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0일 토요일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다

 지식의 본원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다.'(1:7)

 

 

'여호와'라하고, '경외한다'하고,

'지식'이라하고, '근본'이라고 한다.

 

모두가 구정의 무게가 있는 말이다.

 

'지식' 혹은 지혜라고 한다.

 

이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금 지식이라고 하면, 천연과학 있고, 철학 있고,

역사 있고, 윤리 있고, 기타 각종 전문적 학문이 있다.

 

하지만 옛 유대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일본)에 있어서와 한가지로 그저 지혜라고 하여,

모든 지혜를 종합 한 것을 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혜의 근본이다.'라고 한때,

그는 단순히 실제적 상식적인 지식을 의미하지 않았었다.

 

오늘의 말로써 한다면,

 

'여호와를 경외함은 천연고확의 근본이다.

철학의 근본이다. 윤리도덕의 근본이다.

일체의 학문 또는 교육의 본원이다.'라고 그는 가르친 것이다.

'근본' 혹은 '시초(시작')이다.

다만 ''에 대한 '시초'는 아니다.

끝에 이르기까지의 원리이다.

영어로 the first principle 또는 the root principle

또는 fundamentals라고 하듯, 기초적 원리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온갖 지식의 기초적 원리라는 것이다.

'경외함' '무서워함'은 아니다.

어른을 어른으로서 존경하는 마음이다.

겸손한 마음으로써 경외함이다.

 

'여호와' 그저 ''이라고 함과 다르다.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의 신(하나님)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시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명시된 하나님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다

 

성서에 보인 하나님을 겸손한 마음으로써 경이함이,

모든 철학, 과학의 근본적원리라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어찌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서는,

참된 지식을 얻을 수가 없을까?

 

물론 현대의 박사 교수들은 이것을 일소(一笑)에 붙이리라.

그렇다면

성서의 말이 진리인지, 혹은 박사의 말이 진리인지,

이는 중대한 문제이다.

 

우리들은 그것에 판결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이를 판결키 위해서는,

세계에 있어서의 학문의 역사에 호소하고,

인생의 사실을 기초로 하여 논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묻는다.

세계에 있어서 지식이 가장 진보한 나라는 어디인가?

어느 나라가 세계의 학자국인가?

 

지나(1105 )인가, 인도인가, 게프샤(1193p )인가?

 

이들 제국에도 대학자가 산출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문으로써 세계를 지도하는 나라는 그들은 아니다.

 

어딘가?

영국이다. 독일이다. 불국(프랑스)이다.

미국, 이국, 또는 캐나다이다.

그리고 이들 제국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감화가 가장 현저한 곳이다.

 

그리스도교가 보급 되지 않은 나라에

학문이 왕성함을 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받아들여진 곳,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에 있어서

가장 깊고 귀한 지식이 공급되는 사실은,

이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더 나아가서,

한가지로 그리스도교라 해도 구교와 신교와의 별()을 볼 것인가?

 

구교에 허다한 귀한 것 있고, 신교에 가장 혐오해야 할 폐풍 없지 않다 해도, 대체에 있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은,

구교국에서 보다도, 신교국에 있어서 성한 것이다.

 

그리고 16세기에 있어서의

루터(1119, 407, 2277 ), 칼빈(1196 )등의 종교혁명은,

다만 신앙상에서 전() 구주(歐洲)2분 했을 뿐 아니라,

또 지식상에서 이를 2단으로 나누었다.

 

지금 그리스도교국 중,

지식이 성한 나라와 그렇지 않는 나라와의 별()이 있다.

 

전자에 속하는 것은 어딘가?

 

그 제1은 루터의 나라인 독일이다.

전쟁 전에 이르기까지

근세의 학문의 정수를 모은 곳은, 실로 그 나라였다.

그리고 전패의 결과,

혹은 또 이 나라에 도리어 우수한 학문이 발흥하게 되리라.

 

다음은 영국이다.

영국의 학문은 실제적으로 천박하다고 한다. 혹은 그러리라.

하지만 국민에게 지식이 보급된 나라로서, 영국 같은 것은 없다.

 

이에 다음가는 것은 북미합중국으로서,

불국(프랑스), 또는 이국, 또는 포르투갈, 스페인 등은

도저히 이상의 제국에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스위스의 일부, 또는 덴마크, 또는 노국의 일부

등에 있어서 지식의 진보가 현저한 것이 있음을 본다.

 

그리고 이는 모두 신교의 원리가 행해지는 곳이다.

 

칼라일(1182)은 말했다.

 

'프로테스탄트 문제는 지식의 광명을 받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은,

신교국에 있어서 왕성하다.

지식의 탐구도,

또 신교국에 있어서 왕성하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라는 제언은,

이것을 국민의 신앙과 지식에 대한 관계에서 볼 때,

그것이 잘못되지 않은 것임을 안다.

국민으로서 그러하다.

 

개인으로서는 어떤가?

세계에 있어서의 지식의 선도자로 된 자는 누구인가?

 

그리스도를 모르고 혹은 그에게 거스린 사람 중에도,

대학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지식의 근본을 만든 자는,

역시 또 그리스도를 경외한 사람이었다.

 

근세철학의 조()데까르뜨이다.

데카르트 없다면, 오늘의 철학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신철학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로 하여금 그 대사상을 생겨나게끔 한 동기는 어디에 있었던가?

 

하나님의 존재를

움직일 수 없는 근저위에 두려는 열심히, 그것이 아니었던가?

데카르트에게서 하나님께 대한 외경의 마음을 제하고서는

무엇도 남지 않는 것이다.

 

그는 열심 있는 크리스천이었다.

가령 그의 유신론에는 많은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이 위대한 철학자가 만물의 조물주에 건설한 철학은

인류를 유익하게 한 것, 그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베이컨도 역시 그 한사람이다.

그의 품성에는 허다한 결점이 있다고 해도,

그도 또한 깊은 크리스천이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 없이

그의 대저술은 결코 이룩되지 못했을 것이다.

근세과학의 조선(祖先)으로 일컬어지는

아이작 뉴톤(1106)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일본) 오늘날의 학자들 앞에 서게 하고,

그리고 그 자신의 학문의 근저에 대하여 말하게 한다면 어떠할까?

 

그들은 이 위대한 과학자가 품은

미신(그들이 소위 일컬음)을 듣고 경악하리라.

하지만 뉴턴의 대발견의 근저는,

확실히 그 단순하고도, 심원한 신앙에 있었던 것이다.

가공해야 할 학자는 라이프니츠(1108)였다.

전우주의 지식을 하나의 두뇌 속에 간직한 자로서,

그 이 같은 이는 없다.

그리고 그는 열심 있는 크리스천이었고,

또 심원한 신학자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잊어서 안 될 것은 칸트(455)이다.

그가 아직 장년시대였을 때,

그로 하여금 세계 인류의 대 문제에 봉착했음을 느끼게 하고,

결연히 분기케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가 어떤 날 철학을 읽고

 

'만약 이 철학이 참이라면, 내 부모의 신앙은 붕괴되어야 한다.

이는 반드시 재건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통감한 그 책임의 자각이었다.

 

그러므로 칸트 대철학도, 역시 신앙의 산물임은 면할 수 없다.

 

이렇게 하여,

세계에 우뚝 솟아 있는 학문의 고봉을 별견하는 때는

그 최고의 거한들은, 모두 구름을 뚫고서

하늘 높이에 달하여 친히 여호와와의 교통을 가진 자이다.

 

참으로 깊고 넓은 지식을 얻음의 본원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에 있어서만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반드시 이것을 세계 또는 국민의 역사에만 찾지 않아도 된다.

각자의 심중, 또는 명백한 실험(체험)이 있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라고 한다.

국민에 있어서 그렇다. 학자에 있어서 그렇다.

또 각자에 있어서 이렇다.

 

지금 이것의 에로 누구의 실험을 들것인가?

옳다. 나 자신의 것을 말함이.

왜냐하면, 자기의 경험은 가장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그런 대소의 차는 있을망정,

라이프니츠, 칸트, 데카르트 등의 대선생과

같은 종류의 감화를 받은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은,

다만 나의 도덕을 높이고,

나의 영혼을 청결히 했을 뿐 아니라,

나로 하여금 진정한 학자가 되게 한 것이다.

 

누구라도 진정한 학자일 수가 있다.

학자란 무엇인가?

소위 박식사라고 일컫는 백과사전의 대용물은 아니다.

 

진리를 그것 자신의 가치에 있어서 아는 사람,

진리를 진리 그것으로 인하여 귀히 여기는 사람,

이러한 사람이 진정한 학자이다.

 

진리를 진리 이외의 것 때문에 알고,

편의 위해 또는 이익 위해 이것을 굽히려 하는 자 같은 것은

결코 학자는 아니다.

가령 세계의 정치론을 모두 다 연구한다고 해도,

이것을 일국에 적용함에 있어서,

다소의 완화를 실시하려고 하는 자는,

학자가 아니라, 정치가이다.

 

학자는 진리를,

진리 그것으로 인하여 귀히 여긴다.

그러므로 적어도 우주의 진리라고 믿을 것인가,

이것을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적용하고자하는 것이다.

 

이해와 편의를 배척하고,

진리는 다만 하나님 위해 귀히 여기는데 학자의 학자 된 소이가 있다.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서도,

혹은 주방(부엌) 용구의 소발명에 의해,

정부의 특허권을 획득할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뉴턴이 연구한 것같이,

성두와 성두를 연결시키고,

우주를 탐토하는 정도의 대 발견은,

그 마음 속 끝이 여호와와 교제하는 자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사람의 지식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써 더욱 귀한 것으로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어서,

천연을 탐색 하는 것은,

아버지의 아름다운 정원을 소요하는 것이다.

 

나뭇잎이 돋아나오는 곳,

새가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곳,

개미가 먹이를 찾아다니는 곳,

하나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음은 없다.

그러므로 탐구 또 탐구, 결국 그 다할 바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까지라도 아직 학계의 소아이다.

 

실로 뉴턴이 말한 대로, 그 일생애를 들여 배운 것은,

겨우 대해의 물가에 서서, 두 셋의 조약돌을 주운데 지나지 않는다.

 

전도에 펼쳐지는 진리의 바다는 무한이다.

따라서 그들의 지식욕도, 또한 무한이다.

그 생애를 되풀이하기 10회 또는 20회에 미친대도

오히려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연치(年齒) 아직 50에 달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이미 지식욕의 감멸을 보임을 보면,

짐작이 가고도 남으리라.

 

참된 신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학생이다.

그러므로 지식욕의 발흥은,

개신의 가장 확실한 징후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무런 소양도 없는 남녀를 화하여, 귀히 여길 학자가 되게 한다.

 

내가 아는 동북지방에 있어서의 모맹부인 같은 이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이로하(일본 가나문자의 첫 걸음 the A. B. C)

모름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접하여서부터

성서 연구의 열심을 일으켜,

곧 점자에 의해 이것을 배우고, 이래(이후) 수년도 못되어

놀랍게도 성서에 정통하기에 이르렀다.

 

세상에 이와 유사한 예는 결코 적지 않다.

 

여호와를 아는 것은 지식욕발흥의 비결이다.

지식은 영적이다.

그러므로 두뇌만으로써 이것을 획득 할 수는 없다.

진리를 진리로 인해 귀히 여기는 진정한 학자 되기 위해서는

영적 준비의 필요가 있다.

 

즉 우리들의 영으로써 우주의 영에 결합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지식은 잇달아 용솟음쳐 나오는 것이다.

 

더구나 다만 자기의 전문에 속하는 지식 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사물에 관하여,

깊은 흥미를 가지기에 이르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라고.

이것은 솔로몬의 말이다.

하지만 솔로몬보다도 크신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지식의 본원을 더 한걸음 나아가게 했다.

 

이르기를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린도전서 1:30).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지식의 본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 그이 자신이 우리들의 지혜이다. 철학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우사,

우리들의 철학이 되게 하신 것이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또 동시에

우주의 원리를 알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철학자로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 주위에 분잡한 사상문제가 있다.

국제 문제가 있다. 노동문제가 있다. 물가문제가 있다.

어떻게 하면 그 중심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가?

 

이르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알 것이다.

 

페어베언이 말한 대로,

 

저 십자가의 못에 찔리신 쌍수리의 중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를 알고, 그를 믿는 것은 모든 지식과 교육의 근원이다.

 

* 참조 : (내촌감삼의 19199'성서지연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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