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7일 월요일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수난

애가 1 12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마태복음 27 26-50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박히게 넘겨 주니라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한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33) 골고다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35)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박은 후에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예수라 죄패를 붙였더라
38)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45) 시로부터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시까지 계속하더니
46)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중에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49)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참조 : 마가복음 151-41, 누가복음 23 24-49, 요한복음 19 15-30.

사람의 죽음은 누구의 것도 엄숙하다.
이것에 초자연적인 신비적인 바가 있다.

사람은 죽음에 임하여, 보통의 동물은 아니다.
지능적 기계는 아니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 해도, 죽음에 면해서는 영적이다.
감정적이 없다.
사람은 죽음에 임하여 무한한 세계에 직면한다.
자기는 죽어 죽지 않는 자임을 직감한다.

사람의 죽음만큼 엄숙한, 황공한 것은 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의 죽음의 자리에 임하여,
영의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이 바야흐로 죽으려 한다. 하는 선하다 그치지 않는다.
모습이야 말로 거룩하다.
사람의 숨이 끊기는 곳에 하나님은 천사를 통솔하여 임재 하신다.
부박하기 그지없는 인간세상도 죽음이 찾아드는 곳만은 엄숙하다. 신성하다.

모든 사람의 죽음이 그러하다.
의인의 죽음은 특히 그러하다.
의인이 죽는 , 하늘은 열리고 땅은 빛나는 것이다.

크롬웰(5 59역주) 죽음은 실로 장대하다.
예언자 엘리야가 불수레에 타고서 하늘로 올라감 같았다.
닥터 죤슨의 죽음은 애절했다.
정직한 사람이, 무엇보다도 지옥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였다는 것을 듣고서,
그에 대하여 우애의 정을 금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죽음으로서 둘이 말해진다.
하나는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상세한 것이, 그의 제자의 사람인 플라튼(7 191역주) 의해 크리토 - (Crito)으로서 전해졌다. 이것을 읽고서 감격치 않는 사람이란 없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의 공포는 조금도 없었다. 그는 정의에 서서, 국법을 중시하고, 최후까지 사람으로서 또는 아테네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죽었다.
그의 죽음은 실로 진리 탐구자의 모범적인 죽음이었다.

사람은 모두 소크라테스처럼 죽었으면 한다. 학자는 특히 그러하다.
최후의 일순간까지, 사람에게 미래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공구했다고 하는 것이다.

같은 그리스인인 아르키메데스가, 자기 목에 칼날 아래서 마저 물리문제를 생각했다는 것과 서로 비슷하여, 용감스럽기도 하고 사모되기도 한다.
이것을 읽고서,
우리도 사람으로서 태어난 이상,
여기까지 달하지 않으면 된다는 느낌을 일으키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훨씬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상이다.
실로 나폴레옹이 말했다고 전해지는 대로,
만약 소크라테스는 사람으로서 죽었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죽으셨다 것이다.

4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모양은,
이것은 달리 유례없는 것으로서,
이를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이라 칭하는 외에 달리 말이 없다.

사람 같이 말한 사람 없다고( 7:46),
어떤 사람이 예수를 평하여 말했는데,
한가지로 우리들은 사람처럼 죽은 사람 없다 수가 있다.
Never a man died like this man. 그리스도처럼 죽은 사람은 없다.

4복음서에 기록된 그의 사상을 근독정독하여 ,
여기서 확실히 하나님이 사람으로서 나타나신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기사는 명세(明細)하다. 명료하다.
이것을 해득하는데 거의 주해를 요하지 않는다.
이것을 설명하여, 도리어 의의를 잃을 위험이 있다.
이러한 신성한 기사를 설명치 않는 것이 이것을 정해하는 길이다.

일에 관하여서는,
철학적 시인 괴테(1 107역주) 진리를 전하고 있다.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 수난의 기사는, 스스로 비애를 맛본 사람이,
비애의 성전에 있어서만 이것을 해득할 수가 있다.

실로 그대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스스로 십자가를 경험 있는 자만이 해득할 수가 있다.

이것은 신학자들의 취급할 문제는 아니다.
특히 오늘의 소위 그리스도교국의 감독, 목사, 전도사들,
그들의 보급을 받아 전도지에 있는 우리나라(일본) 교사들,
아직 일찍이 박해의 방울도 흘린 없는 자는,
신학상의 지식은 아무리 해박하대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해득할 능력도 없으려니와 자격도 없다.

일에 관해서는, 그들은 마땅히 침묵을 지켜야 것이다.
비애의 전당에 있어서 비애의 사람만이 읽어야 기사
아아, 사람아, 네게 임한 고난에 대하여 감사하라.

그것은 신성한 기사의 일절을 이해할 있는 영광은,
교회의 대감독 또는 대신학 박사 됨보다 월등히 나은 대영광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처형은 로마인이 자기 이외의 백성에게 가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책형(crucifixion) 비슷하여, 잔인흑박을 극하는 형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박혀,
이방인이 노예에 행하는 형에 처벌된 것이다.
책형의 경우에 있어서는, 죄인은 창으로 찔려 죽인 되었으나,
십자가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는 그대로 나무 위에 달아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으로서,
죽는데 수일 걸렸던 것이다.

손은 못으로 횡목(Cross bar) 박혀지고,
상처의 고통과, 각각으로 더해지는 갈증과,
타는 햇빛과, 독수리, 매의 습래 등에 시달려,
마침내 민사(death in convulsions)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예수는 형에 처해졌던 것으로,
사람으로서 죽는데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제자에게 배반되고, 친구에게 버림받고,
교회에 배척되고, 정부에 정죄되어,
마침내 가장 중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박혀도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몰약을 포도주에 섞은 것을 주었으나, 거절하고,
이것을 마시지 않았다.
( 15:23 몰약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이것은 당시의 마비약으로서, 죄인에게 이것을 마시게 하여,
얼마나마 죽음의 고통을 덜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거절하고 이것을 마시지 않으심에 깊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아직 하셔야할 일이 있었다.
그는 이때라고 해도 정기가 아니어서는 된다.
정신을 마비시켜 의식을 잃어서는 된다.
그에게 아직 해야 의무가 남아있었다.
구원해야 사람이 있었다.
고통을 덜기 위한 마비약,
경우, 그에게는 방해였다.

예수는 자기 몸을 십자가에 박고 있는 병졸들 위해 기도하여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사람들을 용서하시옵소서. 그들은 하는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23:34)라고.

예수는 사형의 하수인인 로마의 병졸들에 없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기도를 하지 않을 없었다.

그와 함께 십자가에 박힌 살인범의 죄인 사람이,
죽음에 있어서 회개를 표하여 말했다.

주여, 주의 나라가 임하는 , 나를 기억하옵소서(23:43)라고.

기쁨의 소식에 접하여 한가지로 죽음에 임박한 하나님의 아들은
위로의 소리를 말하지 않을 없었다.

진정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있을 것이다(23:43)라고.

예수의 전도는 십자가상에서 계속되었다.
그는 죽음의 직전까지 구원의 (역사) 종사하시었다.

그리고 다시 아직 하나의 의무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의 처분이었다.
어머니의 일신의 안전을 확인하기 까지 그는 죽을 수가 없었다.
십자가의 가까이서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그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의 사람(아마도 사도요한이었으리라)에게 소리 내어 말씀하셨다.

이는 당신의 아들입니다이는 어머니이다(요한복음 19:26-27)라고.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고.
그가 어머니의 손을 이끌고 십자가 곁을 떠남을 ,
예수는 스스로 타고 있음을 자각하시어,
해면에 적신 초를 후에 말씀하셨다.

, 끝났다.

이것으로 만사가 이룩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효도 없다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에 최후에 남은 일은 어머니의 안전이었다.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여 끝난 후에,
그의 , 끝났다였다.
예수는 효자의 모범인 것을 누가 의심할 있는가?

예수는 십자가에 박혀서부터 6시간으로 숨이 끊기었다.
이것은 보통의 경우에 비하여 너무 빨리 죽음이 임한 아닌가?
창으로 찔린 아니라, 다만 박아 달았을 뿐이다.
고통은 아무리 심했다 해도, 6시간은 죽는데 이르기에는 너무 짧다.

이에 의해 보건대, 예수는 아마도 과도의 심통의 결과,
심장파열로 절식하신 것이리라.

그것은, 그의 죽음을 확실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
병졸 사람이, 그의 숨이 끊긴 후에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흘러나왔나( 9:34) 기록한데 의해서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자의 무정을 슬퍼하여,
심장파열(heart break) 죽은 것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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