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6일 목요일

예루살렘의 복멸


예루살렘의 복멸

마태복음 24
*참조: 마가복음 13, 누가복음 21.

예수,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장 백성의 장로들과 충돌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고, 나아가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고,
그들 위해 우시고, 그들의 최후의 구원에 대하여 희망을 말씀하셨다.

그는 한사람, 그들은 다수,
그는 시골의 평민, 그들은 도회의 귀족, 학자들이었다.

세상의 세력을 비교하여, 그와 그들은 도저히 적수로 되지 못했다.
하지만 논장에 있어서 상대하여, 예수는 언제나 승자의 지위에 서시었다.

누구 사람, 그에게 대답하지 못했고,
날부터 감히 질문하는 없었다(마태복음 22:46) 있어서,
그들은 예수 사람에 의해 침묵 속으로 봉쇄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분의 권위 있는 이가 세상의 권자 앞에 서시었다.
예루살렘을 통틀어, 사람에게 대항할 있는 자가 없었다.

여기서 영이 전적으로 육을 압복했다.
예언자와 제사장이 상대한 경우는 앞서도 있었으나,
그러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예언자의 전승을 일은 없다.

만약 의론이 만사를 결정한다면, 예수는 여기서 유대인의 왕으로 서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의 , 암흑이 세력을 쓰는 시대이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지금은 도리와 언어가 승리를 제압하는 시대가 아니다.
예수는 드디어 지고, 그의 적이 바야흐로 이김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제자들도 또한 그의 대답함에 놀랐다.
예수의 안중, 교직 없고 성전 없는 했다.

오늘의 말로서 한다면, 예수는 기성교회에 대하여 싸움을 것이다.
그의 대담스러움에 보통인이 상상할 없는 바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성전을 가리켜
너희는,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로서 이것을 세우겠다 (요한복음 2:19)고까지 극언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우를 기록한 것이 마태복음 24 1 2절이다.
(마태복음 24 1-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도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

예수가 학자와 바리새인들을 힐책하신 , 성전에서 나오는 때에 제자들은 나아가 성전의 구조를 가리켜 예수에게 말했던 것이다.

선생님, 보십시오. 장대한 하나님의 전을 세우는데 46 걸렸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가르치는 제사장, 학자, 백성의 장로들은 고제도에 의해 권능을 보호 받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런 것을 있으나 마나 것으로서 취급하시고, 자신, 멸망을 초래하신 것은 아닙니까?.

예수의 위대하심은 충분히 이것을 알아도, 이를 성전의 장대함에 비하여 , 제자들에게 걱정이 없을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들의 걱정을 지워버리면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보고 있지 않는가?
나는 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의 하나의 돌도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뜻은 걱정할 없다. 멸망하시는 것은 내가 아니다. 성전이다. 그리고 성전에 부속하는 교직계급이다.
국민이 의지하는 성전은, 교회당은 무너져 버리고, 하나의 돌도 다른 위에 무너져서 남는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확신인가 광기인가? 이것을 듣고서 제자들은 경악앙천하지 않능 없었다. 그런 일이 과연 있을 있을 것인가고. 그들은 스스로 묻고, 서로 이야기했음에 틀림이 없다.

의문을 가지고서, 제자들은 예수께로 와서,
그가 지금 올리브산(감람산) 앉아,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고 있는 때에 그에게 찾아와 물었다.

때는 언제입니까? 영원무후로 생각된 이성전이 무너지는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가공스러운 , 세상 끝으로서 보아야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 당신() 승리의 때입니다.
때는 언제 것입니까? 오는 전조는 어떠할 것입니까.

마치 대예언자에게 일본국의 멸망을 예언 받고,
일본인이 공구(fear)하며 질문으로서 예언자에게 다가서는 상태로서,
냉정하게 철학적으로 생각해야할 경우는 아니다.

마태복음 24, 마가복음 13, 누가복음 21장을 연구함에 있어서 긴장된 마음의 상태를 간과해서는 된다.
이것은 비상한 경우이다. 열한 질문에 대하여, 열렬한 말로서 대답한 경우이다.
성서학자가 장의 주해에 곤란을 느끼는 것은, 예수와 제자들의 이때의 심리상태에 자기를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서재에 있어서 자전과 문전과 주해서로서 하는 문제가 아니다.
나라의 멸망을 앞에 두고, 사변의 도래와 의의에 관한 중대문제이다.
애국자가 피의 눈물을 흘리면서 읽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장이다.

장의 주요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세력과 충돌하여 죽이는 바로 된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패하지 않는다. 그는 정부보다도, 교회보다도, 빌라도보다도, 가야바보다도 대이다.
예루살렘은 일단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박으나, 하나님의 아들은 다시 와서 예루살렘을 심판하고, 그가 행하시려는 모든 의를 행하신다.
그는 성전보다도 대이다. 그가 참된 성전이시다.
하나님은 안에서 사람 사이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가 적의 멸하는 바로 되었다고 하여 실망해서는 된다.

그는 잠시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서, 다시 와서 세상을 다스리신다.
승리는 영구히 그의 것이다. 그는 천지의 주이시다. 인류의 왕이시다.
그의 손에 천연의 힘이 있으시다. 역사는 그이 의지의 실행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약한 인자는 아니시다. 강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루살렘의 성전의 장대함은 그의 장엄함에 비할 것도 못되는 일이다.
, 마태복음 24장의 이른
예수의 종말적 설교 특히 그의 종말관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의 패멸에 처하여 실망하려는 제자들을 힘주려 행한 설교이다.
점에 있어서, 요한복음 14 이하와 목적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점은 이미 마태복음 16 21 이하에 있어서 명시된 것이다.
이때부터 예수, 제자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 제사장, 학자들에게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3일에 다시 살아날 일들을 알려주기 시작하셨다(21).

대저 인자는 아버지의 영광으로서 사자들과 함께 것이다.
각자의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다(27)

이상을 부연한 것이 24장이다. 난해라면 난해이다.
하지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서 읽는 이상, 해득하기에 어려운 곳은 없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이상,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의 아들을 멸할 능력은 어디에도 없다.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고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사람 가루가 것이다(21:44)라는 것은,

그가 전에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이다.
장로, 제사장, 학자들은 하나님이 시온에 놓은 영원한 반석 위에 떨어져 드디어 가루가 되어 버리려하고 있다. 그것을 말한 것이 24장이다.

그리고 단지 예루살렘에 한하지 않는다.
어떠한 민족, 어떠한 제도, 어떠한 계급이라도,
하나님의 아들에 거슬려서는 동일한 운명에 조우하지 않을 없다.

예수를 업신여기고, 복음을 배척하여, 나라도 백성도 안전할 수는 없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망한 것과 동양으로 망하고,
장로, 제사장이 심판 받은 것과 동양으로 심판 받는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주이심과 동시에 심판주이시다.
그를 심판한 자는 심판 받지 않고서는 그치지 않는다.

점에 있어서 우리 일본도 예외일 수는 없다.
예수는 일본국보다도 정치가 군인보다도 강한바 있다.
그들은 고우도꾸 슈우스이(1871- 1911) 하여금 예수 박멸론 저술케 했는데,
예수는 잠시는 박멸되나, 다시 와서 그들을 박멸하신다. (만약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거기에 재래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교의상의 의제는 아니다. 실제상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신다. 그는 우주의 주재이시다.
그를 업신여기고, 그를 모욕하여, 무엇이든 무서운 보수를 받지 않을 없다.
그리고 세계가 그리스도에게 거슬리는 이상,
이것도 예루살렘과 동양으로 멸망치 않을 없다.

그러므로 거역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거슬리는 세계의 멸망의 축도로 보아 차지 없다.

동일한 법칙이 만사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하고 있는 동안에,
세계의 멸망을 말씀하고 있음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길 못된다.

그의 눈으로 보아, 이자가 동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에 거슬리는 모든 자는 망한다.
유대에서도, 로마에서도,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세계에서도,
대저 하나님에게는 편벽됨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있었던 일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박아 예루살렘이 그가 예언대로 멸망된 같이,
모든 그를 욕되게 나라도 사람도 한가지로 멸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멸망되는 것이다. 천벌 또는 천견이라는 것은 없다고 하면 뿐이다.
있음을 어찌하랴! 하나님은 평론가의 논설에 주의(양보)하지 않으신다.
배척된 그리스도는 부지중에 오시리라.
사람들이 무사 평안을 축복하고, 마시며, 먹고, 시집가며, 장가가고 있을 때에 오시리라.

그때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의 물건을 취하려 하여 내려올 틈도 없으리라.
도적이 뜻하지 않은 때에 오듯이 주는 오시리라.
날은 전에 확정해 없다. 하지만 오심은 필연이다.
주는 오시는 때에 비밀히 오시지 않고서 공공연하게 오신다.
그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 찾아 구해야 상태에 있어서 나타나시지 않는다.

초림의 때와 달리, 그는 광야에 있지 않고, 집에 거히시지 않는다.
번개가 동에서 나서 서로 번쩍이듯, 그는 땅에 임하신다.

그의 재래(再來) 세계적 대사건이시다.
소재림이라 칭할 것도 국가적 대사건이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그러했다.
보는 눈으로서 보면, 도쿄의 진재가 그러했다.
그리고 인류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반역을 계속하여, 대규모의 재림을 보려하고 있는 것이다.

재림은 급격이 행해진다.
하지만 이에 전조가 있다.
일면은 암흑의 증가이다. 죄가 성숙하여 심판이 온다.
암흑 극에 달하여 멸망 이른다.

많은 거짓 예언자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차게 됨에 따라 많은 사람의 애정이 없어진다.

때에 주는 오신다. 기타의 일면은 복의 보급이다.
천국의 복음을 만민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두루 세계에 전파될 것이다.

그런 후에 그가 이를 것이다라고 있다.
일면에 있어서는 암흑의 증가, 다른 일면에 있어서는 광명의 증가,
그런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 있어서 암흑은 사라지고,
광명은 세상에 차게 되는 것이다.

위기는 급격하게 임하나 여기에 이르는 길은 완만하다.
마치 만성병이 급변하여 죽음에 이름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생명을 초래하기 위한 죽음이다.
재림의 광명적 반면을 잊어서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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