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일 일요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예수의 시험 받으심 3

 

성 경: [4:9-13]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4: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

 

마귀는 세 번째 시험을 위해서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데 마태는 이 시험을 두 번째로 제시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다.

 

(4:5-7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것은 누가가 예루살렘 성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험이 의도하는 바는

예수의 자기 과시욕을 부추켜 그러한 저급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꼭대기'라는 말의 헬라어 '프테뤼기온'

'날개'라는 뜻의 '프테류스'에서 온 말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요세푸스(Jos, Antiq. 15, P. 411)에 의하면

이는 성전 바깥뜰 남쪽에 있는 주광을 뜻한다고 한다.

 

(2) 예레미야스(J. Jeremias)에 따르면

이는 성전문 위로 가로지르는 인방(lintel)이라고 한다.

 

(3) 게르하드슨(B. Gerhardson, Testing Gods son, P. 54)에 따르면

91:4(LXX은 제 90)'프테뤼가스'(날개들)와 본문 9절의

'프테뤼기온'(꼭대기) 사이에는

일종의 언어적 유희가 있다고 하며 이를 일종의

성전을 보호해 주는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

 

이중 어떠한 견해를 취해본 구절을 이해하든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결국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끌고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랍비 문헌에 보면

메시야가 성전의 꼭대기에 나타날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비록 랍비문헌에는 뛰어내린다는 언급은 없지만

마귀는 그러한 배경에서 이 시험을 예수께 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4: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 이 시험에서

마귀는 성경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구약성경들을 잘못되게 인용한다.

 

(91:11-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어떤 성경구절들을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마귀의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마귀는 시 91:11, 12을 인용하면서 고의적으로

'네 모든 길에서'라는 구절을 빼버렸다.

 

게다가 여기에 인용된 시편은 택한 백성을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것이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섭리를 방해하는 일이나

충동적으로 위험에 뛰어드는 일을 용서하시지 않으시고

엄히 징계하신다고 가르쳤지만,

 

(6: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18: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마귀는 이런 진리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성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한 신앙을 변색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게 만들고

거짓 종들을 통해 그 말씀을 왜곡시킨다.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고후 2: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사실 세계 도처에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허다한 이단들은

성경을 그들의 경전으로 내세우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이 성경 말씀을

자신의 거짓된 사상을 세우고 은폐시키려는 목적에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짜 맞춘다는데 있는 것이다.

 

 

[4:11-12]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 예수의 대답은 다시 성경의 인용으로 주어진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맛사에서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시험했을 때를

 

(17:1-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배경으로 하는 신 6:16을 인용한 것이다.

 

(6: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만약 예수가 마귀의 시험에 응한다면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그릇된 표적을 구하는 셈이 되어

하나님을 격분(激忿)케 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여기에서도 마귀는

하나님과 예수와의 신실한 관계를 공격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사단의 시험에 대한

결론적 말씀이라 할 수 있는 본 구절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예수의 굳은 결의를 보여준다.

 

 

성 경: [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

 

사단은 모든 공격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갖은 방법을 다하였으나 실패했다.

결국 마귀는 얼마 동안 예수의 곁을 떠났다.

 

콘첼만(Conzelmann)

 

'얼마 동안'(until an opportune time,)의 기간을

22:3까지라고 이야기한다.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 22:3에서 마귀가 다시 나타나 예수의 수난을 야기시키나

그 전까지는 사단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Conzelmann, Theology of Luke, P. 38).

 

그러나 브라운(Brown)

본서를 살펴보면 사단이 예수의 전생애 동안에 역사했다고 주장한다.

(Schuyler Brown, Apostasy and Perseverance).

 

예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으로는 사단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중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승리가 가져다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

 

결국 사단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 예수의 복음 사명이

최종적 성취를 보게 되리라는 점을 암시하는 복선적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 있어서의 사단과의 싸움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함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누가는 시험이 끝난 후에 천사들이

예수를 수종들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1: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이것은 각 제자간의 저작 목적에 따른 시각 차이이겠으나

누가는 예수께서 홀로 힘든 시험을 이겨내신 사실을

보다 강조해 보이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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