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7일 금요일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신구의 단절

 

누가복음 61-1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예수와 당시의 종교가와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상위(difference)가 있었음이 차츰 명백해졌다.

그리고 이 격리(isolation; gap)는 마침내

안식일 문제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누가복음 제6장은 갈릴리 전도의 분사형(분계)이다.

예수와 그들과의 사교는 여기서 단절했던 것이다.

 

안식일은 당시의 종교가 특히 바리새인이 가장 중대시 한 것이었다.

이 날을 지키기 위해서는 갖가지 행위가 금지되었다.

 

혹은 8정보(1정은 약109m) 이상의 거리를 걷지 말라하고,

혹은 병자를 치료치 말라든가,

혹은 밀보리()를 수확하지 말라는 등의

조항이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들 조항을 엄수하지 않으면 좋은 신자로서 인정되지 못했다.

실로 안식일에 관한 관념 중에 당시 사람의 모든 사상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예수의 태도 여하에 따라,

그들과 그들과의 상위는 절연(완연) 분별되는 것이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 그 제자를 데리시고 밀밭을 지나가셨다.

그 때, 제자, 밀 이삭을 잘라, 이것을 손으로 비벼 먹었다.

그런데 당시 이미 그의 신변에 첩자(spy) 따라 다니는 바 있었고,

무슨 사건이나 있을까 하여 주목을 게을리 하지 않던 때이매,

이것을 발견하여 기화(기회) 놓칠세라, 곧 힐책(reproach)하여 말했다.

 

'당신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은 어찜인가'(2일역).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것은 아주 대답했을 뿐 아니라,

모독적으로까지 들리는 말이었다.

 

그는 말씀하셨던 것이다.

 

'다윗 및 함께 한 자가 주렸을 때 한 것을 아직 읽지 못했는가'(3일역).

 

또 말하기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5일역).

 

즉 다윗에게 좋았던 것은 내게도 좋은 것이다.

나는 다윗 이상의 사람이다.

또 나는 안식일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인자는 율법 이상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듣고서 바리새의 무리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의 조선(祖先) ,

가장 존경되는 다윗 이상이라고 일컫는 자는 누구인가?

더구나 스스로 참람 되게 감히 율법 이상의 사람이라고 함에 있어서야!

그들은 거의 노하는 것으로도 족하지 못함을 느꼈다.

 

* 참조 : (사무엘상 21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7)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8)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9) 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

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는 때,

손 오그라진(마른) 사람이 있었다.

열좌(열석)한 자들,

적과 함께 예수 반드시 이것을 못 본 채 않으시리라 예상했다.

 

다만 의문은, 이것을 오늘 고칠 것일지,

혹은 안식일이 끝나기까지 기다릴 것일지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행하는 선에 무게를 두지 않고서,

다만 거기에 무슨 비난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까 애썼다.

예수는 물론 그 의중을 살펴 아셨다.

그리고 인자가 안식일에도 주()이신 것을 나타내기 위해 좋은 시기임을 느끼셨다.

여기서 그는 병자에게 명하여 좌석 중앙에 서게 하시고 문제를 제출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묻고자 한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과,

또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과 어느 것을 행할 것인가'(9일역).

 

이는 애당초 상식에 비추어 명료한 문제이다.

따라서 그들은 대답해야 할 말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일은 의론만으로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는 마침내 뭇 사람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손을 펴게 하시니,

손은 완전하게 나았던 것이다.

그는 그리하여 명백한 실물교육을 베푸셨다.

이에 이르러 안식일에 관한 사상의 상위가 현저해졌을 뿐 아니라,

예수의 복음과 그들의 가르침과의 사이에

전연 조화의 여지없음이 표명된 것이다.

 

무릇 위인은 최초부터 급진가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보수가이다.

하지만 점차 세인과 접촉하여

그 오류(a mistake)를 감지(preception)함에 따라,

피아(피차 he and I)의 중시하는 바가 전연 전도(반대) 됨을 발견하고,

그리고 융화(화합)하려 하나, 종내 융화할 수 없음에 이르러,

부득불 개혁의 기치(태도표시)를 수립하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글래트스턴(926역주)같은 이도 그러했다.

그가 만년은 거의 사회주의에 가까운 진보적 사상을 가졌다 해도,

그 대학 시대에 있어서는 아주 보수적인 청년이었다.

보수가는 결코 즐겨 반대의 소리를 발하지 않는다.

 

오인의 무교회주의 같은 것 역시 이에 따른 것이다.

오인도 또한 최초는 교회 또는 감독의 친구였다.

하지만 그들이 소중히 하는 바는 오인이 경히 여기는 것,

오인이 가장 중시하는 바는 도리어 그들의 돌아보지 않는바 됨을 알 때,

그들과 오인과의 일치는 깨뜨려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인은 일찍이 어느 감독의 초대에 응하여 회견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오인은 그의 교회에 속한 한 부인의 구원문제에 대하여

감독의 의견을 타진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감독은 대답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인데, 어찌 한 부인의 구원에 관여할 수 있으랴.

 

그리고 감독이 오인에게 시도하려는 바는,

혹은 성서의 독법이었다.

혹은 전도지원자의 허가 방침이었다.

 

그들의 하는 바는 대개 그런 것이었다.

근간, 성공회에 있어서 성찬식용 승복의 종류에 관하여,

또 성찬식 당일의 아침에 있어서의 식사(taking a meal)의 가부에 관하여,

대 문제를 야기했다고 듣는다.

이래서 신자의 공동을 주창해도 무리한 주문이다.

 

일치는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위선이다.

한가지로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그 실질에 있어서 전연 이질이라면 서로 손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예수도 또 당초는 관례에 따라

성전 참예(예루살렘 상경)를 하여 안식일도 지키셨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허다한 경험에 의해, 바리새의 무리들이,

그저 묵은 육체(a body)를 중히 여기고,

도저히 새로운 생명을 받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자들임을 간파하셨다.

 

그들이 구하고 물리치는 바는 마치 예수의 그것과 정반대임을 감지하셨다.

여기서 이제는 단연 그들과 분리(leave-taking; farewell)를 하신 것이다.

 

그는 이때,

아주 절실하게 자기의 고독을 느끼셨으리라.

그는 혼자서 산에 들어가,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여기서

신사회의 창조를 시작하셨다.

 

12사도의 선정 즉 이것이다.

묵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도모했다.

예수의 갈릴리 선도의 분수령(분계)은 여기에 있었다.

 

저 마태복음에 있어서의 이른바 산상의 수훈은,

이 사도선정의 사실에 뒤따른 일이다.

 

(20이하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그러므로 그것이 누구에게 향하여 말씀된 교훈인지는 절로 명백하다.

 

산상의 수훈은 결코 만인이 실행할 수 있는 도덕은 아니다.

이는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적용할 지고의 도덕이다.

 

새로운 그리스도단의 발전 이룩되어,

그런 후에 산상의 수훈은 내렸던 것이다.

(34,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19174'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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