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5일 수요일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예수의 애국심

마태복음 23 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자녀를 모으려 일이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참조: 누가복음 13 34-35, 19 41 44.

예수에게 애국심이 있었다.
그는 보통의 개인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개인만 구원되면 나라는 아무러나 좋다는 개인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나라를 나라로서 사랑하셨다. 그는 이스라엘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믿으셨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다 하여, 유대국의 천직을 믿으셨다.
세상에 예수의 애국심에 지나는 거룩한 애국심은 없었다.

우리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그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되는데,
애국심에 대해서도 그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된다.
우리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마음으로서 일본국을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예수의 애국심은 그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나타났는데,
특히 그가 국도 예루살렘에 이른 때에 나타났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예루살렘을 사랑했다. 예루살렘은 그들의 애국의 목표였다.
예언자는 모두 열렬하게 예루살렘을 사랑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의 4대예언자 특히 그러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예루살렘이었다.
단지 중앙집권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중앙생명이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눈동자였다. 하나님의 성전의 소재지였다.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다 하여, 예루살렘은 여호와가 백성 사이에 거하시는 때의 지상 가장 거룩한 일점이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예루살렘을 사랑했는지, 정열을 노래한 것이 시편 137편이다.
아마도 세계 문학 중에서 애국의 지정을 말한 말로서, 이것보다도 통절한 것은 없다.

예루살렘아, 만약 너를 잊을 진대 오른 손에서 재주를 잊게 하라 만약 내가 너를 기억지 않고 , 너를 모든 기쁨의 제일로 하지 않는다면, 혀를 입천장에 붙게 하라(시편 137:5-6)

그리고 정이 복음화 되어 그리스도 신자의 찬미가로 되어 나타난 것이,
아아, 어머니이신 예루살렘이여 일편이다.
O mother dear Jerusalem, When shall I come to thee? When shall My sorrows have an end, Thy joys when shall I see?
아아, 그리운 어머니이신 예루살렘이여 언제, 내가, 당신께 이를 있으오리 언제, 슬픔에 작별을 고하고 당신이 주시는 즐거움을 보오리

이스라엘이 사모한 예루살렘이 그리스도 신자의 소망하는 천국의 모형으로 되었다.

나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 단장을 마치고, 하나님의 곳으로부터 나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21:2 참조) 말이 그것이다.

예언자가 사모한 예루살렘,
예수가 사랑하여 눈물을 쏟으신 예루살렘,
그리스도 신자가 대망하는 예루살렘,
고금동서를 통하여 인류의 희망을 잇는 예루살렘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신 것이다.

아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를 죽이고, 네게 보낸 자를 돌로 치는 자여(마태복음 23:37)라고 한다.

성도(Holy city) 도적의 소굴로 되었다.
하나님의 도성은 악마의 점령하는 바로 되었다.

성전은 있고, 제사는 행해지며, 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가르침을 말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성산을 떠나시고,
이제 파송된 아들마저 죽이려 하고 있다.

이것을 보고, 예수는 울지 않으려야 않을 없으셨다.
비극은, 위기에 임해서도 위기를 깨닫지 못하는 일이다.

성전 있고 예비 있고 교직 있고 신학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그치지 않고, 신자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제사장의 눈에 영광이 빛나는 때에,
예수 분의 눈에는 멸망이 선명하게 비치었다.

눈물은 뭇사람과 함께 흘리는 때는 그렇게는 고통스럽지 않으나,
혼자서 흘리는 견딜 없이 고통스러운 있다.

멸망은 확실히 목전에 가로 놓여 있다.
그런데 종교가는 정치가에 화합하여 말한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홀로 가슴을 치며 외치신다.

아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천하의 근심에 앞서 근심하는 정도가 아니다.
천하가 우려하기 전에 우는 것이다.

수도 사람은 그를 보고 비웃었으리라,
우지여(울보여)라고.

일찍이 나의 애국심이 지금보다도 훨씬 열렬 했을 때에,
오꾸마시게노부(1838-1922) 후작이 나를 평하여 말했다는 것이다.
우찌무라라는 놈은 아마도 식사에 대신에 눈물을 쳐서 먹겠지라고.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 전의 나의 눈물마저 그렇듯 조소되었으니,
예수의 거룩하신 눈물이,
당시의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에게 얼마나 비난 조소되었을지 헤아려진다.

백성은 낙천가를 사랑하고 비관자를 싫어한다.
예수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뒤를 받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다.
이것이 그가 십자가에 박히게 되는 원인이었다.

그리고 분의 경우에 있어서 멸망은 배척 후에 왔다.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는 번이던가!
하지만 너희는 원치 않았다.

예수는 다른 곳에 있어서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내게 거슬리고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마태복음 12:30)라고.

예수와 함께 모여서만,
진정한 결합이 있고, 결합에 따르는 구원이 있다.
예수가 백성을 날개 아래 모으려고 하신 목적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그는 번이나 예루살렘에 올라가(요한복음이 이것을 기록하나다),
백성을 날개 아래로 모으려 하셨다.
모으려하여 노력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원치 않았다.
주는 원하셨다. 백성은 원치 않았다.
양자의 의지에 근본적 상위가 있었다.

그러므로 주의 노력은 무효로 돌아가, 백성은 곳으로 갔다.
예수는 구원하려 하시고, 백성은 구원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는 신앙으로서 보고, 백성은 육안으로서 보았기 때문이다.
어찌할 없는 일이다. 하지만 비애의 극이다.

보라, 너희의 집은 황폐해져 남으리라.
너희에게 남겨지리라 읽을 것이다.

이란 성전, 궁전, 시가 전부를 포함하는 도성이다.
보라 너희의 집은 너희에게 남겨져, 황무지로 되리라 읽을 수가 있다.

너희에게 남겨진다너희의 자유에 맡긴다.
하나님은 너희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실로 무서운 선고이다.

하나님께 경책되고, 매를 맞는 동안은 희망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 방치되어, 제멋대로 하도록 방임되어,
우리는 멸망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땅이 황무지로 되는 것은 자연의 성행이다.
경우에 하나님이 특별히 죄를 벌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가 성수(聖手) 떼신 결과로서 황폐가 절로 임하는 것이다.
너희의 집은 너희에게 남겨질 것이다라고.

죄인은 말하리라.
실로 좋은 일이다. 나는 하고 싶은 대로 것이다라고.
그리고 길이 멸망이다.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척한 나라가 멸망하고,
집이 쇠퇴하며, 몸이 망하는 것은 때문이다.
39, 주가 최후에 수도에 올라가신 때에,
군중은 제자들과 함께 외쳐 말했다.

다윗의 아들, 호산나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다(21:9)라고.

그리고 제사장, 학자,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에 대한 백성의 환영을 싫어하여,
어떻게 하여 이것을 지울 있을까고 꾀했다.

그들은 정당한 왕을 거부하고 있다.
복멸(destruction), 때문에 그들 위에 임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를 환영할 수밖에 없어지는 때가 오리라.
그들도 가난한 군중과 함께 그에 대하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는 복이로다라고 하지 않을 없는 때가 오리라.

그것은 언제인가?
주의 재림의 때이다.

그때,
그를 십자가에 박은 자까지가 그를 드높이지 않을 없기에 이르리라.

계시록 1 7절에 말한 대로이다.

그는 구름 타고 오신다. 모든 , 그를 것이다. 그를 찌른 자도 이것을 것이다. 땅의 모든 족속, 때문에 가슴 치며() 것이다 (계시록 1:7)라고.

예수는 패배 후에 승리를 기약하셨다.
그리고 그의 재림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사면의 때이리라.

예루살렘의 멸망은 부흥으로 되어 나타나리라.
땅의 모든 족속이 이로 인하여 가슴 () 것이다라고 있어서
그들은 재림의 예수를 경배하고, 자기 죄를 뉘우쳐,
그를 영광의 주로서 영접하게 되리라.
은혜의 주는 멸망의 흑운의 저편에 회개부흥의 빛을 승인하셨다.
예수는 () 사람으로서 열렬한 애국자이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냉정한 심판인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위인을 대표하여 우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시지 않았다.

이미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
예수, 성중을 보고, 이를 위해 우시고,
이르시기를이라고 누가복음 19 41절이 하는 기록하고 있다.

인생에 말로서는 도저히 나타낼 없는 비탄이 있다.
때에 눈들이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금수에게 눈물은 없다.

눈물은 언어와 함께 사람의 특유이다.
눈물 없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 우셨다고 하여 그는 연약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다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생에 귀한 것으로서, 용자의 눈물 보다 더한 것은 없다.

예수는 인류의 구주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랑은 포세계적인 것으로서,
이것은 그를 낳은 나라에 한정될 것은 아니다,
자국에 대하여 후하고 타국에 대하여 박한 일은
인류의 왕이실 분의 취할 태도가 아니라는 자가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하지 않았다.
예수는 특히 이스라엘과 백성을 사랑하셨다.

예수, 12인을 보내려하여,
명하여 이르시기를 이방의 길로 가지 말라. 사마리아인의 성으로도 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 가라.
가서, 천국이 가까왔다고 전파하라(마태복음 10:5-7).

말씀에 나타난 예수는 확실히 자국에 후하고 타국에 박했다.
그는 이스라엘인으로서 특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
그리고 정이 분출(spurt) 것이
아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는 부르짖으심이다.

애국은 사람의 지정이다.
이것 있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사람의 애국심은 조금도 그의 인류애를 감소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인류애에 불탄 사람은 모두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쏟은 사랑으로서 만국민을 사랑하신 것이다.

보라, 세차게 이탈리아를 사랑한 단떼가 인류애의 모형이었음을.
같은 일을, 밀튼, 크롬웰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가 있다.

일본 오늘의 박사, 학사, 학생 같이 애국심이 거의 소멸된 사람들에게서
사랑이라는 사랑을, 어떠한 형태에 있어서도 바랄 수는 없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연재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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