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로다.’ 7회
마태복음 23장 13절 이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참조:
누가복음 11장 37절 이하.
화로다 제 1
- 사람의 교사되려는 자는 먼저 자신이 구원되어야 한다.
자신이 구원되는 것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자격의 제1이다.
그런데 많은 교사는 자신이 구원된 실험을 가지지 못하면서 사람의 구원에 종사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국을 사람 앞에 막고(닫아놓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며 또 들어가려는 사람의 들어감을 허락지 않는 것이다.
자신 구원되지 못함은 큰 화이다.
하지만 사람의 구원됨을 방해하는 것은 화의 극이다.
그리고 자신 구원된 확실한 실험을 가지지 못한 자가,
전도에 종사하여 이 화(재난)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 평안을 획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평안을 줄 수 없음은 물론,
그가 평안에 들어감을 기뻐 않는다.
더 나아가 평안에 들어가는 길을 막고서 그로 하여금 들어갈 수 없게 한다.
화로다 제 2
- 사람을 평안에 인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당파를 세워 한 사람이라도 자기에 닮은 (속한)
자를 만들려 한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두루 바다와 산지를 돌아다니면서,
한사람이라도 자기 종지에 끌어넣으려 한다.
그리고 이미 끌어들이면,
이것을 자기보다 배되는 지옥의 자녀로 되게 한다.
세상에(미워)
싫어해야할 자로서 당인 같은 것은 없다.
그리고 구 중 가장 싫어해야할 자로서 당인 같은 것은 없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싫어해야 할 자는,
종교적 당인이다.
신앙 없는 전도는 이른바 개종권유운동으로 화하기 쉽다.
어느 세대에 있어서도,
그러한 운동이 전도의 이름 아래 행해졌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교회의 세력을 펴려한다.
이 목적에 의해 이룩된 이른바 신자는,
천국 백성이 아니라 지옥의 자녀이다.
그 열심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열심히 아니라,
자기가 속한 교회에 대한 열심이다.
그리하여 종파전을 일으키고,
신자 서로를 헐뜯고,
욕하고,
저주하고,
죽이고서 하나님께 봉사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주 예수께서 그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오늘의 교회를 보신다면,
그는 얼마나 노하시랴.
위선의 학자와 바리새인에 대하여 어린양의 진노를 발하신 그는,
반드시 그것 이상의 노를 말하여,
그의 교회 내에서 행해지는 위선을 불살라 버리시리라.
화로다 제 3
- 성실한 사람은 서약을 삼간다.
그의 말 그것에 서약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성전을 가리키고,
제단을 가리키며,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른 것은,
그의 성실이 감퇴한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이다.
서약에 구별을 하고,
그 사이에 유무경중을 판단(인정)하기에 이르러,
성실은 땅에 떨어지기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마치 오늘의 사회에 있어서 증문이 더욱 더 번잡을 가하게 된 것 같은 유이다.
인감을 요하고,
수입인지를 요하고,
증인의 연인을 요하고,
더 나아가 공정증서로 하기를 요한다.
그리고도 안심할 수가 없다.
성실을 결여하고 약속의 이행을 서약에 구하는 때에,
일이 여기에 이름은 당연한 순서이다.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
이것에서 지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단순하신 예수는 복잡한 바리새인의 가르침에 참을 수 없으셨다.
화로다 제 4
- 위선의 학자와 바리새인은 소사에 엄하고 대사에 너그러웠다.
그들은 율법의 말 따라,
박하와 회향과 소채 등 하찮은 야채에 십일세를 바치면서 의와 인과 신이라든가 하는 큰일은 이를 돌보지 않았다.
‘이것,
행할 것이다.
저것도 또 폐지 말 것이다’.
작은 일은 이것을 행할 것이다.
하지만 큰일은 이것을 폐지 말 것이라고.
인의를 게을리 하고,
소사에 아무리 충실하다 해도,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충실할 수 없다.
소사는 하기 쉽다.
대사는 하기 어렵다.
일요일에 대신하여 토요일로서 안식일로 삼는 등,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정의에 의거하여 흔들리지 않으며,
전국을 상대로 복음위해 싸움 같은 것,
이는 참 용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학자와 바리새인은 소인이었다.
그러므로 소선에 충실할 수 있고,
대선에 충실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악사에 대해서는 그 반대로,
소악을 피하여 대악을 범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켰다.
작은 부채는 이것을 상환하고,
커다란 부채는 이것을 떼어먹었다.
그리하여 위선자가 하는 일,
오늘도 역시 그러하다.
화로다 제 5
- 위선자는 밖(걸)을 깨끗이 하고 안을 게을리 한다.
그릇에 주의하고 내용을 돌아보지 않는다.
식기의 청결에만 마음을 쓰고,
이것에 담는 음식물의 성질 여하를 묻지 않는다.
생각한다.
그릇이 깨끗할 것인가?
내용 절로 깨끗할 것이라고.
맹자여,
그 반대가 진리이다.
먼저 내용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그릇도 또한 깨끗해질 것이다.
회당의 장엄함에 의해 신자를 깨끗이 하려 해도 할 수 없다.
신자를 깨끗이 할 것인가?
회당은 절로 깨끗해질 것이다.
그릇을 중대시하고,
이것을 사용하는 정신을 경시함이 위선자의 특성이다.
제도,
방법,
조직,
단체 이러한 것은 모두 그릇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잔과 접시이다.
이에 가득 채우는 데 탐욕과 음욕으로서 하여,
어떠한 용기도 성결할 수 없다.
화로다 제 6
- 위선자는 겉을 꾸미고,
안을 소중히 하지 않는다.
회칠한 무덤 같아,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안(속)은 해골과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하다.
이 세상의 성인군자는 모두 이런 유이다.
그들은 힘써 겉을 꾸미는데 그친다.
안(속)은 불평,
오만,
질투로서 가득하다.
이른바 수양은 수식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노력은 자기를 고치기에 족하지 못하다.
먼저 자기 부정을 알아,
하나님의 대능으로서 자기 심령(속)에 새로운 마음을 만들고,
그에게 자기를 정결케 하여 주심을 받는 외에,
거룩(성결)해지는 길 없다.
학자와 바리새인은 지금의 허다한 도덕가 또는 종교가와 한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의 속죄의 은혜에 참여하려 하지 않은 까닭에 그들의 위선 상태에서 탈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화로다 제 7
- 위선자는 건비의 백성이다.
자기 의를 의인의 묘비로 나타내어,
스스로 의에 거슬려마지않는다.
말한다,
‘우리들,
만약 선조의 때에 있었다면 예언자의 피 흘리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만약 예언자에게 직면할 것인가?
그들은 이를 죽여 예언자 살해의 후예임을 증거한다.
예수 앞에 선 학자와 바리새인이 그 사람이었다.
그리고 옛 성인,
의인,
순교자에 대해서는 상찬의 말을 거듭하여 마지않는 사람도,
참 성인이 자기 앞에 서는 일 있으면,
이것을 참방매리(slander)하여 마지않는 것이 보통이다.
‘뱀,
독사의 종류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벌을 피하랴’ 고 예수는 그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사지로 부한 까닭에 뱀이다.
독을 간직하는 까닭에 독사이다.
그리고 뱀과 독사가 풀숲을 태워버리는 불에 살라지듯,
이들 위선자들은 지옥의 형벌을 만나리라.
옳다.
만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 ‘화로다’가 7회 거듭되었다.
처음의 3회는 그 가르침이 그릇되었기 때문에,
끝의 3회는 행함이 악한 까닭에,
그리고 가운데의 1회는 교훈과 행함이 둘 다 악하기 때문에.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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