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성 경:
[요 3:22-26]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주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침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 3: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주시더라
▶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 메시야에 대해 냉담한
예루살렘 도시를 떠나 유대 지경 내의 변두리 마을로
물러가신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곳이 요단 강 근처의 평야이거나 아니면 여리고 근접한 지점일 것으로 추정된다.
▶ 침례를 주시더라
- 예수께서 침례(baptizing)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사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는데
예수께서는 친히 침례 요한의 증거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셨으며
또 침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열렬히 따르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러운 과도기적 수단으로서 침례 요한식
침례를 긍정적으로 허용하셨으리라 이해된다.
한편 예수께서 몸소 침례를 베풀지 않고
제자들에게 대행시킨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제자화 훈련(弟子化 訓練)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3: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
▶ 살렘 가까운
애논 - 이 두 지명이 현재의 어느 위치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살렘'(Salim)은 '평화'라고 하는 셈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지명이며,
'애논'(Aenon)은 '샘'이라고 하는 아람어의 복수형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이 지명들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1) 베레아 지역 요단강 건너편으로 보는 견해.
우리가 알다시피 침례 요한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28 이 일은
요한의 침례
주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2)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남방 8마일 지점
즉 요단 계곡의 동쪽으로 보는 견해(4세기의 유세비우스).
(3) 세겜으로부터 동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곳에
옛부터 알려졌던 '살림'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8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 '아이눈'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애논'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
비록 현재 이곳은 물이 전혀 없지만
과거에는 많은 샘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Albright)
(4) 또한 1세기 초기에는 '살렘'이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Cheyne).
한편 크리거(Krieger)는 저자의 확실치 않은 지리적 보고(報告)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즉 요한의 침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지만
그러한 평화를 제공하지는 못하는 반면
예수의 침례는 구원과 평화(살렘)의 샘(애논)이
펑펑 솟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요 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이는 저자와 당시의 직접적 목격자들이 침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저자가 침례 요한의 투옥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공관복음서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
및 요한의 관심사가 예수의 사역에 보다 밀도 있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본서에서 침례 요한이 등장하는 유일한 의의는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한편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지 않는 내용
즉 침례 요한과 예수의 동시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요한이 투옥되고 갈릴리에서의 공적인 등장이 있기 이전에
초기에 유대 지방에서 전도 사역을 행하셨던 셈이다.
[요 3: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淨潔)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논쟁(argument)이 유대인들이 행하는 일반적인 정결 예식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결 예식에 반대하여
요한과 예수가 행하는 침례에 관한 것인지
또는 요한과 예수가 각자 따로 행하는 침례에 관한 것인지 명확지 않다.
한편 '변론'의 내용도
요한의 제자는 유대인과 더불어
침례 요한이 주는 침례의 의의와 효력에 대해서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그리고 예수가 행하시는 침례와 비교하여 변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침례 요한의 침례와 예수의(제자들의)
침례 중
어느 것이 더 확실한 근거를 가질 것인가에 관한 변론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요 3: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침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고 하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를 깎아 내리고자하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요단강 저편인 베다니에서 침례 요한은
예수의 메시야 이심을 증거 하였고,
(1:19-28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자라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의 침례
주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또한 예수께 침례를 베풀었다.
(마 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신대).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침례 요한에게 빚을 진 자요,
감사해야 할 자였지만
도리어 침례 요한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경쟁자로 나선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결례(缺禮)에 대한 논쟁을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논쟁거리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불평과 비난으로 변화되었다.
▶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
- 역시 예수의 이름을 피하고 있다.
'증거하다'는 현재 완료로서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된
침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침례 요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해 왔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 침례를 주매
- 원문에는 이 말 앞에 '보라',
'보옵소서'의 뜻인
헬라어 감탄사 '이데'가 붙어 있다.
이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혹은 그의 제자들이)가 침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분노하고 흥분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그에게로 가더이다
- 이는 '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
막 1:45;
3:7은 갈릴리 사역 동안의 예수의 호소(呼訴)가
(막 1: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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