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離叛)의 제1보(步)
마태복음 26장 6-13절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참조:
마가복음 14장 3-9절,
요한복음 12장 1-11절.
마태,
마가 두 복음의 기사와 요한복음의 기사와 아울러 읽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있어서의 예수의 초대회에 있어서,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의 형제자매가 있었던 일,
또 예수께 기름을 부은 사람이 마리아였던 일,
또 이 일에 관하여 예수에 대하 제자들의 불평의 주창자가 가룟 유다였던 것이 분명하다.
또 향유는 300데나리의 가치가 있었다는 것으로,
오늘의 시가(1925)로 대체로 계산하여 300원 가량의 것이었으리라.
부인의 출가 준비로 그 부모에게서 받은 최대가격의 것으로서,
이것을 이때 마리아가 예수께 부은 것은,
그녀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였던 것이다.
실로 있었던 사실의 그대로의 기사로서 이에 의심을 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께 대한 불평을 말한 것은 유다한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의 다수 또는 전체였던 일이다.
불평은 유다에 의해 생겼을 것이나,
이것을 느낀 자는 그 한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예수는 여기서 제자들 전체의 불평을 받은 것으로서,
그 불평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의미에 있어서 예수께 거스린 사람은 한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제자 전체가 반역자였다.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마 26:8)라고 있다.
그들은 마리아의 행위에 대하여 분개했다.
그렇지만 실은 마리아의 행위를 분개한 것 아니라,
그녀에게 이것을 하게한 예수의 행위를 분개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 대한 불평을 약한 마리아에게 향하여 발한 것이다.
그리고 분개의 이유는 참으로 그럴 듯 했다.
‘만약 이것을 팔면 많은 돈을 얻어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갖고자 하는 것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주려 한다고.
그들이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정은 실로 절절 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예수에 대한 커다란 모욕이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생각하지 않으시는가?
그는 이때까지에 몇 번이나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신 것 아닌가!
빈민구조의 일에 대하여,
그는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음의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있어서 이미 그 스승에서 멀어진 제자들은,
여기서 이 일에 관하여 예수께 흠점 있다고 생각했다.
가련하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해득치 못한 까닭에,
이름은 예수의 제자라 해도,
실은 그의 교사 그 비평가로 되었다.
예수는 높고,
엄한 도덕을 말하셨지만도 도덕의 교사는 아니셨다.
그가 거룩한 도덕을 말씀하신 것은,
사죄의 복음을 말하시기 위해서 였다.
제자들은 예수께 따르기 3년에,
이것을 충분히 해득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먼저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그를 미혹하고,
그를 통하여 제자 전체를 미혹했다.
복음의 신자여야 할 제자들은 도덕가로 되었다.
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명백한 타락이었다.
그리고 도덕가로 된 그들의 눈에는 예수의 결점이 보였다.
옳다,
흠점 못될 것이 흠점으로서 보이기에 이르렀다.
도덕은 좋은 것이지만 복음은 도덕보다도 선한 것이다.
복음 신자가 도덕가로 된 때에,
그는 타락의 제1단계를 내려선 것이다.
그리고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이것을 제1보로서 하여
타락의 심연에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유다의 경우가 그것이다.
나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같은 실례를 많은 내 나라의 그리스도 신자에 있어서 보았다.
무서운 것은 이 타락의 제1보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우러러 보는 일을 그치고,
도덕윤리,
빈민구조,
사회개량에 치중하기에 이르러,
신자는 타락을 시작하여,
그 저지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주는 말씀하셨다.
‘나는 자비를 기뻐하고,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마태복음 9:13)고.
자비는 복음이다.
제사는 율법이며,
도덕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은 사죄의 복음이다.
사람으로서는 자기의 죄를 사함 받고자 하는 일에
아울러 남의 죄를 사하고자 하는 의지기분이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에게 이 기분이 없어지고,
그들은 율법의 사람,
즉 심판하는 사람,
비평가로 된 것이다.
이것을 간파하신 예수는 얼마나 마음에 탄식 하셨으랴!
그들은 그를 떠나기 전에 이미 복음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 중의 한사람,
예수를 해득한 자가 있었다.
그것은 요한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니다.
부인인 마리아였다.
그녀에게 부인 특유의 사람의 마음을 읽는(알아보는)
본능이 있었다.
그녀는 희미하나마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또 이제 그는 무엇을 하려하고 계시는지를 알았다.
그녀는 빈민에게 구제함 보다도,
주 예수를 사랑함이 큰일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에 대한 그녀의 성애의 극을 표시하기 위해,
기름 붓는 행위로 나온 것이다.
이는 부인으로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었다.
그녀는 부모 양도의 귀한 나드유(Nard
- 이성호 역 F.
B. 마이어 1권 -역주)의 한 병을
가지고 와서 그 마개를 따서 내용의 전부를 그의 몸에 부었다.
그 높은 향기는 방안에 가득 차 누구나가 쾌감을 느끼지 않는 자 없었다.
예수는 심히 그녀의 이 사랑의 봉사를 기뻐하셨다.
동시에 이에 깊은 의미 있음을 인정하셨다.
‘나의 장사는 가까웠다’고.
그는 스스로 마음에 생각하셨다.
어쨌거나,
가령 한 사람이라도 그를 참으로 요해하는 자 있음을 알고 기뻐하셨다.
12제자들은 전부 그를 떠난대도 다만 한 사람,
마리아가 그의 참 제자임을 아셨다.
마리아의 명예이다.
부인의 명예이다.
동정추찰의 기술에 있어서는,
남자는 도저히 여자에 미치지 못한다.
여기 있어서인가,
예수는 그가 누구에게 대해서도 발하신 일이 없는 말씀을 마리아에 대하여 말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계 어디서나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이 부인이 행한 일은 그 기념 위해 전해질 것이다’(마 26:12참조)라고.
예수는 그렇듯 고마운 말씀을,
베드로에 대해서도 요한에 대해서도 발하지 않으셨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떠난 때에,
마리아 1인은 그에게 의뢰했다.
남자의 감사의 눈물은 그러한 경우에 흘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우리들과 성정을 같이 하시는 예수는,
이 경우,
이 부인의 행위에 대하여 감사의 눈물을 금치 못했으리라.
물론 이 경우에 있어서의 마리아에 대한 예수의 호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와 그녀와의 사이에 연애관계가 있었다는 자는,
아직 하나님의 아들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기쁨은 공적이지,
사적이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 위한 기쁨이지,
피아의 기쁨이 아니었다.
예수의 이 경우에 있어서의 기쁨은,
그가 전에 일찍이 나타내신 기쁨과 같은 성질의 것이었다.
‘그때,
예수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 일을 지혜로운 자,
총명한 자에게 감추시고,
어린이에게 나타내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여 옳습니다.
이 같은 것은 거룩하신 뜻에 합하니이다’(마태복음 11:25-26)
고 있는 대로이다.
마리아를 사랑하여서의 말은 아니다.
그녀가 행한 행위를 사랑하신 말씀이다.
만약 가룟 유다가 같은 행위로 나왔다면,
예수는 같은 말씀을 하셨음에 틀림없다.
복음이냐,
자선이냐?
예수와 빈민과 어느 것을 먼저 사랑할 것인가?
문제는 이것이다.
제자들은 빈민을 예수 앞에 두었다.
마리아는 예수 제1의 행위로 나왔다.
그리고 예수 자신은 마리아의 행위를 옳다하시고,
제자들의 태도를 옳지 않은 것으로 하셨다.
마리아는 복음의 진수를 해득한데 대하여,
적어도 감지한데 대하여,
제자들은 아직 보통 도덕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므로 그들은 그에 대하여 실족했다.
문제는 작은 듯이 보이지만 실은 중대하다.
복음이냐,
비복음 이냐의 문제이다.
예수는 여기서 마리아에게 찬성하시고 제자를 반대하여,
미래 영겁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진리를 증명하신 것이다.
예수가 마리아를 상찬하심을 보고,
제자들의 불평은 일층 높아진 것이다.
불평의 주창자 유다는 여기서 배반을 결심하고,
제사장에게로 달려갔다.
소사가 대사를 일으킴의 원인으로 되었다.
하지만 인세의 일은 어제나 그렇게 하여 일어난다.
십자가의 대 비극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있어서의 마리아의 주유(注油)로서 시작된 것이다.
신앙이냐,
사회사업이냐?
마리아냐,
유다냐?
오늘 그리스도 신자는 이자 중 어느 것을 택하고 있는가?
미국류의 그리스도교는 후자를 택하고 전자를 멸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
지금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주로서 사회사업을 말하지 않는가?
교회의 사업,
청년회의 사업이라고 하면 주로서 사회사업이 아닌가?
‘만약 향유를 팔면,
은 300데나리를 얻어,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오늘의 교회와 청년회는 유다의 이 주창에 대하여 대 찬성을 나타내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 마리아는 교회 안에는 아주 드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도 옛과 다름없이 그녀 및 그녀와 신앙을 함께하는 자는
교회의 조소,
경원하는 바로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의 사회화를 기뻐하는 오늘의 그리스도교회는
유다의 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이 소설(所說)에 대하여 교회와 유다 무리는 말하리라.
‘만약 그렇다면 신자는 빈자를 돌보지 않는대도 좋은가?
신자는 다만 예수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가’고.
옳다.
옳지 않은 것이다.
사회사업을 제1사업으로 하는 자는 사회사업에 싫증내고,
이것을 게을리 하며 마침내 이것을 폐하기에 이른다.
빈자는 빈자 위해 사랑할 수 없고,
그리스도 위해서만 사랑할 수가 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에서 나온 빈민구조가 아니라면,
구조의 목적은 달치 못한다.
이는 이 세상의 많은 자선사업이 해 되는 일 많고 유익되는 일 적은 이유이다.
먼저 첫째로 예수를 사랑하고,
그 사랑에 격려되어 절로 하는 자선사업만이 영구히 사람을 구원하는 자선사업이다.
‘빈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상에 빈자가 끊이는 때란 없다.
사회사업에 의해 사회는 개량되지 못하며 빈곤은 끊이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해,
사람의 모든 지각에 지나는 평안이 사람의 마음에 임한다.
마리아는 이 경우에 있어서도 역시 ‘선한 일을 택’했다.
(눅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이것은 그녀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다.
주 예수에 대한 이 사랑이 있어서 그녀는 또 빈자에 대하여 종생 뜨겁고 깊은 사랑을 표시할 수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성서는 달리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마리아의 생애는 빈자에 대하여 종생 변치 않는 선행 연속의 생애였음을 의심할 수는 없다.
복음서는 이곳에 있어서의 예수의 마리아 상찬사 같은 것,
분명히 예수와 바울과의 일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는 선행을 창도하고 바울은 신앙을 고조한 것이라고 하여
이자의 상위를 말하는 사람은 복음의 근본정신을 해득치 못 한 자라 않을 수 없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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