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의 비유
마태복음 25장 1-13절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참조:
누가복음 12장 35-38절.
예수는 이 세상의 정부 또는 교회의 죽이는바 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 때문에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
떠나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바를 이루실 것이라는 것은,
그의 예언 또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때에,
부지중에 오시리라는 것이었다.
도적이 오듯이 사람들이 예지하지 못하는 때에 오시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비유로서 가르치신 것이 유명한 열 처녀의 비유 이야기 이다.
장면은,
예수께서 즐겨 쓰신 혼연(婚筵)의 그것이다.
신랑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가서,
이제 그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려 하고 있었다.
그의 집에 있어서는 그와 그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있었다.
그리고 향연의 제1막은,
신부를 데리고 돌아오는 신랑의 환영이었다.
이 일을 맞이하는 자가 앳된 처녀로서,
아마도 신랑의 친척 친구 중에서 뽑힌 자였으리라.
이는 자랑스런 일로서 소녀는 모두 이것을 맡으려 했고,
이에 뽑히는 것을 커다란 명예로 느꼈으리라.
하지만 명예에 따르는 의무는 중했다.
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집에 치욕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소녀는 게을리 않고,
전심으로 그 소임을 다해야할 것이었다.
뽑힌 소녀는 10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도 있듯이,
그 중의 어떤 자는 어질고,
어떤 자는 미련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반수는 어질고,
반수는 미련했다.
지자는 준비를 게을리 않고,
등불에 충분한 기름을 붓고,
언제 신랑이 돌아와도 그와 그 일행을 맞이할 준비가 있었다.
미련한 자는 그렇지 않다.
맡겨진 임무를 가볍게 보고,
기름은 겨우 소량을 준비했을 뿐,
그것도 초저녁 안에 써 버려,
이에 써야할 경우에는 이미 쓸 것이 없었다.
용의주도한 소녀들과 무슨 일에나 천박한 소녀들과의 부류였다.
전자는 진지하게 신랑 신부 영접의 소임을 다하고,
후자는 유희 반으로 이에 임했다.
전자는 책임을 아는 자,
후자는 책임을 모르는 자였다.
세상에 책임감 부족한 자로서 소녀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 것으로서 소녀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
꽃이나 나비 같이,
재미나게,
이상하게,
세월을 보내는 것이 그녀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의 기질을 시험할 때가 왔다.
신랑 도착의 때가 지연되었다.
초저녁의 감흥은 이미 지나가고,
야반의 정숙의 때로 되었다.
소녀들은 기다리다 지쳐,
그들 중의 미련한 자는 잠들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모름지기 처음의 경험이었기 까닭에 그들은 그렇게 해도 별로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리라.
신랑은 아마도 신부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서 이튿날 아침 집에 돌아오리라,
바보스럽게 밤중에 맞이하려는 것은 잘못이리라.
어쨌거나 소녀이니 무거운 책임은 지워지지 않으리라.
그래 그들은 소녀 마음으로 졸았을 것이리라.
그런데,
야반 소리 있어서 이르기를,
‘신랑 돌아왔다’고.
이것을 듣고서 일직 그럴 것이라 믿고,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던 소녀들은,
등불을 가진 채 신랑신부를 맞이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자던 소녀들은,
소리를 듣고 깨어,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며,
등불을 가지고서 출영 하려하나,
기름은 이미 없어져 없고,
그동안에 신랑의 일행은 집으로 들어가,
문은 닫혔다.
향연은 안에서 열렸으나,
천박한 소녀들은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 서서 자기의 천려를 뉘우쳤다는 이야기이다.
이 비유에서,
말할 것도 없이 신랑은 그리스도이시다.
신부는 기재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에게 택함 받은 신자의 일단 즉 에클레시아(교회)이다.
신랑과 그 일행을 맞이하도록 뽑힌 열 소녀는
일정한 수에 달하여 이 세상에 남겨진 신자이다.
그 중의 어떤 자는 현명하고,
어떤 자는 미련하다.
현명한 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어 의심치 않고,
항상 이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미련한 자는 일단은 듣고 믿었으나,
오리지 않아 이것을 잊어버리고,
이제는 재림은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있다고 믿는 것은 유대적 사상이라든가,
믿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하여,
재림의 일에 대해서는 안면케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가 약속하신 대로 오셔서,
현명한 자는 기뻐하며,
맞이하고,
미련한 자는 당황하며 허둥거리다가,
천국의 향연에 참여하는 행복을 잃었다는 것이다.
의미는 시로 명료하다.
재림을 믿는 자에게 있어서,
일언일구,
모두 경고로 찬 복음 아닌 것 없다.
이 비유에 있어서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등불과 이것을 유지하는 기름이다.
기름이란 올리브(Olive)의 기름으로서,
일본의 채종유 같이 등화용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신자는 소녀처럼 각자 등불을 밝히는 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워진 성은 숨길 수 없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자 없다.
촛대 위에 두어,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비출 것이다.
이 같이,
사람 앞에 너희의 빛을 비치게 하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너희의 선행을 보고,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리라’(마태복음 5:14-16) 고
예수가 가르치신 대로이다.
그리고 등불은 유지하는데 기름이 필요하다.
기름이 끊겨 등불은 소멸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 기름은 무엇에 해당하는가 하건대,
신앙에 해당한다.
신자에게 있어서 등불은 선행이고,
이것을 기르는 것은 신앙이다.
신앙이 끊겨,
선행은 그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기름은,
혹은 하나님의 은사로서 주어지고,
혹은 자기의 실험으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시자에게 있어서 신앙은 은혜의 실험이고,
이것에 의해 그의 영적 생명은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신자는 언제나 신앙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기를 힘쓰고,
다른 것에 있어서는 부족해도,
신앙의 기름에 있어서는 풍부하려 한다.
그러므로 있는 위에 더 준비하여,
만일의 일에 대비하고자 한다.
미련한 신자는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빛을 원하나,
기름을 간직하려 않는다.
그들은 빛을 발하려는데 급하고,
기름의 저장을 생각할 틈이 없다.
그러므로 기름이 언제나 결핍하여,
그 발하는 빛이 언제나 약하다.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잊은 결과로서,
그 영적 생명은 긴장을 잃고,
만사에 태만 허다하여,
신앙의 기름을 간직하렴의 열심도 욕구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재림이라는 경우에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신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현명하다는 것은 물론 신앙적으로 슬기로운 일이고,
미련하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미련함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지혜에 사로잡힌 미련한 신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것이 미련하고,
믿지 않은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기름을 간직하는 일 같은 것은,
그들의 눈에는 미련한 일로 보이는 것이다.
이같이 설명한대도 사람은 말하리라.
재림이라는 것 과연 있는가고?
재림은 초대의 신자가 생각했던 대로 없었던 것 아닌가?
재림 위해 준비한다는 것은 없는 일 위해 준비하는 것과 같은 일로 무익하기 그지없는 일 아닌가?
그것보다도 실제의 서행을 힘써,
재림 있거나 없거나,
다만 오로지 사람에게 쓰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할 것 아닌가고.
실로 도리에 맞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과연 없는가?
사실 대 재림 즉 최후의 재림은 오늘까지 없었다.
하지만 대 재림의 전조인 소 재림은 오늘까지 이미 몇 차례나 있었다.
예루살렘의 복멸이 그 가장 현저한 것이었다.
기타,
로마제국의 도괴,
프랑스혁명,
가까이는 세계 대 전쟁(2권 말 역주),
이들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니었던가?
즉 이 세상의 지혜가 심판 받고,
하나님의 도가 의로 여겨지게 된 사건이 아니었던가?
또 다이쇼우 12년(1923년)
이래 우리나라에 속발된 불행재난(-1권 136
참조)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서 볼 수 없을까?
아리시마사건(1권 37역주)과 도라노몽사건(1권 138역주)은
일본도덕의 파괴를 보여주는 대 사실이 아니었던가?
대진재는 그 사이에 끼워 세차게 방인의 양심을 찔렀던 것 아닌가?
그리고 그 후의 사회상태,
경제상태는 회개하지 않는 일본인에게 향하여
각성을 촉구 하기위한 아픈 매가 아닌가?
일본에는 일본의 도덕이 있다.
외교의 그리스도교 같은 것,
이것을 믿을 필요 조금도 없다고 한 일본의 도덕은,
지금 어떠한 권위를 쓰고 있는가?
일본은 지금 도덕적 파멸에 임해 있지 않는가?
야소를 맞이할 필요 없다고 모욕을 가하여,
예수를 배척한 나라에,
이제 예수는 돌아오고 있지 않는가?
날마다의 신문지가 분명히 이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일본인 사이에 신앙의 기름이 흠핍하여,
이 재림에 응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만사가 막다른 길에 처 했다고 누구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타개할 길을 누가 알고 있는가?
일본인은 미련한 소녀처럼 신앙의 기름 없기 때문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또 그리스도 재림의 신앙을 조소한 우리나라 그리스도 교회의 현상은 어떤가?
이것 역시 막다른 길에 이를 상태에 있지 않는가?
대회당은 건축되었으나 이에 모여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람을 적고,
교단은 비어,
이것을 채울 교사는 없지 않는가?
그들은 배가운동,
교회운동이라고 하면서 뛰어다녀도,
효과는 조금도 오르지 않고 있지 않는가?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 재림의 신앙에 의해 선 소수의 그리스도교 단체는
조금도 쇠퇴하는 일 없이,
신앙은 언제나 불타고,
회당은 언제나 차서 환희와 희망 넘쳐 이 암흑한 세상에 있을 수가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 재림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최후의 대 재림은 지금도 미래의 일로서 있다 해도,
이에 달하기 위한 소 재림은 분명히 우리들의 목전에 행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각자에게 그리스도 재림은 행해지고 있다.
죽음은 언제 우리들에게 임할지 모른다.
죽음은 도적같이 와서,
생각하지 못한 때에 온다.
그때에 임하여 신앙의 기름이 부족함을 탄식해도 애당초 늦은 것이다.
‘너희는 이것을 알라.
만약 집 주인 도적이 어느 때에 올지를 안다면 그 집을 지켜 뚫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미리 예비하라.
생각지 못한 때에 인자가 임하려 하기 때문이다’라고(누가복음 12:39-40).
주님의 이 경고를 소용없다고 할 수 있는 자는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그리스도 재림의 신앙이다.
그가 오심을 대망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 하기 보다도,
오히려 경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자에게 평안은 있으나,
이 세상 사람이 구하는 안락은 없다.
그리스도 신자의 평안은 그리스도 재림에 직면하여 놀라지 않는 평안이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실은 재림에 대비하기 위한 도덕이다.
이 세상은 언제 끝날는지 모른다는 그 위기를 미리 보고 행할 도덕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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