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30일 월요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평지 수훈

 

성 경: [6:20-22]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눈을 들어 - 이같은 표현은 마 5:2'입을 열어'라는 말과 비교된다.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두 복음서 모두 어떤 한 행동을 취하기 전 예비 동작을 갖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예비동작의 표현은 그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달해 주며 동작의 주체자의 의지적이고 결단력 있는 모습이나

엄숙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의 평행 구절에서는

'가난한 자'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두 복음서 간의 표현상의 차이점에 대해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들이 있다.

그러나 설령 두 복음서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한다 해도

두 표현 간의 의미상에 큰 변화는 없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그들은 항상 예수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또 항상 예수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가난의 문제는 하늘의 복으로만 영원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실제로 예수 앞에 몰려온 자들을 보면,

부자들과 권세가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문자 그대로

빈곤한자요 병약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특히 누가는 이러한 사회적 소외층들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이 복되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 앞에 의지하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을 나타내는 헬라어 '프토코스'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대 가난을 의미한다.

 

특히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경제적인 면에서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사람들로서

압제를 당한다 해도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때때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외적인 고통과는 별개로 '경건한 사람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경건한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고통 받는 자' 또는 '가난한 자'로 묘사된다.

 

(4: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따라서 여기서 나타난 '가난한 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 마태복음 평행 구절의 '천국'이라는 표현과

비교되는데 그 뜻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향해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여

'천국'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바실레이아)란 구약의 용어로는 '말쿠트'인데,

이 말은 본래 왕의 지위, 왕의 권위, 왕이 행사하는 통치권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예수는 이 단어를 '바로 지금 이곳'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나타내는 말로 자주 사용하셨다.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표현한 바에 의하면 이 말은

현재적이며 또한 미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통치는 믿음이 수반되는 곳에 '바로 지금' 임할 뿐 아니라

장차 주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그 통치가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그 나라가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것임이요 - '너희 것이 될 것이요'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가난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already)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not yet)은 완성되지 못한 축복의 영역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들은 주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복음의 평행 구절은 이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 표현하여 영적 의미를 강조한다.

 

'주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논테스'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

일시적인 주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리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영적인 것에 항상 주려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죄 용서를 구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이러할 때 주려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실 것이다.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 육체적 주림이 해결된다 해서

영적인 주림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영혼의 주림이다.

 

육체적 주림은 이 땅에서 음식물로서 배가 부를 수가 있지만

영적인 주림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배부를 수가 없다.

 

이러한 영혼의 기갈 상태에 관하여 아모스 선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대언한 바 있다(8:11).

 

'배부름을 얻다'는 것은 능동적인 획득의 의미가 아니라

미래 수동태로 쓰인 것으로 주님의 주도적인 은혜에

의해서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클라이오'('울다')는 통곡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도 현재 분사로서 지속적인 상태를 암시한다.

 

마태는 이를 '애통하는'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성도들이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나와야 할 뿐 아니라

주 앞에서 죄인인 것을 통회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한다.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마태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5:4)라고 했다.

 

여기에서의 웃음은 영적인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천국의 특성을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규정한 것과 비교해 보라.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6: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인자로 말미암아 - '인자'(투 휘우 투 안드로푸)는 본서 중,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예수의 칭호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반적인 칭호였다.

 

(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11: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17: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아들(인자)이셨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 자신 때문에'라는 의미로

 

'너희가 나를 인자 메시야로 믿고, 나를 고백하고, 나의 복음을 전파하고 나의 제자들로서 나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마태는 이 문구를 '나를 인하여'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이 칭호와 관련되는 의미를 상세히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자'라는 칭호를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것은

그의 신인적(神人的) 본질에 대한 중요한 시사이다.

 

 

(1) 인자는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의미한다.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가 그의 메시야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을 때,

 

(17: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을 정치적, 군사적인 의미로 이해했으므로

이 말을 당신께 적용하기를 삼가셨다.

 

 

(2)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인자란 말과 연결된다.

인자는 인간의 형체를 띠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오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신인적인 성육신의 본성은 그의 사역 활동의 목적과 성격을 반영한다.

 

 

(3) 인자는 그리스도가 온전히 구원의 승리를 거두신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용어이다.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의 부활 및 승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이 대속적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

그리고 완성으로서의 승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이

완전히 승리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기 위해

예수는 인자의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셨다.

 

(4)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Lordship)을 나타낸다.

 

(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은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부탁의 말씀과

사도행전 1:8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5)인자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자 되심을 의미한다.

 

(13:41-42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그리스도는 만민의 재판관으로 군림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육신을 통해서 모든 인간과 동등하게 되었으면서

여전히 신성을 간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 기독교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로 점철(點綴)되어 있다.

곧 피로 얼룩진 역사라 할 수 있다.

이 박해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박해는 계속 있을 것이라고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바이다.

 

이 박해는 참 신앙인과 거짓 신자를 구별 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연단을 가져다주고 믿음의 인내를 가르쳐 준다.

 

사도행전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박해가 있을 때

교회는 내적으로 충실했고, 선교는 더욱 활발했다.

따라서 박해를 이기고 난 뒤의 결과는 영광과 기쁨의 승리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멀리하다'(아포리조)

'경계를 구분하다'는 의미인데 이 말은 사회적 교제 관계에서

소외되는 것을 나타내었다.

 

또한 '버리다'(에크발로)는 연극배우를 무대에서

쫓아내는 것에 대해 사용한 단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악하다 하여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종종 있었듯이 경멸과 조소거리가 되어

마침내는 투옥이나 재판,

사형에까지 이르도록 버림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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