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6일 일요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빌라도 앞의 그리스도

마태복음 27 11-26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이르되 십자가에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박히게 넘겨 주니라.

*참조 : 마가복음 15 1-15, 누가복음 23 1-25, 요한복음 18 28-40, 9 1-16.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를 사형에 정하고, 그를 결박하여 로마의 대관 본디오 빌라도의 곳으로 끌고 갔다.

이유란 그들은 사형집행권을 가지지 못하여 이것을 대관에게 구하지 않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 18: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그리고 예수는 빌라도 앞에 서서, 제사장 가야바의 앞에선 때보다도 훨씬 위안을 느끼셨다.

그와 제사장들과의 사이에, 악의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제사장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들에 대하여 자기를 변명함의 전연무익함을 아셨다.

하지만 빌라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자 사이에 요해 또는 동정은 없었다. 동시에 악의는 없었다.

가야바는 예수의 수적이었음에 대하여, 빌라도는 그저 무관심했다.
가야바는 종교가, 빌라도는 정치가였다.

그리고 신앙가를 증오하는 점에 있어서, 종교가는 훨씬 정치가 이상이다.
신앙가는 정치가보다도 요해 동정을 바랄 수는 없으나,
그러나 종교가가 그에 대하여 가지는 같은 악의구한은,
이것을 정치가에 있어서 없다.

가야바에 비교하여 , 빌라로는 예수에 대하여 훨씬 관대했다.
예수는 빌라도 앞에 섰다. 빌라도, 예수에게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소문대로의 유대인의 그리스도인가.
빌라도는 처음으로 예수를 만나 놀란 것이다.
유대인의 왕이라면 왕으로서의 풍채 위엄을 갖춘 자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갈릴리의 평민, 그에게 왕으로서의 아무런 징후가 없었다.

이것이 소문으로 듣는 소위 유대인 왕인가고 생각하여,
그는 안심하고, 일소를 금치 못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빌라도에게 즉석에서 일어난 감각은,
사람이 결코 죽음에 해당되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사면하려고 했다.
그에게 이해된 것은, 유대인이 질투에 의해 예수를 넘기었다 (마태복음 27 18) 것이었다.
(마태복음 27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앎이더라)

그러므로 정치가의 입장으로서, 아무리해도 예수를 사형에 처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첫째로,
유월절에 대관에게서 백성의 원하는 바에 따라 한사람의 수인을 사하는 예를 이용하여,
예수를 사면하려 시도했다.

그런데 민중은 대제사장의 교사에 따라 살인범인 바라바가 석방되기를 바라고,
예수는 이것을 십자가에 박으라고 하므로,
대관의 제의는 무효로 끝났다.

이에 있어서 빌라도는 2 방법을 시도했다.
예수가 갈릴리인임을 까닭에,
그를 당시 마침 예루살렘에 체재중인 갈릴리 분봉왕 헤롯에게로 보냈다.
이는 헤롯으로 하여금 관내의 백성의 사람인 나사렛의 예수를 처분케 하려 원해서이다.

그런데 헤롯에게 예수를 보는 명철함이 없어,
예수께 기적을 행하기를 구했지만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빌라도에게로 돌려보냈다.
(누가복음 23:11 헤롯이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여기서 빌라도는,
3, 최후의 ()으로서 물을 가져다 군중 앞에서 손을 씻고서 말했다.
의인 앞에 나는 없다. 너희가 스스로 책임을 져라.

그렇게 하여 그는 명백하게 예수의 무죄를 선고하고,
군중으로 하여금 자성하여 폭거로 나오는 일이 없게 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듯 미약한 수단이 성공할리는 없고,
군중은 더욱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를 십자가에 박으라, 십자가에 박으라.
피는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여기서 속수무책되어 대관 빌라도는 군중의 뜻을 받아드려 예수를 채찍질하며,
이것을 십자가에 박도록 명하고, 군중의 () 그를 맡기었다.

가련하다. 박지약행(薄志弱行) 정치가 빌라도에게
무고(innocence) 최후까지 보호함의 용기가 없었다.

빌라도의 태도야 말로, 비난해야 동시에, 가련히 여겨야할 일이다.
그는 로마 정부의 보통의 관리였다.
그리고 관리의 상례로서, 보통일반의 범인이었다.
그에게 예수의 신성을 봄의 명민이 있을 없고,
정의 위해 자기의 몸을 버리려는 용기도 성실도 없었다.

그가 1 바란 것은, 자기 일신의 안전이었다.
그리고 자기 안전을 보증하기 위한 장관의 신임과 군중의 인망이 필요했다.
그는 공평하기를 원해도, 공평은,
자기 지위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이 공평이었다.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의 무죄를 인정했으나,
그러나 군중의 인망을 걸고서 까지 이것을 주장할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군중에게 만약 이것을 놓아준다면 황제(가이사)에게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황제에게 반역하는 자입니다(요한복음 19:12)라는 말을 듣고서,

그는 자기 지위의 위태로움을 알아차렸다.
기껏해야 시골사람인,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고,
백성 사이에 난이 일어나 질서를 어지럽힘의 해에 비할 바도 아니라고.

이렇게 간파한 빌라도는, 자기 양심에 거슬리면서도,
없는 예수께 사형을 선고하여, 이것을 적의 손에 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관대하신 예수는, 경우에 있어서도 역시,
자기를 잊어버리고서 빌라도에게 동정하셨다.
그는 제사장들에 대하여 절대 침묵을 지키신데 대하여,
빌라도에 대해서는 크게 말씀하시는 있었다.

요한복음 18 28절이하, 19 14절까지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 빌라도의 대화를 명시 받고 있다.

빌라도가 내가 너를 십자가에 달개 권한 있다. 너를 놓아줄 권한도 있다 한데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여 말씀했다.

네게, (하나님)에서 권한을 주지 않았더라면, 내게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 가장 크다.

여기서 예수는 자기 죽음에 관한 빌라도의 책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에게 책임 없는 아니지만, 제사장들에 이상의 책임 있다고 말씀하셨다.

자기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람이라 해도,
그는 이에 책임 이상의 책임을 돌리시지 않았다.

빌라도가 자기를 변호하기 전에, 예수는 그를 위해 변호하셨다.
하지만 예수는 정치가 빌라도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셨다.

자기의 안전을 1 하는 정치가이다.
이것에서 완전한 공평을 바랄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정치가는 정치가, 전연 무용의 인물 아니라 해도,
하나님의 , 의에 대해 의뢰하지 못할 인물임은 고급동서 변함없는 것이다.

정부가 임명한 공리라고 하여,
정의의 일에 있어서 정치가를 신뢰함이 잘못됨은, 세계주지의 사실이다.

실로 빌라도는 행복한 정치가이고 불행한 정치가였다.
넓은 로마제국 내에 정도의 정치가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모두 망각되고,
빌라도의 이름만이 오래 역사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의미에 있어서,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불행한 정치가였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입장에 놓여졌다.
이는, 대정치가라 해도 심판하기에 가장 어려운 사건이었다.
어떠한 명판사라해도, 빌라도의 입장에 놓여져,
직책을 다하기는 실로 곤란하다.

실로 1924 미국의회가 배일법안을 통과시킨 때의
대통령 쿨리지(5 232역주) 입장 같은 것으로서,
서명하는 일은 죄악, 서명치 않으면 자기 국민의 목전의 불리는 분명하여,
판결에 대하여 헤매다가 마침내 난사를 버리고 쉬운 것을 취했던 것이다.

박지약행을 책하려면 책할 것이나,
그들에 대하여 일편의 동정 없을 없는 것이다.

실로 빌라도는 정치가의 좋은 모범이다.
정치가라고 하면, 총리대신에서 대의 사까지,
말단의 관리공직에 이르기까지 천중 구백구십구까지도 빌라도의 무리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
정의 공평은 이것을 말로는 해도,
실행의 용기에 이르러서는 소아의 그것만큼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정치가를 의뢰하여 복음의 선전을 도모하고,
교세의 확장을 기도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안다.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에게 의뢰하여
전도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하여 정치가 밑으로 달려가고,
원조를 빌어 교세를 확장시켜 보려는
종교계의 다수인들은 크게 자성하는 바가 있으리라.

빌라도의 앞에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앞의 빌라도이다.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심판 않고,
그리스도는 빌라도를 심판하셨다.

역사는 분명히,
여기서 빌라도는 모든 정치가를 대표하여 그리스도에게 심판 받은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가장 여실하게 그려놓은 것이 유명한 뭉카치의 대작이다.
어떠한 주해라 해도 이것 이상 일을 설명할 수는 없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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