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1일 금요일

아버지여, 그들을 사하시옵소서.


사함의 복음

예수는,
자기를 십자가에 박고 목전에서 자기를 조소하며,
욕하는 사람들 위해 기도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그들을 사하시옵소서.
하는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일찍이 베드로가 그에게로 와서,
번까지, 사람이 내게 죄를 범한 것을 용서할 것입니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물은 ,
그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네게 일곱 번이라고 않는다. 일곱 번을 70 하여라(마태복음 18:21),

무한히 용서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울이 이방 신자에게 그리스도교의 대의를 말함에 있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는 모든 무자비, 격분, , 소란, 욕설,
또는 모든 악을 자기에게서 버리도록 하라.
서로 자애와 동정이 있도록 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너희를 사하심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에베소서 4:31이하).

사도들은 복음을 특히 사함의 복음(사죄의 복음)이라 불렀다.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강세(降世) 주요한 목적이었다.

신자는 매일
우리에게 지은 자를 우리가 사하여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옵소서하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께 죄를 사함 받아야 한다.
죄를 사함 받지 못하고서, 하나님의 은혜는 임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은혜의 세계에 서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비탄우수 중에서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우리들의 범한 죄가 은혜하사를 막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자기 죄를 인정치 않고서 안에 잠겨 있는 사람을 은혜주려야 주실 없다.
죄를 그대로 두고 은혜를 주심은, 하나님으로서의 자격에 거스림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의 죄를 없이할 없는 까닭에,
하나님 자신이 삼제의 임무에 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교 다름 아니라, 죄의 삼제이다.
죄를 하나님께 사함 받고,
결과로서 사람이 내게 범한 모든 죄를 사하는 ,
이것 없이 그리스도교는 없다.

그리스도교 신자임의 증거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 사함 받음의 실험 없이,
남의 죄를 사할 있는 능력 없이,
달리 무엇이 있대도,
사람은 그리스도 신자가 아니다.

죄의 사유(사죄), 그리스도 신자인 유일한 증거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가?
이른바 교회역사는 사죄의 역사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사도시대가 끝난 후에 교회 내에 이단정벌이 시작되었다.
교회는 개의 당파로 나뉘어져 상호의 이단을 쳤다.
그들은 누구를 용서해도 이단론자만은 용서치 않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체라고 주창하는 일파와 동체라고 주창하는 일파는,
10년에 걸쳐 맹렬히 다투며 싸웠다.
몬타노스의 역사, 크리소스톰의 역사, 네스토리우스(본서 385 역주) 역사는
모두 죄를 사하지 않음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런 부끄러워야할 역사가,
사도 이후 300 또는 400년으로서 끝났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1900년의 역사는,
최초의 100년을 제하고는,
대체에 있어서 이단정벌의 역사였다.

구교는 신교를 치고, 신교는 구교를 치며,
신교제교회는 서로를 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독일의 루터신자가 스위스의 칼빈 신자를 싫어하는 것은,
그들 이자 공동의 교적인 로마천주교 신자를 증오하는 것보다도 훨씬 심한 데가 있다.

그리고 칼빈신자도 서로를 공격하는 일심하여,
그들 사이에 사함의 복음은, 실제로 행해지지 않는 것이다.

영미의 성공회 같은 ,
성단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열심을 잃지 않는대도,
자기와 주의 신앙을 달리하는 신자에 대해서는
그들은 불신자를 취급하는 이하의 행위로 나가도,
조금도 자기를 책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자(Churchmen) 것으로서
무상의 영광, 특권이라 믿고, 우리들 무교회 신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불신 비례를 행한대도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불신자의 죄는 사하지만,
그들의 교회에 반대하는 신자는 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도신경을 유지하는 데는 열심이지만,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사함 받고,
타인의 죄를 사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들의 신앙개조에는 사죄의 요구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까지의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사도 바울의 요구 훈계는 전연무시된 것이다.

너희는 모든 무자비, 격분, , 소란, 욕설을 자기에게서 떠나게 하라 가르침은

교회에 있어서는 전혀 불고된다.
독자가 나의 말을 의심한다면,
교회의 연회에 출석하여 실황을 엿볼 것이다.

그들이 형제 서로를 헐뜯고, 분내어 노하며, 떠들썩하는 상태는,
바울의 훈계를 전연 배반하는 것이다.

서로 자애와 동정이 있도록 하라.

지금의 그리스도교회에 이것이 있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너희를 용서함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이것은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의 사이에 있어서는 없는 것과 다름없는 훈계이다.
같이, 거의 반백년동안 졸렬한 신앙의 생활을 계속해 자는 교회,
특히 교사에게서 관대인서 같은 미덕을 구하려고는 조금도 생각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어디에 나의 , 흠점을 써두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라고 나는 알고 있다.

만약 나의 나쁜 것을 퍼뜨리면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목사 기타의 직분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람의 죄를 사해야 곳이지만,
지금의 그리스도교회는 죄를 사하지 않는 곳임을 나는 알고 있다.
타인의 죄의 지적은, 사람들의 식물(食物)이다.
그들은 이것 없이 하루도 생존할 수가 없다.
사죄의 복음의 은혜에 참여한 자의 견딜 없는 바의 것은,
형제의 비방에 심대한 쾌락을 즐기는 이들 교사들의 회합의 자리이다.
나는 나의 실험에 의해, 거짓 없이 이것을 기록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여,
교회의 사람들에 대하여 나의 불평을 터뜨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누구의 흠점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흠점이다.
20세기에 있어서 있는 흠점을,
3세기에 있어서 보는 것이다.

교회는 크리소스톰이나 네스토리우스를 괴롭힌, 같은 수단방법으로서,
지금 역시 서로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에는 무언가 근본적인 결함이 없어서는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근본의 사실의 간과에서가 아니어서는 된다.

그리스도교는 이론은 아니다. 실험이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명하는 가의 이론상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과연 죄를 하나님께 사함 받았는가의 실험상의 문제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함 받은 무엇보다도 분명한 증거는,
남의 죄를 사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사함 받은 자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마지않는다.
형제의 흠점을 들어 기뻐하는 사람은,
자신이 죄를 사함 받지 못한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강세(降世), 생탄, 수난, 십자가의 죽으심은,
모두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죄의 사유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는 만큼의 노력 또는 고통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하여 나의 죄를 사함 받고서,
나는 남의 죄를 사하지 않아 좋을 것인가?

문제는 지극히 간단하다.
그리스도전 연구의 목적은 주로 여기에 있다.
단지 높은 도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과 우주와 인생에 관하여 깊은 사상에 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죄를 사함 받아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장벽이 제거되고,
우주인생에 충일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 고장도 없이 내게 부어 되기 위해서이다.

목적을 달치 못할 ,
그리스도전의 연구는 실제상 내게 아무 유익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전부가 해득된대도,
자기의 죄가 제거되는 없이는,
그리스도교가 해득된 아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너희를 사하신 같이, 너희 서로 용서하라 하여,
그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를 표명한 것이다.

사함이 없는 곳에 그리스도교는 없다.

죄의 사유(사죄),
이것 있는 곳에만 하나님의 나라는 있다.

죄의 사유가 행해지는 교회에만 그리스도는 계신다.
죄의 사유가 행해질 비로소 국제적 전쟁은 그친다.
죄의 사유를 행치 않는 자에게 침례를 주고,
이것을 교회에 수용하는 까닭에, 교회는 부패하는 것이다.

적국을 미워해 마지않는 나라는, 달리 아무리 선한 일이 있대도,
나라는 그리스도교국은 아니다.

점에 있어서 독일도, 영국도, 미국도,
그리스도교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방기한 것이다.

교전국 사이에 불타고 있는 치열한 증오심,
이것 있고서는 달리 무엇이 있대도,
이들 여러 나라가 그리스도교국 아닌 것은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로 되는 것이다.

누가 신자이고, 누가 불신자인가?
하나님께 자기의 사함 받고, 기꺼이 남의 죄를 사할 있는 자이다.

남에게 침례를 주는데 있어서, 이것을 1 필요조건으로 것이다.
특별한 교의의 신봉 , 이에 비하여 극히 가벼운 것이다.
신자 됨에 신앙의 확증을 요한다. 그리고 신앙의 확증은 죄의 사유이다.
그리고 형제의 죄를 사할 없는 자는, 아직 하나님의 사죄를 받지 못한 자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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