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悲劇)의 서막
마태복음 26장 1-5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참조 :
마가복음 14장 1-2절,
사도행전 2장 23절.
마태복음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대비극은 제26장으로 시작된다.
비극이라고 하여,
극작은 아니다.
있었던 일로서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이 너무 극적이기 때문에 임시로 극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기도가 있어서,
만사가 종국의 목적을 달성하는 바는 전연 극적이다.
속담에 ‘사실에 지나는 소설 없다’고 하는 말과 같이,
역사보다 나은 극작은 없다.
그리고 세계 역사의 정점이라고 칭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최대의 극임은 당연하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햄리트 Hamlet》도,
괴테(Goethe)의 《파우스트 Faust》도,
도저히 여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6장 1절에,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그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있다.
전장으로서 예수의 말씀은 끝난 것이다.
예수는 이미 말씀으로서 가르쳐야 할 것은 모두 가르치셨다.
즉 말로서 하는 교훈은 끝을 고했다.
하지만 그의 성업은 설교로서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 아직 하여야 할 대사업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제부터 속죄의 죽으심을 이루셔야 했다.
그의 전한 교훈에,
그의 피로써 서명 하셔야 했다.
예수의 죽음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간요한 사건이었다.
그의 교훈은 그의 죽음을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다.
산상의 수훈은 귀하다 해도,
십자가의 죽으심은 더 귀하다.
만약 복음의 중심을 찾고자 하면,
이것을 마태복음 5장 이하의 3장에 있어서 할 것이 아니라,
26장 이하의 3장에 있어서 할 것이다.
근대의 신학자는 예수의 교훈에 중점을 두고,
그의 죽으심을 생각하는 일 적기 때문에,
그를 아는 일 얕은 것이다.
어쨌거나,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이다.
옳다,
모든 가르치심을 전하고 마치신 후에,
하여야할 대 사업이 있었다.
마태복음 26장 이하가 그리스도교의 중심이요,
정점,
초점이다.
여기서 복음의 성극은 그 최후의 막을 연 것이다.
제2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이틀 후는,
너희가 아는 대로 유월절이다.
그 때에 여러 나라의 유대인은 예루살렘으로 모여온다.
그 때에 뭇 사람 주시하는 앞에서,
나 인자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그 제자에게 팔릴 것이다’.
예수는 성서에 의해,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그 방법을 잘 아시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서 그 일에 대해 예언하셨다.
하지만,
이는 제자들이 의외로 여기는 바였다.
예수의 죽음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그리고 그 원인이 제자의 배반이라는 그런 의외의 일에 있어서 있으리라고는,
그들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바이었다.
예수는 이때까지 몇 번이나,
그 자신의 죽으심에 대하여 예고하셨다.
‘그들이 갈릴리에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사람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후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제자들이 이것을 듣고서 매우 슬퍼하였다’(마태복음 17:22)고 있다.
(마태복음 17: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그는 그 후,
다시 명확하게 그들에게 고하여 말씀 하셨다.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인자는,
대제사장과 학자들에게 건네질 것이다.
그들은 그를 죽을죄로 정하고,
또 모욕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이방인에게 넘겨줄 것이다’라고.
(20:18-19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지만 제자들은 몇 번 이것을 들었지만,
이상히 여겨 이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그 스승인 거룩한 예수에게 그런 일은 결코 임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곳에서 그의 적(敵)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모의를 집중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대제사장 및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집이 안뜰에 모여,
궤계로서 예수를 잡아 남모르게 죽이려 계획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말했다.
“명절 동안에는 하지 말 것이다.
혹시 백성 중에 소란 생기리라”’ (26:3-4)고 있다.
여기서 교직과 장로들은,
예수께서 예언한 것과는 전연 다른 죽음의 방법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남모르게 잡아,
남모르게 죽이려 했다.
그들은 백성의 소란을 두려워하여 명절날을 피하려 했다.
헤롯이 침례 요한을 죽인 것 같이,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남모르게 예수를 죽이려 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계획이 제시되었다.
이자 어느 것이 이룩될 것인가?
혹은 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의 말이 이룩될 것인가?
예수는 농촌의 한 평신도,
그에 대하여 수도의 교권정권이 일치하여,
그의 죽음에 대하여 의결한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의결은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을 뒤엎는 듯이 보였다.
예수는 단지 농촌사람의 교사로서 끝마치려 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가장 공적인 것으로서,
이에 의해 만민의 죄가 속량된다는 것은 치한 일장의 꿈으로 사라져 버리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가 하면,
예수의 예언의 문자대로 행해지고,
사람의 계획은 하나도 행해지지 않았다.
예수는 역시 ‘이자는 자기에 대해 기록된 대로 갈 것이다’(24)라고 후에 말씀하신 대로 가셨다.
(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즉 예수의 죽으심은 경우상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임한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히 이것을 예지하고,
스스로 택하여 이것을 받으신 것이다.
즉 요한복음 10장 18절에 기록된 대로이다.
‘내게서 이것(내 생명)을 빼앗아갈 자 없다.
내가 스스로 이것을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버릴 능력이 있다.
또 능히 이것을 얻을 능력 있다.
내 아버지로부터 나는 이 명령을 받았다’고.
예수는 그에 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룩되기 위해,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에 따라,
그의 적으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게 하시는 것이다.
즉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의 죽음은 사람이 그에게 과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우신 고난이시다.
악인에 의해 그에게 가해진 고난이라 해도,
그것도 하나님의 성지(聖志)에서 나와,
그의 정하신 방법에 의해 행한 죽음이다.
즉 후일에 이르러 베드로가
사도단을 대표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한 말이,
이 일을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예수를 가리켜 말한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시는 바에 따라 넘겨주신바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불법의 손으로 이를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다’(사도행전 2:23)고.
예수를 죽인 자는 이스라엘인 것으로,
그들은 스스로 그 죄를 지지 않을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은 그들에 의해 그 성지를 행하셨다.
세상에 ‘자연의 성행’이라 칭하는 것 있다 해도,
그 위에 또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지가 행해진다.
사람의 자유와 하나님의 성의에 관한 대문제로서,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해도,
사실은 분명하여 덮어버릴 수 없다.
‘사람의 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야고보서 1:20)는 것은 일면의 진리임과 동시에 또 국한된 진리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노로서 그(하나님의)
의를 행하시는 경우가 있다.
십자가의 비극이 그 가장 현저한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다른 많은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성지가 사람의 행위를 통하여 행해진 것이다.
인류의 역사 곧,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은 이것이다.
마태복음 26장 1-5절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제1절 -예수의 교훈은 끝나고,
그는 이제부터 속죄의 행위로 들어가신다.
제2절 -
예수,
그 죽음의 순서를 예언하시다.
제3-5절-
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 예수 죽일 것을 계획하다.
즉,
모의(속임수)로 그를 잡아 남모르게 그를 죽이려고 도모하다.
제5절 이하 -
예수의 예언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지는 순서 따라 전개되고,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있어서의 기름 부음 받으시는 일로서 시작하여,
유다의 배반,
겟세마네의 고투를 거쳐,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에 이르고,
부활,
승천에 달하여 완성된다.
이렇게 하여 사람의 계획은 모두 분쇄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이 이룩되었다는 것이,
제20장 이하 권말에 이르기까지의 줄거리를 적은 것이다.
'우리들은 이에 의해 무엇을 배울가 하건대,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배운다.
하나님의 선하신 거룩한 뜻은 일상의 인사에 있어서 행해지고 있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또 동정자인 마리아도 있는가 하면,
반역자 유다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위해,
모두 합력하여 유익을 이룬다’(롬 8:28) 고 있는 대로,
우리들에게도,
또 자기편도 적(敵)도 모두 합력하여 유익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어 조금도 겁낼 것이 없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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