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6일 목요일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손 마른 자를 고치심

 

성 경: [6:6-11]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6: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또 다른 안식일에 -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의 준수가 엄격한 형식적 규정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을 제시하신다.

 

이 구절에서 '다른 안식일'이란 반드시 그다음 안식일로 볼 필요는 없다.

누가가 이 부분에서 의도하는 바는 어느 안식일이냐가 아니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어떤 사람의 오른손을 고쳤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 예수께서 자주 드나드시던 가버나움의 회당인 것 같다.

 

예수께서는 기회있을 때마다 회당이나 성전이나 노천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공관복음 전체에 걸쳐 입증된다.

 

(21: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1: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오른손 마른 사람 - '오른손'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곳은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 가운데서 오직 여기 뿐이다.

 

이는 여러 방향에서 유추가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저자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전문가적인 직업의식에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문 의사로서 환자의 정확한 병명과 정확한 환부(患部)

상태를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그 진찰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사례 수집이라는 차원에서 관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환자의 마른 손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었다는 것은

이 환자의 상항이 보다 심각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 환자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손으로 생계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었다면

일반적인 대부분의 오른손잡이처럼 오른손의 마비는

그에게 치명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서는 보도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 환자에게 그간 손이 말라 있었던 기간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기간이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서기관과 바리새인 - 서기관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제사장 계층에서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율법이 모든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으며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등장한 서기관들은 문필가로서 이스라엘의

성문서를 해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수집하는 데에도 몰두하였다.

 

게다가 이들은 필사자들, 편집자들 그리고 성경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자들로서 사람들의 대단한 신망과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헬라의 세속 문화로부터 유대교를

순수히 보존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마카비 시대 때 생겨난

소위 '하시딤' 혹은 '하시디안'이라는 경건 집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의 선한 동기와는 무관하게 날이 갈수록

형식과 위선에 치우치게 되었다.

 

한편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앞서 안식일 논쟁에서 패배하고

예수의 정곡(正鵠)을 찌르는 지적으로 인해 망신을 당했던 터라

예수를 궁지에 빠뜨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엿보니(파레테룬토) -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동안에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이 엿보고 있었던 것은 송사할 구실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행동은, 오늘날 성경을 보되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를 헐뜯을 근거를 찾기 위해서

말씀과 씨름하는 자들의 사악한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공히 예수나 성경 말씀에 대해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방 일변도로 흐르게 마련이다.

 

 

[6: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라고 한다.(3:5).

 

따라서 '저희 생각'이란 예수를 궁지에 빠뜨리고자 하는 악한 생각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저들의 생각을 어떻게 아셨는지에 관해서 누가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통찰하실 수 있는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방법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일어나 한 가운데서라 - 예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향해서

무리가 잘 보이는 가운데 일어서라고 공개적(公開的)으로 명령하셨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엿보니'와 대조되는 말로서

완악한 마음을 갖고 송사할 구실을 찾으며 엿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다시 한번 반격하실 예수의 당당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예수께서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악한 의도를 물리치기 위해 그의 병 고치는 이적을

공개적으로 행하셨음을 의미한다.

 

그가 일어나 서거늘 손 마른 사람은 예수의 말씀에 곧 복종했다.

그는 권위있는 예수의 명령에 그대로 따랐다.

 

예수께서는 그를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일어서라'고 하셨다.

 

이것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미리 아시고

그들이 치료의 행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병 고침이 손을 만짐으로써가 아니라

말씀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으리라.

 

 

[6: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핏발선 눈으로 지켜보며 책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바리새인 등에게 예수는 공개적인 질문을 던지셨다.

 

여기서 '묻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로타오'

'질문하다', '요구하다'는 뜻인 '에로타오'보다 훨씬 강한 표현으로

'심문하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따라서 이 말투 속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편견(偏見)

적나라하게 파헤치고자 하는 메시야의 권위가 스며있다 하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 이 질문은 병든 사람이 죽을 처지가 되었을 경우에만

안식일에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에 대해서

반격을 가하신 것이다.

 

손 마른 사람은 비록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해도 치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이라 해서 이를 내버려두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도외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과감히 실행하려고 하셨다.

 

특히 우리는 예수의 이 반문에 담긴 예리한 풍자를 파악해 볼 수 있다.

 

즉 예수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옳으냐 그러지 않는 것이 옳으냐'라고 묻지 않고

 

'식일에 선행(혹은 생명 구함)이 옳으냐 아니면 악행(죽임)이 옳으냐'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형식과 위선의 허물을 쓰고 사람의

진정한 아픔과 필요를 거들떠보지 않는 자들의 비정함을

이미 악행 내지는 살인 행위로 규정하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예리한 질문 속에는 거룩한 안식일에 예수를

'멸하려고' ''을 꾀하는 대적들의 음모에 대한 질책이 시사되어 있다.

 

마태에 따르면 이 부분에서 예수의 말씀은 더 이어지고 있다.

그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의 예화를 사용했는데 그 주인은

안식일일지라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확실히 건져내어야 한다.

 

하물며 인간은 양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옳다고 결론지으셨다.

 

(12:1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6: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무리를 둘러보시고 -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무리를 둘러보시는

예수님은 근심하시고 노하신 상태였다.

 

(3: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아무튼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가하신 후에 그들의 태도를 살피신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중(意中)을 찌르는 질문을 하셨다.

사실 이 질문은 상식적인 선에서 모든 사람이 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묵묵부답, 유구무언이었다.

왜냐하면 어떠한 질문이든 그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어느 쪽도 택일할 수없는 난처한 처지에서

안식일에 치유 행위를 하시는 예수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시며 곡해된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쇄신하려고 하신다.

 

네 손을 내밀라 - 이 명령은 사실상 그 손 마른 자가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명하신다.

 

공관복음 어디에도 그 병자가 믿음을 가졌다거나 고쳐줄 것을 부탁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 행동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예수를 향한

갈급한 심령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 '그리하매'는 손 마른 사람의

신앙적 행위를 입증해 주는 말이다.

 

예수께서 힘이 없고 마른손을 내밀라고 명하셨고,

그 사람이 손을 내밀었을 때 즉시 그 손이 회복되었다.

 

세 공관복음서 기자가 모두 '회복되다'는 말인

'아페카테스타데'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전의 상태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 병자의 병을 고치신 것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방치해 두는 것은

오히려 '태만'의 죄를 범하는 것이며 나아가

생명을 '멸하는' 악행을 범하는 것이고

결국 안식일의 근본 목적을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안식일 제도의

근본 목적을 성취시키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침으로써 예수께서는 스스로 안식일의 입법자이심을

드러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하셨다.

 

 

[6: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노기가 가득하여- '노기(분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이아'

모든 감각과 이성을 잃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는 의미인데

여기에서는 이성을 잃고 덤비려는 태도를 가리키고 있다.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 마태와 마가는 이 구절에 '죽이다'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더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그러나 누가는 여기에서 '처치 하다'라는 말을 사용해서

다른 기자들보다 완화된 어감을 주지만, 그렇다고 예수께 대한

바리새인들의 적대감이 완화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가장 교묘하고 은밀한 술책으로

예수를 모해(謨害)하려고 한다는 점을 나타내려고 했다.

서로 의논하니라 - 마가는 그들이 회당을 나와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어떻게 예수를 죽일 것인가'를 의논했다고 기술한다.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그들은 예수를 대적하는 무리들과 함께 모여서 예수를 모함하고

그를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는 음모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를 죽일 계책을 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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