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대 예수
마태복음 26장 6-16절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동 47-54절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동27장 3-10절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
*참고 :
요한복음 12장 1-8절.
가룟 유다는 가롯 사람 유다(10권 29,
10억주)의 뜻이다.
가룟(10권 29)은 유대 남방이 일읍이었다.
그러므로 유다는 12제자 중에서 다만 한 사람,
갈릴리인이 아니고,
유대인이었다.
그것도 또한 그의 사람됨을 아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그리스도전의 연구에 있어서,
가룟 유다의 경력은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제자를 앎은 스승을 앎의 길인 것으로서,
그 점에 있어서,
베드로,
요한,
마태,
유다 등,
아무 다를 바는 없다.
만약 예수를 태양에 비한다면,
제자들은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회전하는 유성이다.
그 각자의 발하는 빛은 다르지만 한 가지 태양의 빛을 발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총합하면,
또 얼마쯤 본래의 빛으로 되는 것이다.
물론 유다의 경우는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 성질을 달리하여,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것을 가리우는 것이지만,
그렇지만 달이 태양의 빛을 가로막아 일식의 현상을 일으키는 경우에,
우리들이 다른 경우에 있어서 볼 수 없는 일을 보듯,
유다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른 제자들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어 감사한다.
유다의 어두운 생애도,
또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필요 불가결의 것이었다.
제 1로 일어나는 문제는,
유다는 어찌하여 예수께 왔을까,
또는 예수는 어찌하여 그를 12제자 중에 넣으셨을까,
그것이다.
그 안에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도저히 해석키 어려운 이유가 있다 해도,
유다도 또 다른 제자들과 한가지로,
나사렛 예수에 있어서 유대민족 공통의 이상적인물을 보았다고 생각하여,
그의 뒤를 따랐음에 틀림이 없다.
안드레가 그 형제 베드로를 만나,
‘우리도, 메시야를 만나
뵈었다’(요한복음 1
:41)하고,
또 빌립이 그 친구 나다나엘을 만나,
‘우리는, 율법 중에
모세가 기록한바,
예언자들이 기록한
바의 분을
만났다.
즉 요셉의
아들 나사렛의
예수이다’(요 1:45)라고 했다는 것은,
제자들 전체가 비로소 예수께 온 때의 마음을 잘 말한 것으로서,
유다가 처음으로 예수께 온 때도 또한 이 마음으로서 왔을 것은 분명하다.
유대민족에게 자유를 주고,
그들을 인솔하여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함의 자격과 능력을 갖춘 인물,
즉 메시야,
예수는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은 모두 집을 버리고 친구를 떠나,
그의 제자로 되었던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유다에게도 또한 사랑할 바가 있었다.
예수가 그를 사랑하여 수행의 제자의 하나로 하신 것은 무리 없는 일이다.
그리고 또 제자 전체가 오랫동안 예수를 오해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예수를,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로서 보았다.
즉 절대의 정치가 또 애국자 또는 개혁자로서 보았다.
그들도 역시 시대의 어린이로서,
시대의 눈으로서 예수를 보려했다.
그 점에서,
유다도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마가복음 10장 35절 이하의 다음의 기사 같은 것이,
그들의 마음의 이 상태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예수께 와서 말하기를,
스승이여,
원하옵기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에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영광자리에 앉으시는 때,
우리의 한 사람을 당신의 오른편에,
한 사람을 왼편에 앉게 해 주옵소서라고…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분개했다.
즉 제자들 전체가 예수를 대 다윗왕 같은 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공이 이룩되어 위에 앉으시는 때는,
그 좌대신되고,
또 우대신 되기를 몽상했던 것이다.
가련하다면 가련하다.
마태복음 20장 22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너희는 스스로
구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대로,
예수는 그들의 이 한심한 마음에 크게 실망 하셨던 것이다.
스승의 마음,
제자 모른 것으로서,
제자들은 십자가의 비극이 연출되기까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해득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의 실망은 예수의 실망에 못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다의 실망은 특히 심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이상이 예수에 의해 결국 실현되지 못함을 보고,
비분강개해 마지않기에 이르렀으리라.
그는 때로는 예수께 미혹된 것으로 느꼈으리라.
또 때로는 예수를 자극하여 그가 기대한 사업을 수행케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때로는 예수를 노했던 것이리라.
또 때로는 그를 사랑하는 나머지,
그의 준순태만을 아까와 했으리라.
그는 몇 번이나 홀로 은근히 땅 치며 울었으리라.
‘우리 선생은 어찌하여 궐기하지 않는가?
그는 결국 우리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이스라엘을 구하지 못하고 마는 것 아니랴?’고.
그 심정이야 말로 실로 추찰할 바가 있다.
그렇지만 예수로서는 유다의 희망에 따를 수는 없었다.
그는 그(유다)에게 대위험이 잠재해 있음을 아셨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 계시는 그의 아버지의 성지(聖志)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유다의 마음이 이 상태를 통찰하신 예수께,
또한 견딜 수 없는 비애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예수와 유다와의 분리가 마침내 일어났다.
일은 베다니의 마리아의 예수에 대한 행위로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값진 나드(-
이성호역 :
마이어 구신약영해 5권 354역주참조)의 향유로서
예수의 머리와 발에 부은데 대하여 유다는 반대를 제기,
‘이 향유를
어찌하여 은
300(3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지 않는가’고 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그녀에게 상관
말라. 내 장사(葬事)의 날
위해 이것을
준비했다.
가난한 자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하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것
아니다’(마가복음 14:3이하,
요한복음12:1이하 참조)라고.
여기서 예수와 유다와의 사이에 사상(思想)상의 대 상위(相違)가 있었던 것이 분명히 나타난 것이다.
예수는 그 자신의 죽으심에,
세상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지요의 의의가 있음을 인정하신데 대하여,
유다는 구원을 세상의 보통 의미로 해석하고,
빈자에 주어 사회의 생활상태를 고쳐야 할 일로 믿었다.
즉,
예수께 있어서는,
구원은 영혼의 일,
주로서 미래의 일,
그리고 그 길은 하나님의 아들의 속죄의 죽음을 믿는 일이라는데 대하여,
유다에게 있어서는,
육체의 일,
사회국가의 일,
현재의 일,
그리고 그 길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여 세계만민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2개의 사상은 실제적으로 도저히 양립 할 수 없는 것이다.
유다는 여기서 자기에 눈떴다.
그가 예수께 희망한 것은,
예수 자신이 수행하려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의 실망은 그 극에 달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비분은 이에 따랐다.
어떻게 하여 이것을 치유할 수 있을까고.
그는 여러 가지로 그의 마음을 썼던 것이리라.
그의 입장에 서서,
그에 대하여 깊은 동정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유대의 대실망이,
그를 재촉하여 저 대반역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일은 비참의 극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연출된 최대 비극은 이것이다.
악인이 선인을 판 것은 아니다.
선인이 선인을 판 것이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보아도 후세의 교회가 상상하여 그려놓은 것 같은 악인은 아니었다.
요한복음 12장 6절의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도둑이며 또 돈주머니를 말아 가지고서,
그 중에 넣은 것을 훔쳐낸 자이기 때문이었다’는 말은
아마도 후세의 기입일 것으로서,
본문에 속한 것은 아니리라.
유다는 애국자로서 인류의 친구이며,
이스라엘의 부흥에 의해 세계의 평화통일을 기대한 자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가 이 이상에 알맞지 않는데 실망하여,
저 가공할 과실에 빠졌던 것이리라.
그가 반드시 악의로서 그의 스승을 팔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어쩌면 심중에 혼자 말했으리라,
‘내,
그를 그의 적에 넘겨줌으로서,
어쩌면 그는 최후의 결심을 촉구하기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는 좋은 기적을 행했으니,
기적으로서 자기 몸을 구하리라 그를 위험한데로 이끈대도,
위험이 그의 몸을 해칠 염려는 없다’고.
그는 예수께 실망했으나,
최후까지 그를 믿었으리라.
그런데 일의 경로는 그의 상상과 달리 마침내 촉루산상(갈보리)에
그의 스승이 십자가에 달림을 목격하고,
그는 실망 위에 더 실망을 더하여,
예수를 판 은(銀)30을 성전에 던져버리고,
그곳을 떠나,
스스로 목매 죽었으리라.
(마태복음 27:5)
그렇다면 유다의 죄는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가 너무나 강하게 자신을 믿는 일에 있었다.
그는 최후까지 자기의 사상을 바꿀 수 없었다.
그 점에 있어서,
그는 다른 제자들과 달랐다.
예수를 처음에 오해한 점에 있어서 12제자들은 모두 한가지였으나,
유다를 제외하고는,
예수의 교훈에 따라,
서서히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예수의 사상으로서 자기들의 사상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유다 한 사람에게는 이 전환의 능력이 없었다.
그는 자기를 믿는 일 너무 강하여,
최후까지 자기의 의견을 관철했다.
‘구원은 그래야만 한다.
메시야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믿어,
조금도 그 신앙을 바꾸지 않았다.
철저하다면 철저하다.
하지만 완고하다면 완고하다.
서양속담에 ‘지자는 변한다’고 하는데 유다는 그 의미에 있어서 지자는 아니었다.
그는 예수께로 와서,
예수께 배우고자 하여 예수로서 자기의 사상을 실행케 하려 했다.
이는 그가 범한 최대의 잘못이다.
그리고 복종 않는 철저는 대죄악이다.
철저라면 훌륭하게 들리나,
그 근원은 오만하다.
자기를 지혜롭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이 마음이 남아있어 그는 마침내 멸망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사람에게 없어서 안 되는 것은,
배우려 하는 마음이다.
유다에게 이 마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망했다.
다른 제자들에게 이 마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과오 중에서 구출되어,
영생의 행복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근대인은 어떤가?
자기를 믿음의 강경함이 그 특징이 아닌가?
배우려 스승을 구하지 않고,
자기의 사상의 실현을 기대하여 그에게 온다.
그 점에 있어서,
그들은 유다와 한가지이다.
그리고 그들의 최후도 또 유다의 그것과 다름없다.
그들은 자기의 이상의 실현을 타에 있어서 보고자 하여,
실망 비분 중에 그 일생을 마친다.
그들은 자기를 믿는 일 너무도 강하여,
타인의 사상의 자유를 중히 여김의 여유마저 없다.
만사를 자기의 사상에 의해 행하려 한다.
그러므로 일에 임하여 실족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다윗의 겸손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대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시편 25:4-5한글 개역)라고.
정직하며 성실한 것뿐으로는 족하지 못하다.
상한(통회하는)
마음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다는 예수에게서 곧 가르치심을 받고,
마침내 컨버션(Conversion
마음의 개조)의 경험을 가지지 못하고서 끝마친 것이다.
그는 신앙적 유산의 슬퍼할 바 실례(實例)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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