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3일 일요일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예수 유다

마태복음 26,
마태복음 27 1-10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때에 예수를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가격 매겨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13, 기타 4복음서에 산재하는 유다에 관한 기사 참조.

우리들은 전문(前文) 있어서, 유다의 예수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생각했다.
금회(今回), 예수의 유다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우리 누구나가 유다이기 쉽고, 누구나가 유다를 가지게 된다.
우리들 유다 되지 않도록 애쓰지 않으면 되는 동시에,
유다를 가진 경우에는, 주의 발자취를 따라,
시험 되더라도 죄에 빠지지 않도록 힘쓰지 않으면 된다.

세상은 반역의 세상이다.
사람들 누구나가, 반역에 대처하는 길을 배워둘 것이다.

1 주의할 것은,
예수께서 1회도 유다에게 향하여 노를 발하지 않은 일이다.
점에 있어서, 유다는 베드로와 다르다.
베드로도 유다와 한가지로, 예수를 오해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예수께 강요하려 했다.

그가 예수를 만류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피하게 하려한 때에,
예수는 돌아다보시며, 그를 책망하여 말씀하셨다,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마태복음 16:23).

예수께 사탄이라고까지 불리는 자는, 12제자 베드로 한사람이었다.

하지만 참된 사탄은 별도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참된 사탄은 1회도 사탄이라고 분명하게 불리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께 유다에 대한 태도에, 최후까지 일종의 삼감(조심) 있었다.
그는 번이나 충고를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충고는 모두 일방적이고, 간접적이었다.

실족하게 되는 반드시 것이다.
그것을 가져오는 자는 화가 있을 진저.
실족케 하는 것보다는 연자멧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
사람 위해 나으리라(누가복음 17:2) 말씀 같은 .

실로 하나였으리라.

갈릴리 순회 중에,
아직 죽음의 그림자조차 그의 일신에 당치도 않는 것으로 생각될 무렵,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 사람의 손에 넘겨지고, 죽임을 당하고,
3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태복음 17:22)라고.

그리고 그이 죽으심이 가까워짐에 따라,
예고는 더욱 명백해졌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도중에,
사람을 떠나, 특히 12제자들에게 고하여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인자는 제사장과 학자들에게 팔릴 것이다.
그들은, 이를 사죄로 정하리라 (20:18).

그리고 최후에, 만찬의 밤에,
그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한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26:21)라고.

하지만 넘겨줄 자는 유다라고는, 끝까지 명언치 않으셨다.

그리고 사탄이 이미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결심이 동하지 않을 것을 아시자,
그는 아마도 저성으로,
다른 누구에게도 돌리지 않도록 거의 유다 사람에게 속삭이듯 말씀하셨으리라,

네가 하려는 일을 빨리 하라(요한복음 13 27).

이것은 과연 옳은 길이었을까?
사람의 길이었을까?

예수가 유다에 대하여 얼마라도 삼간(조심한)것이,
그가 드디어 그에게 거슬리는 원인으로 아닌가?

만약 예수가 베드로에 대한 태도로서 유다에 대하여,
사탄이 그를 꾀인 경우에는 분명하게 그를 사탄이라 부르고,
명명백백, 그로 하여금 예수 앞에 자기를 감출 없게 하셨더라면
그는 자괴하여 죄를 뇌우치고, 신앙의 생애를 다할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려면 생각 못할 없다.
하지만 일은 예수의 내적 생명에 관한 일로서,
타인이 모두 이것을 살펴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들이 아는 것은,
신뢰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신뢰를 불러오지 않는다는 일이다.
신뢰할 자를 신뢰하여, 그의 회개를 촉구하고,
신뢰 않아야 자를 신뢰하여 도리어 그를 멸망으로 인도한다.

사탄이라 불리워서 자기로 돌아와 깨닫는 자가 있고,
노하여 떠나가는 자가 있다.
베드로는 전자였고, 유다는 후자였다.

예수의 목적은 물론 유다에 회개를 일으키게 함에 있었다.
그러므로 유다는 유다로서 취급치 않을 없었다.
특히 베드로를 사랑하고, 특히 유다를 멀리한 것은 아니다.
병인에 따라 약을 주는 것으로서,
유다를 구하는 길은 베드로를 구하는 길과 달랐던 것이다.

회개는 자기에서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어떠한 압박도 이에 가해서는 된다.
하나님이시라 해도 사람을 회개로 인도하시는데 결코 압박을 가하지 않으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을 가지고서,
누구도 회개로 인도하지 않았다.
옳다, 인도할 없는 것이다.

가르친다, 충고한다, 암시한다,
모든 방법으로서 회개를 돕는다.

하지만 사람에 대신하여 회개를 일으키지 않으신다.
옳다, 일으킬 없다.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이상, 이것은 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의 존귀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조차도 사람의 자유를 중히 여기신다.

예수는 최후까지 유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내가 한조각의 떡을 적셔서 주는 사람은 사람이다라고까지 하셔서,
네가 사람이다라고 하실 정도까지 말씀하셨다.

하지만 유다는 깨닫지 못하고,
결국 예수의 생각하시는 바에 따르지 않고서
자기 행하는 바를 행하려 했다( 13:26-27).

예수의 노력, 유다의 완강, 놀라지 않을 없다.
여기서 2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없다.
예수는 어찌하여 일찍 유다의 반역을 간파하여,
그를 물리쳐 자신과 제자들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으셨는가?

구원할 있는 자를 구원하려 하여 인내 노력하는 것은 가하다 해도,
도저히 구원할 없는 자를 끝까지 용서하여,
그는 무익한 재해에 자기를 맡기신 아닌가?

인내에도 정도가 있어,
자신을 멸하게까지 반역자를 참으실 필요 있는가.

그리고 만약 타인이 예수의 입장에 섰더라면,
아마도 그렇게 했었으리라.
앞서면 사람을 제어하고, 뒤지면 사람에게 제재된다.

일본은 노국(Russia) 적의 있음을 간파하여
개전의 선고를 기다리지 않고서 여순항에 노국함대를 격파했다.
독일도 또한 동일한 이유 아래,
벨기국의 중립을 범하고, 불국(France) 침입했다.

자기의 권리도 때로는 이것을 존중할 것이다.
예수의 유다에 대한 태도는 점에서 몰상식한 아니랴?
하지만도,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도는 사람의 길보다 높은 것이다.

(이사야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람은 그렇게 생각해도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유다 사람 위해 그렇듯 인내 노력하신 예수는,
이것을 최선의 길로 생각하신 것이다.

유다를 물리치기는 쉬웠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랑의 길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지가 아니다.

인자는 악인의 손에 팔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맛보지 않으면 되신다.
그리고 마시는 잔이 있을 데까지 쓰기 위해서,
그는 적이 아니라 친구에게 팔리지 않으면 된다.
이것은 그에 대하여 미리 정해진 일인 것으로서,
그는 아버지의 주시는 잔을 마다해서는 된다.

유다는,
인자가 속죄의 죽음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그릇인지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를 물리치는 것은 죽음을 마다하는 것과 같다.

어쨌거나 악은 거절할 아니다.
명백하게 악으로써 나타나기까지 기다릴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람과 다투는 ,
최후의 타격은 적으로 하여금 이것을 가하게 것이다.
자신이 나아가 이것을 적에게 가할 아니다.
이것이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유일한 길이다.

악으로서 악에 보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가 아니다.
뱀을 멸절하는 길이 아니다.

예수는 끝까지 유다를 참아,
그가 하나님의 외아들이심의 길을 다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에게 있어서 유다는 커다란 걱정꺼리(근심의 )였음에 틀림없다.
친구를 취급하기는 쉽다. 적을 취급하기는 어렵다.
그의 최선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그의 의지에 따를 수는 없다.

증오해서는 된다.
그렇다고 정에 있어서 사랑할 수는 없다.

유다는 실로 예수를 괴롭히는 몸속의 찌르는 가시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근심은 드디어 없어졌다.
유다의 정체가 절로 분명해져, 그는 물리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예수의 밑을 떠났다.

유다는 떡조각을 받고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복음 13:30) 있다.

그리고 유다 떠나가 제자단은 맑고, 없는 자로 되었다.
예수는 지금은 마음 없이 편해져,
그의 심중을 제자들에게 밝힐 수가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즐거운 때는 마침내 왔다.
없는 사제의 단란이다.
이제는 무엇을 말해도 오해될 염려는 없었다.

친한 동지, 단란의 밤은 당금, 나뉘기 애석도 하다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일찍 너희에게 이를 말했을 것이다. 나는 너희 위해 있을 곳을 예비하려 간다 .

유다가 제사장, 학자들과 예수를 교섭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에
여기에 예수와 제자들과의 사이에 사랑의 연석(party) 열려,
하나님의 아들이 지상의 생애에 있어서 말하신
가장 아름다우신 말씀이 진술되어 있다.
하지만 즐거운 때는 불과 반야(半夜)유다가 함께 있지 않은 반야,
예수의 입에서 사랑의 말씀이 힘차게 주어지는 반야,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가 주어진 반야(半夜),
실로 귀한 반야이다.

유다가 얼마나 예수의 전도를 방해했는지는,
그가 떠나간 후의 반야의 사건에 의해 추량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방해는 아니었다. 성취였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성지를 취소시킬 수는 없다.

유다의 반역은, 하나님의 아들이 속죄의 피를 흘림의 기회로 되었다.
유다는 비난해야 것이냐, 동정해야 것이냐,
우리는 알지 한다 해도, 그를 미워해서는 된다.

예수는 끝까지 그를 사랑하셨다.
우리도 우리에게 거슬리는 자를 취급함에,
예수가 유다를 취급하듯 하지 않으면 된다.
유다의 생애에 가지 애석히 여길 일이 있다.
그것은, 그가 자기에 대하여 취한 최후의 소치이다.
그는 자기의 비행을 깨닫자,
제사장, 장로들의 곳으로 가서 예수를 30(300데나리온) 돌려주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것을 성전에 던져 버리고서
그곳을 떠나, 스스로 목매 죽었다( 27:1-10).
이는 그가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여기서 그에게 주어진 구원의 최후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때 제사장에게 가지 않고,
갈보리의 예수의 십자가 밑에 달려가야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그의 사죄를 구할 것이었다.
예수는 얼마나 기뻐했을 것이랴!
그는 물론 그를 사해주었으리라.
그리고 유다의 회개를 세상의 최후의 기쁨으로서,
그의 숨을 거두셨으리라.
그리고 유다는 회개하여 사죄된 죄인의 모범으로서,
다시 12사도의 무리 중에 들어가,
아마도 바울의 역사() 다를 없는 했으리라.

실로 아까운 일이었다.
유다는 이것을 없었으나,
다른 유다들은 용약하여 일을 것이다.

회개에 지나치게 늦은 때는 없다.
회개는 용기를 요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서 회개 같은 것은 없다.
회개는 오만의 정반대이다.
유다는 오만 때문에 최후까지 회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이상으로 십자가의 대단원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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