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2일 수요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최후의 만찬

고전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잔은 피로 세운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마태복음 26 17-29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때가 가까이 왔으니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참조 : 마가복음 14 12-25, 누가복음 22 7-23, 요한복음 13:1-30, 고린도전서 1123-26.

이상이,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에 관계된 주요한 기사이다.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행해지는 성찬식의 성서적 기초인 까닭에, 해석은 매우 곤란하다. 교회가 해석을 달리한다. 교회의 분리는 주로서 이상의 기사에 관한 해석의 상위에 있다.
예수는 여기서 성찬식을 제정하셨다고 하는 것이 교회전체의 의견이다. 교회에 있어서 성찬식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없는 것이다. 특히 로마 천주교회, 영국 성공회, 독일 루터 교회에 있어서는 성찬식은 그들이 신봉하는 그리스도교의 기초이며 중심이고, 극치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들 무교회 신자 같은 , 물론 그리스도신자는 아니다.
성찬식에 참석하지 않는 , 이것에 의해 주어지는 빵과 포도주를 섭취하지 않는 자가 어찌 그리스도 신자일 있으랴는 것은 그들이 주저 없이 주창하는 바이다.
그리고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 무교회신자를 배척하는 그들 교회신자가 성찬식의 일에 대하여 일치하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
신교전체는 천주교회의 성찬식을 조소하여 마지않는다. 그들은 이것은 미신의 극이라고 한다. 그리고 천주교에 비슷하면서도 스스로 독존을 부르짖어 마지않는 영국성공회도 또한 독특한 성찬식을 지키는 엄밀하다.
성공회는 타교회의 신자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루터 교회도 역시 로마천주교회에 거슬리면서, 성찬식의 일에 대해서는,
칼빈교회 또는 츠빙글리 교회와 합치 않으며,
자기 의견을 엄수하는 일에 있어서는 로마, 영국의 양교회에 양보치 않는다.

성찬식의 빵은 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체 그것이라는 것이 로마교회의 신앙이다.
성체 그것은 아니라 해도 그리스도 자신이 안에 계신다는 것이, 영국교회의 의견이다.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도 피도 아니라, 심볼(symbol)이라는 것이 신교다수의 의견이다.
성찬식은 이것을 지킬 없고, 차례의 식사가 이것 성찬이라고 하는 것이 프렌드교회(Society of Friends) 주장이다.
실로 각종각양이다. 어느 것이 (), 어느 것이 ()라고 정할 수가 없다.
이러한 형편이므로 나의 해석이 교회의 사람들을 설복하고, 그들에게 만족을 주리라고는 생각 않는다.
하지만 나도 나의 해석을 시도하는 권리를 갖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의 해석은 교회의 논쟁을 떠나서의 해석이다.
나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단지 회식으로 해석한다. 어떤 특별한 의식을 제정하기 위한 만찬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예수는 여기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결별의 회식을 시도하신 것이다.
예수,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유월절 식사하기를 크게 원했다(누가복음 22:15) 있는 대로이다.
보통의 회식이었다.
하지만 예수에 의해 마련된 회식이었다. 그러므로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의 생애의 최후에 있어서 그가 제자들과 함께한 회식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떤 깊은 의미가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찾는 것이 가장 간요하다.
요한복음 13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때가 것을 알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백성을 이미 사랑하시고 끝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사랑하셨다 있다.

사랑은 예수의 특성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세상을 떠나려 하여 그는 최대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이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 대하여 나타나셨다. 자기에게 대적하는 자에 대하여 나타나셨다.
애찬(Love- feast)이었던 최후의 만찬에 있어서 예수의 사랑은 가장 현저히 나타나셨다. 그리고 누구에 대해서보다도 가장 현저하게 이제는 자기를 적으로 팔려고 하는 바의 가룟의 유다에 대하여 나타난 것이다.
예수는 물론 자기를 파는 자가 누구인지를 아셨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그를 가리켜 말씀치 않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중의 사람이 나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손을 그릇에 넣는 자는 나를 팔자이다라고.
그리고 유다 자신이 그에게 향하여 선생님 저입니까? 물은 , 옳다 대답치 않으시고, 너는 말했다 하셨다.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였던가?
모반인이 누구인지를 명백하게 알면서도 어찌하여 이것을 털어놓고 이야기 하지 않으셨을까?
이때 유다를 제거하면 몸의 위험은 가는 아닌가!
알기 어려운 것은 경우에 있어서의 유다에 대한 예수의 태도이다.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아시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한 대로 가지만 인자를 파는 자는 있을 진저! 사람 나지 않았다면 도리어 복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유다의 반역에 의해 인자는 십자가에 박힐 것이었다. 유다의 운명도 또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숙명이 아니다.
유다는 자신이 회개하여 운명을 피할 수가 있다.
예수의 안중에 하나님의 섭리의 그릇으로서 정해진 유다와 자유의지를 구유한 사람인 유다와의 구별이 있었다.
그는 그가 인간으로서 유다에 대하여 연민의 금할 길이 없었다.
예수는 지금 자기의 위험을 잊어버리고서 자기를 적에게 팔려는 유다의 위험을 생각하셨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구원하려고 노력하셨다. 이제 남은 시간은 잠시이다. 때가 지나갈 것인가? 유다는 영원 멸망으로 가야만 한다. 이것을 생각하여 예수는 견딜 없었다.
그러므로 번이나 분명치 않은 모호한 말씀을 하여 유다에게 회개를 재촉했던 것이다. 전부가 유다 일인에게 하시기 위한 말씀이었다.
예수의 심중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
유다여, 나는 네가 지금 내게 대하여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너는 지금 바야흐로 지옥에 떨어지려 하고 있다. , 그릇 안에서 손에 닿은 , 손은 지금 너를 대죄악으로 인도하려 하고 있다. 아아, 유다여 너는 회개하라, 이제! !
그런데 가련하다, 유다는 예수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는 이미 반역을 결심하고 있었다.

이것을 아신 예수의 마음은 찢어 했다. 그는 마침내 반역자에게 향하여,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라(요한복음 13:27) 하시지 않을 없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의 실패가 행해졌다.
유다의 반역을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아들의 노력
세상에 그러한 사랑이 있을 있으랴!

예수의 행위에 대하여 사람은 말하리라.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섭리의 실현을 방지하려 한다. 모순도 또한 심하지 않은가?.
옳다, 모순이다.
그러나 사랑의 모순으로서 가장 귀한 모순이다. 모순 없는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매일 모순을 연출하고 있지 않는가?
사랑의 죄를 정하면서도 이것을 사하고자 한다. 그것이 참된 사랑인 것으로서 모순이다.
모순은 하나님께 있는 모순으로서, 그것이 사람에게 나타나, 혹은 어버이 마음이 되고, 혹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되는 것이다.
경우에 유다가 회개했더라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의 죄를 속하셨으리라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는 문제이다.
의사가 가망 없다고 떼는 자식을, 부모는 최후까지 떼지 않는 것이다.
같이 철학자 기타의 세상의 논자가 모순이라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크리스천은 행하는 것이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 있어서 유다를 구하려고 노력하시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믿는다.
유다가 떠나간 후에, 예수는 남은 11인에 대하여, 사랑을 나타내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철두철미, 사랑의 회식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이런 회식이 제자들에 의해 그의 사후에 있어서 되풀이되기를 원하셨다.
그가 그들에게
나를 기억하기 위해 이것을 행하라 하신 것은 명령으로도 희망으로도 해득할 수가 있다.
것이다라면 명령이다. 하기를 바라다 하면 희망이다.
그리고 명령동사는 이자 어느 것으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그리고 사랑은 명령을 피하고 희망을 말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의 희망에 명령 이상의 효력이 있다.

예수가 여기서 성찬식을 제정하셨다 하는 것은, 그를 입법자로서 보고서의 말이다. 그보다는 그는 여기서 특별히 사랑의 표현자로서 나타나신 것이다.
또는 제정이라든가 하는 말은, 애찬의 경우에는 가장 부적당하다.
어쨌거나 성찬의 일로 다투는 자는 진의를 전연 몰각하는 자이다.

예수는 이때, 최후까지 유다를 구하려고 노력하셨다.
성찬에 참석하는 자는 사랑을 가져야 것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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