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일 토요일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윗의

마태복음 22 41-46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주께 이르시되 내가 원수를 아래 때까지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참조 : 마가복음 12 35-37, 누가복음 20 41-44.

예수는 지금까지는 그의 반대자에 대하여 수세로 나오셨다.
그들로 하여금 그에 대해 질문하게 하시고, 철저히 이에 대답하여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들이 이상 질문의 화살을 쏘아댈 용기 없음을 감지(perceive)하시자, 그는 수세에서 공세로 옮기셨다.

그는 이제부터 질문을 바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에 대해 대답케 하셨다.
그리고 대답할 없음을 보시자, 그들을 책망하여 그들의 허위를 폭로하시고,
그들의 멸망을 선고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에 대해 폭력으로서 다투는 외에 없게 하시었다.

충돌은 마침내 여기에 이르지 않을 없었다. 광명과 암흑과의 충돌이었다.
그리고 암흑은 공명을 삼켜버렸다.
하지만 광명은 꺼져버리는 것처럼 보이면서 다시 암흑 속에서 생겨 나왔다.

논쟁은 십자가를 소개하기 위한 서막이었다.
필연의 죽음을 앞에 두고서의 논쟁이었다.
거기에 무게와 깊이가 있다.

사람이 바야흐로 죽으려 하는 , 하는 선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죽으려하여 발한 말씀이기 때문에,
모두가 참을 통찰(insight)하고, 속을 꿰뚫은 것이다.

질문전() 당신은 무슨 권위로써 일을 하느냐 물음으로서 시작되었다.
예수는 직접으로 이것에 대답하지 않고서, 간접으로 대답하셨다.

하지만 다시 명백하게 이에 대답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께 속한 권능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면, 그가 어떤 이신지를 알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리스도라 하셔도,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질문을 발하여 그들의 반성을 촉구하셨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는 누구의 아들인가?.
다윗의 아들이라 그들은 대답했다.
하지만 성서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불러 주라 하고 있지 않는가?
시편 110편을 보라.
( 110:1-7) [다윗의 ] 여호와께서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수로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6)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7)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머리를 드시리로다.

다윗이 주로서 높이신 이가 어찌 아들일 있으랴! 어떤가? 예수는 반문하셨다.
물음에 대하여 학자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예수는 반대자를 괴롭히기 위해 물음을 발하신 것은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렇게 그들에게 물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나신다는 것은 성서가 보여준 바로서,
점에 대하여 예수는 학자들과 다투시지 않았다.
다윗의 아들(후손)이시나, 보다 이상이다. 다윗의 주시다.

마치 마리아의 아들인 이상으로 그녀의 주이심과 한가지이다.
그것이 이해되지 못하고서, 그리스도 누구이신지는 알지 못한다.

학자들은 성서를 암송하면서 이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도저히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대왕 다윗이 주로서 경외한 부이시다.
그리고 나는 분이라고. 예수는 말하려 하신 것이다.

성스러움인가? 광기인가?
일찍이 나까에 도우쥬우(8 152역주) 석가의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평하여,
말을 발한 사람은 가장 오만한 자이다라고 했다는 것인데,
자기를 대왕의 주라고 부른 예수도 비평에 해당되는 아닌가?

근대인은 예수의 물으심에 대해, 도리어 바리새의 학자들에 동정하여,
그러한 난문을 발한 그들을 곤난하게 예수께 대하여 은근히 반대를 가지리라.

사람은 말한다.
성서 안에 예수가 명백하게 나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은 없다고.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는 대왕의 주시라고 명언 하셨다.

성인가 광인가는 별문제로 하고서,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고 믿은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일은 신앙 또는 사상문제는 아니다. 실제문제이다.

다윗이 그의 후예로서 나실 그리스도를 자기 주로서 높였을 아니라,
너희의 선조 아브라함은 날을 보기를 기뻐하고, 이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요한복음 8:56)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도 그를 주로서 우러른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놀라운 말씀을 발하신 이래 1900,
허다한 국왕, 대제, 대학자, 미술가, 대라고 일컬어진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그를 주로 찬양한 것이다.

앨프레드대왕(15 136역주), 크롬웰(5 59), 빅토리아 여왕, 그들도 다윗왕 동양으로 예수를 주로서 높였던 것이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 예수를 주로서 찬양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라, 무상의 광영이다.
미신이 아니라, 최상의 지혜이다.
실로 국가 인류의 운명은, 예수에 대한 태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로서, 사람에 관하여 전하셨다.
네게 쓰이지 (섬기지) 않는 나라는 망하고 나라나라는 온전히 황폐해지리라(이사야서 60:12) .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쓰이지 않는 나라는 망한다 하는 것이다.

말도 안된다고 사람은 말하리라.
하지만 터키를 보라. 애굽을 보라. 인도를 보라. 페르샤를 보라.
알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특별히 이른바 그리스도 교국이 그리스도의 성지에 맞는 완전한 나라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완전하기 그지없대도,
예수께 주로서 쓰이는 점에 있어서는 보다 선한 나라라고 하지 않을 없다.

나라의 흥함도 멸함도 필경 나사렛 예수에 대한 태도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은,
기이한, 하지만 다툴 수는 없는 사실이다.
예수는 어떻게 해서라도 제사장 백성의 학자들로 하여금,
자신에 관한 이것을 알게 하려 하셨다.

하지만 예수라 해도 자신의 일을 말하심에는 아주 어려운 있었다.
그러므로 간접으로 에둘러,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복음서의 이곳은 마음으로서 읽지 않으면 된다.
대저 다윗, 성경에 의해 스스로 말했다. , 내주에 이르시기를이라고.

그렇듯 다윗 스스로 그를 주라 했다.
그렇다면 어찌 자손이 되랴? (마가복음 12:36-37).

이는 반대자를 괴롭히기 위한 커넌드럼(conundrum 수수께끼) 아니다.
그들의 평강에 관한 대문제이다.
시편 110편의 의미를 안자이다.

너희가 보내신 이를 아는 것은 이는 한없는 생명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질문을 발하시고 있다.
우리들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가?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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