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4일 일요일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물고기 153마리를 낚음

 

성 경: [21:6-14]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21: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한 것에 대해

 

중요한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요한이 이 사건을 통해 독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기대했던 것은

예수의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르면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다는 교훈을 가르치고자 했을 것이다.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순종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끌어 올리다'(여퀴에인)는 말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오는 것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음을 감안한다면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여기에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 또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즉 고기는 개종자를,

고기를 잡는 행위는 사도직의 수행을 뜻한다고 볼 때,

 

제자들이 예수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했을 때

단 한 사람의 개종자도 이끌어 낼 수 없었으나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했을 때 그들은 놀라우리 만큼

많은 개종자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절대 의존의 관계에 있으며

그들의 능력의 원천(源泉)은 오직 예수에 대한 절대적 복종에 있었다.

 

 

[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은 하나의 이적이었고

 

그 이적은 요한으로 하여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명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게 하였다.

 

20:8에서도 그랬거니와 여기서도 요한은 남달리 빠른 직관력을 보여주고 있다.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그는 제일 먼저 주님을 알아보았고 그 사실을 베드로에게 말해 주었다.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 20:6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의 적극적이고 급한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배를 끌고 가자니 잡은 고기를 처리해야 하는 사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냥 물에 뛰어내려 헤엄으로 예수께 가고자 했다.

 

그런데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 뛰어내렸다는 것은

그가 일하는 동안 활동을 편안히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있었거나

거의 벗은 상태로 옷을 느슨하게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이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옷을 벗어야 했지만 그래도 주님 앞에서는 옷을 벗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의 벗겨지다시피 헐렁하게 걸쳐져 있던 겉옷을 수영하기 위해 제대로 동여맸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옳든 중요한 것은 열정(熱情)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21: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오십 칸 - 이는 직역하면 '이백 규빗'이라는 뜻이다.

1 규빗이 약 45cm에 해당된다고 볼 때 뭍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90m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 베드로외에 물로 뛰어내린

제자는 없었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운반해야 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앞 절에서(6) 밝힌 바대로 너무 많은 고기가 잡혔으므로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어 뭍에까지 끌고 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제자들이 배를 뭍에 대고 예수에게로 왔을 때

거기에는 제자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장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고기잡이를 하느라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세심한 배려(配廬)를 보여주신다.

 

예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생선과 떡을 구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이 언급되며 그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나눈 이 아침의 공동 식사는

서로의 마음을 여는 친밀한 교체의 시간이며,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소명을 부여받는 시간이기도 했다.

 

(16-19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1: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명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 예수께서 미리 준비해둔 생선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물에 걸린 생선을 가져오라 하셨다. (L. Morris).

 

(2)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하기 전에

고기 잡은 것을 처리하고 오라고 하신 것으로 본다. (Lenski).

 

전자의 해석은, 그것이 예수께서 마련한 식사의 불충분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바,

 

(6:1-13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예수께서는 단 한 마리의 생선으로도 충분히 제자들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의 해석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상황에서 잡은 물고기를 처리하는 것은

시급하다고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3의 해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체험할 수 있었는가를 주의 깊게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이 감당해야 할 소명(召命)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세 마리 - 그물에 든 고기를, 끌어올려 셈하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제자는 역시 베드로였다.

 

본문에는 베드로 혼자 그 일을 다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게 묘사되어 있으나

6절과 관련지어 볼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한편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잎뒤스',

묘하게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

머리글자를 모은 것과 일치하는데 이런 이유로 해서

초대교회에서는 물고기를 기독교

또는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부호로 사용하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거주지였던 곳에서 물고기 그림이 발견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한편 요한은 여기에서 잡힌 물고기의 숫자가 153마리였다고 기록하는데

153이라는 숫자는 기독교 역사상 많은 해석을 야기시켜 왔다.

 

(1) 어거스틴(Augustine)

 

율법을 상징하는 10을 구약으로,

성령을 상징하는 7을 신약으로 보고

이 둘을 합한 수인 17에 이르기까지 1부터 더해 나가면(1+2+3+4+5...+17)

15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덧붙여서 이 153이라는 숫자는

. 구약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게 될 자들의 수를 가리킨다고 했다.

 

(2)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

100을 이방인의 수로,

50을 유대인의 수로,

그리고 3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로 보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렇게 볼 때 100+50+3=153이라는 수가 도출되며,

이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고 한다.

 

(3) 고대의 동물학자들은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했는데

본문의 이 숫자는 인류 전체의 인종(人種)을 상징 한다고 본다. (Hieron).

 

(4) 사도들에 '낚인'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Barrett).

 

(5) 단지 많은 수의 고기가 잡혔다는 것

그리고 153이라는 숫자는 다만 사실의 보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TYemple, Leski).

 

위에 열거한 학자들의 제 견해들은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엄청나게 많은 물기가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이 표현은 적어도 그 정도의 물고기가

잡혔다면 당연히 그물이 찢어졌어야 마땅했음을 암시한다.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그럼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이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편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에 대해 학자들은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통일성(unity)을 말해준다고 보기도 한다.

 

교회는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지만

그 통일성이 보전되어 언제나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조반'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리스테사테'

하루 중 첫 식사를 뜻하는데

후대에는 눅 11:37에서처럼 '만찬'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1: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참고로 어떤 학자에 의하면 1세기의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두 끼의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L. Morris),

 

본문의 '아리스톤'이 바로 그 첫 번째 식사로

대개는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먹었지만

때로는 이른 점심으로 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 먹는 두 번째 식사는 '데이프논'으로 저녁 식사에 해당한다.

 

식사를 위해 제자들이 와서 숯불 주위에 둘러 앉았을 때

이미 제자들은 자기들을 식사에 초대하신 이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자기들에게 두 번이나 나타난 바 있던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53마리의 생선이 분명한 현실이듯 지금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려 하신

주님의 현존(現存)도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여 감히 예수께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한 듯이 보인다. (Godet).

 

 

[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셨다.

 

어떠한 축복의 말씀도 없고 함께 식사를 했다는 언급도 없지만

이 식사를 굳이 성만찬과 관련시켜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세 번째로 나타나신 것이라 -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있다.

 

(20:15-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26-29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서 뺀 것은

그녀가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arrett).

 

그런데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세 번의 현현은

다른 신약성경들과 관련시켜 볼 때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요한은 자신이 쓰고 있는 복음서에서의 순서만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