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4일 화요일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세리의 성소(聖召)

 

누가복음 5:27-39: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예수는 그 제자를 선정(選定)하심에 있어서,

이것을 종교계에서 하지 않고 보통인 사이에서 하셨다.

이것은 이미 바리새인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challenge)이었다.

그 후 그는 2회의 기적으로서 적을 만드셨다.

 

그런데 이제 세리 레위를 그 제자로 선정하심에 이르러,

그 충돌은 마침내 그 도를 더했던 것이다.

 

레위란 누구인가?

마태복음 99절에 의하면 마태라고 있음으로서,

아마도 마태복음의 필자인 마태를 말함이리라.

 

(마태복음 9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어찌하여 레위를 마태라고 이름 불렀는지 분명치 않지 만도,

마태란 '하나님의 은사'란 뜻이므로,

마치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른 것 같이,

이 귀한 제자를 얻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후에 마태라고 부르신 것이리라.

 

레위, 그는 하나의 세리였다.

세리라고 해도, 오늘의 그것과 크게 내용을 달리한다.

 

당시는 본시 세법의 규정 있을 리 없고,

징세(수세 tax collection)는 일종의 청부(도급 contract) 일이었다.

 

즉 토지를 구획(section)하여,

그 구역 내의 납세액을 입찰(경쟁계약 tender)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리는 정부에서 징세의 특허를 받은 자로서,

그 계약한 납액 이상을 징수하면 그것만큼 자기의 이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수렴(과중세금징수)을 일삼는 것은 자연의 추이였다.

오늘날, 일정한 세법 하에 징세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세리들마저,

인민에게서 악감으로서 대하여 지는 일 심한데,

하물며 이들 옛날의 세리가 악인시(abominating)됨은 괴이하게 여길 바 못된다.

 

특히 유다의 세리는 로마 정부의 관리인 까닭에,

유다인으로서 세리 된 자는 국적 또는 매국노로서 지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레위는 실로 그러한 세리의 한 사람이었다.

 

'이 후 예수께서 나가서, 레위라 하는 세리 세관 앞에 앉아 있음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레위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따르니라'(27일역)고 있다.

 

'보시고''응시하고'의 뜻인데,

모름지기 레위도 또 이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따른 것은 아니리라.

이미 몇 번이나 예수의 설교를 듣고,

예수도 또 레위의 인물을 인지(recognition)하고 계셨던 것이리라.

 

그리고 이때 드디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소명을 받아,

곧 응하여 일어났던 것이리라.

 

레위인 마태는 오늘의 이른 바 속리에 지나지 않았다.

속리는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일종의 기계이다.

양심 없고, 견식 있는 것 아니고,

인생문제 같은 것은 그에게 있어서 풍마우(風馬牛)이다.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관계인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속리(俗吏)이다. 그리고 세리는 속리풍의 속리였다.

 

특히 레위는 외국인의 하역(하급공사)인 세리였다.

그런데 이제 그를 불러 그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의 행동은 대담하기 그지없는 극이었다.

 

다만 바리새, 사두개인 뿐 아니라

유다인 일반의 감정에 저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선정은 본시부터 틀리지 않았다.

속리 사이에도 귀한 인물 있다.

마태는 실로 예수의 후사를 맡기기에 족한 사람이었다.

 

그는 후에 무슨 일을 했는지, 꼭 명백하지는 않다고 해도,

마태복음의 대부분이 그의 붓(pen)으로 된 것임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는 12사도 중에 있어서 서기역을 하고,

언제나 스승의 뒤를 따르며 기록을 했던 것이리라.

마태복음이 숫자의 기재를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은 그 특징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금전의 셈(reckoning)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리라는 것은

필경 유력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마태는 바울 또는 베드로처럼 외면적으로 장렬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해도,

고요히 복음을 전한 귀한 제자의 한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세리 마태의 선정은 확실히 위대한 선정이었다.

 

하지만 가장 쾌심(satisfaction)을 가지게 하는 것은,

선정된 후의 마태의 행동이다. 그는 현직을 집어 던지고,

전부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려고 하는데 있어서,

성대한 별리(작별)의 연을 열어, 동료를 모두 부르고 새로운 스승의 임석을 청하여,

그리고서 공공연하게, 신앙의 발표를 했던 것이다.

 

자리에 열석한 자는 다수의 속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다.

 

이 사이에서, 어제까지의 세리,

오늘부터의 사도 마태, 의기앙연(triumphant),

그 귀한 스승을 구동료에게 소개하고,

포도주를 따라 자기 신생활의 출발을 축하했으리라.

실로 통쾌한 주연(a banquet)이다.

그리스도는 본시부터 속리의 연석에 참석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때는 마태의 용기를 치하하여 기꺼이 출석하셨으리라.

그런데 그 향연 중 이미 충돌은 시작되었다.

 

학자와 바리새인, 예수의 제자에게 대하여 원언(불평 complaint)

발하여 이르기를

 

'당신들은 세리 또는 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음식 함은 어찜인가'(30일역).

 

'세리 즉 죄인과 함께', '속리 더구나 매국노와 함께'라고 한 것이다.

이 반대론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다만 병 있는 자만이 이를 구한다'(31일역).

 

이는 한편으로는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또 풍자이다.

말은 간단하다 해도, 모두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데가 있었다.

이것을 받는 사람의 심정 여하에 따라, 혹은 깊게, 혹은 얕게,

혹은 동정의 말로서 혹은 반어(풍자-비꼼 irony)로서 들리는 것이었다.

 

다음 제2의 반대가 생겨났다.

'종교가는 음식을 절제하고 단식을 해야 할 것인데,

당신들은 미식을 취하면서 삼가지 않는 것은 어찌함인가'.

 

그러한 유전(mistaken idea)은 오늘날도 또한 가끔 귀로 듣는 바이다.

그리고 보통의 종교가라는 이는 실로 이것을 가장하는 것이다.

 

조의, 조식, 폐옥, 누거(a poor cottage), 이로써 중우(the mob)의 상찬을 받는다.

바리새의 무리가 그것이었다. 침례 요한까지도 그런 유였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말씀하셨다.

 

'신랑의 친구들이,

그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이에 단식(금식)을 하게 할 수 있으랴?

뒤에 신랑과 헤어질 날 이르리라.

그 날에는 단식(금식)해야 할 것이다'(34-35일역)라고.

 

필경 당시의 습관으로서,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을 신부에게 빼앗긴 슬픔을 표시하기 위해 단식(금식)을 한 것이리라.

예수는 그 예를 가져다가 가르친 것이다.

 

'지금은 신랑의 친구들 아직 신랑과 함께 있는 때이다. 그러한 때에 어찌 특별히 단식(금식)을 할 필요 있으랴. 그러나 뒤에 때가 오는 것이다. 신랑이 그 친구를 버리고 떠나갈 때가 오는 것이다. 그때야말로 단식(금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단식(금식), 이것을 규칙으로서 할 것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경우에는 오히려 감사하며 받아야 할 것이다.

의식주의 외측의 일, 이로서 신앙을 증감케 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단식(금식)하는 데는 절로 때가 있다. 뒤에 때가 오자,

예수는 이 세상의 종교가의 맛볼 수 없는 고난의 잔을 남김없이 다 마셨던 것이다.

그는 이미 그 전도의 시초부터 십자가를 전도에 바라셨다.

그리고 이는 참으로 단식(금식)해야 할 날이었던 것이다.

이에 이르러 바리새인들은 이미 대답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예수는 다시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I. '새 옷을 베어 낡은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렇게 하면, 새 옷도 못쓰게 하고, 또 새 것에서 취한 조각()은 낡은 것에도 맞지 않을 것이다.'(36일역)라고.

 

이는 보통 부인이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종교가, 신학자는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의 새로운 복음을 가져다가 낡은 도덕에 대어 맞추려 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무언가?

 

복음은 이것을 받고자 한다.

그러면서 율법도 이것을 차마 버릴 수가 없다.

여기서 미봉(감시변통 temporizing)을 시도하여,

누에(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를 작출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생명인 복음은 도저히 낡은 규칙 또는 의식의 유()와 조화하지 않는다.

이것을 억지로 접합(union; joining)시키려 하면 곧 쌍방의 파괴로 끝나는 것이다.

교회의 존재가 언제나 위태한 것은 이것 때문이다.

복음은 복음으로서 이것을 말하게 (풀이하게끔)하라.

 

'만약 은혜로 된 것이라면 행위에 의하지 않는다. 만약 행위로 된 것이라면 은혜가 아니다'(로마서11:6일역)고 바울은 말했다.

복음과 율법은 양립할 것 아니다.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 없다. 만약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는 그 부대를 터뜨려, 새어 나오게 된다. 그리고 가죽부대는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만이 둘 다 보존하리라'(37-38일역).

 

가죽부대란 산양의 위의 장부(the viscera)를 베어내서 건제(乾製)한 것을 말한다.

그 이미 팽창하여 버린 낡은 가죽 부대에 새 술을 넣으면,

술은 계속 발효를 하는 까닭에 부대를 터뜨리기에 이르는 것이다.

 

예수는 이 비유로서 복음의 팽창성을 가르쳤다.

 

새 포도주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복음이다.

언제나 팽창해 가고 있는 생명이다.

 

낡은 가죽부대란 무엇인가?

규칙으로 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는 바리새인의 신학이다.

또 오늘날 우리나라의 종교가, 교육가의 무리이다.

 

새로운 가죽부대란 무엇인가?

자유로운 생명을 가득히 채운 레위(마태), 베드로, 요한 등의 세 제자이다.

복음을 맡길 곳은 이에 있을 뿐,

이것을 낡은 가죽 부대에 맡길 것인가

복음도 가죽부대도 함께 파괴할 것 밖에 없는 것이다.

 

 

. 이들 두 가지 비유를 말하시고, 예수는 다시 일어를 부가하기를 바라셨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곧 새 포도주를 원하는 자는 없다. 이는 묵은 것이 아주 좋다하기 때문이다'(39일역)라고.

 

그는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를 배척하시면서

또한 그들에 대하여 깊은 동정을 해 마지않으셨다.

즉 몸소 포도주의 잔을 손에 드시고서

일종의 엄숙한 해학을 섞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리라.

 

'너희가 지금 내 복음을 받지 않는데서, 나는 이것을 책하지 않는다. 묵은 술을 좋아하는 자가 새술을 받아 그 자리에서 이것을 마시려고 하지 않는 것은 실로 인정이다. 하지만, 너희도 또한 후에 내게 수종 할 날이 있으리라. 이제 잠시 구를 구로 하면서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라'.

 

이는 깊은 동정의 말씀이다.

스스로 지키는데 엄격하신 예수께서,

사람을 기다리는데 얼마나 관대하신가를 보라.

 

'노인에 대한 전도'는 언제나 이 정신으로서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레위(마태)의 집에 있어서의 하룻저녁의 향연(banquet),

영구한 진리를 전하는 기회로 되었다.

 

초청한 레위, 초청 받은 동료, 기꺼이 임석 하신 예수 및 그 제자,

그리고 반대론 있고, 예수의 의미 심원한 답변과 비유가 있고,

최후에 노인에 대해서까지도 동정의 일언을 부가하셨다.

이것을 얽어서 하나로 만들면 참으로 한 폭의 그림이다.

불과 30분을 초과하지 않으신 회화 중에,

누가 그렇듯 인생의 깊은 곳에 저촉하여

정의와 용기와 철학과 시를 모두 갖추지 않은 바 없는

귀한 말을 발할 수 있으랴! (218일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19174'성서지연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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