하셨습니다.

 

그가 전도를 시작하심에 있어서,

이른 '처음 성전청결' 있었습니다.

 

전도를 끝마침에 있어서,

이른 '마지막 청결' 있었습니다.

 

( 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처음에는

 

'가라, 아버지의 집을 매매의 집으로 삼지 말라' 책망하시며,

 

바꾸는 ,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자를 성전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너희는 하나님의 전의 도적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보다 격렬한 말씀을 쓰시어,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경우에 있어서의 그리스도는 결코 유약한 구주는 아니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노를 나타내셨습니다.

 

실로 여호와의 집을 위한 열심이 그를 삼키기까지 노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완강(stbbornness) 바리새인을 보고 번이나 노하셨습니다.

 

'예수, 노를 가지시고 둘러보시고, 그들이 마음 완악함을 근심하시며'(마가복음 3:5) 라고.

 

그는 종종 그의 제자의 신앙의 둔함을 보고 안타깝도록 느끼시며,

노성을 발하셨습니다.

 

'아아, 믿음 없는 세상이다, 언제까지 내가, 너희를 참으랴!'(마가복음 9:19) .

 

이는 실로 인내가 이제 끊기려는 소리입니다.

특히 베드로가 주님의 구세의 사업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게끔 하려는 ,

그리스도의 노는 극도에 달하여,

그를 질타(scolding) 말씀하셨습니다.

(일본 역에 '경계하여'라고 있음은 지나치게 약합니다. '질타하여-꾸짖어'입니다)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마가복음 8:33)

 

매리(abuse),

질책(reproach) 말로서 이것보다 세찬 것은 없습니다.

 

자기의 제자를 사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때 예수는 베드로가 악마의 앞잡이(agent) 되어 그를 유혹하려 것을 세차게 노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는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노하셨습니다.

그는 노하는 그것으로서 나쁜일(악사)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더럽혀진 ,

공의가 무시된 ,

그는 노를 발하셨습니다.

 

노는 불의에 대한 사랑의 발분입니다.

하나님께 성스러운 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도 또한 노하심이 있음은 결코 괴이히 여길 못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

특히 지금의 그리스도 신자는 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노는 모두 그리스도교적 행위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들이라 해도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노합니다.

자기의 명예가 상처를 입는 ,

자기의 이익을 손상당하는 때에는 그들은 아주 노합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는(떠들며) 욕을 퍼붓기도 하고,

헐뜯기도 하며.

많은 간책(a sinister scheme) 써서 그들의 적을 넘어뜨리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 졌다고 해서,

타인의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해서,

사회의 공의가 유린당했다고 해서,

그들은 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은 지극히 냉정합니다.

그들은 노하는 것은 손해라고 합니다.

건강에 해가 있다고 합니다.

 

노하여 일이 이룩되지 못할 것을 말하여 냉정 인내를 권합니다.

 

여호와의 위한 열심은 그들을 삼키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공적 죄악에 대해서 극히 광량대도입니다.

 

지금의 사람이 죄를 증오하지 않음은 현저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떠나감과 동시에 그를 오해함과 동시에 죄의 됨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죄란 경우가 그렇게 만드는 바로서,

불쌍히 여길 것인지,

책할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절도는 빈이 그렇게 것이라 합니다.

간음은 자유연애가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죄악을 경우(a situation) 결과로서 설명해버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안중에는 죄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란 율법을 범하는 것임을 모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는 병의 일종입니다.

의지의 박약입니다.

 

불쌍히 여겨야 , 동정해야 것이지, 노해야 , 견책(rebuke)해야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그런 유약한 헐거운 관념을 가지게끔 했는가하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저명한 것은 이기심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죄를 책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죄를 책망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너희가 남을 비난(논의)하듯, 자신도 비난받을 것이다. 너희가 남을 헤아리는 대로, 자신도 헤아려질 것이다'(마태복음 7:11) 라는 말씀을

 

아주 천박하게 아주 이기적으로 해석하여,

남을 용서하며 자기의 죄도 용서 받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유서(pardoning)라는 것은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유서(용서) 교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 위해 구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공의까지 자기 위해 사용하려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 예화에 있는 슬기로운 불의 청지기 (관리인)같은 사람으로서,

주인(하나님) 대금은 모두 이것을 부채자에게 용서해 주고 자기가 세상에 입신할 때의 편의(convenience) 소용(sere)하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사람의 죄에 대한 방종한 관념은 모두 이것을 그들의 이기심에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애독하는 근세문학이 일에 크게 세력 있음은 이것 역시 부인할 없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한 관대의 태도는 근세문학의 특질입니다.

괴테(-1 107역주) 극작,

졸라의 소설,

기타 이들 소위 문호의 흐름을 따르는 문학은 가지 일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 이들은 모두 성서가 죄를 보는 같이는 이것을 보지 않습니다.

*내촌감삼의 주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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