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7일 목요일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말씀의 성육신(成肉身) 2

 

: [ 1:15-18]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것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것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 사도 요한은 침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의 증거 사역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원어상으로 본절은 '내가 전부터 그에 대하여 증거해 왔다'라고 번역될 있다.

 

따라서 표현은 혹자들의 이해대로 침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저자 요한의 삽입적인 해석(Westcott, Hort)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침례 요한의 부단한 증언이라고 봄이 문맥상 타당하다.

 

나보다 앞선 - 앞에서 언급한 ' 뒤에'라는 표현과 대조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침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으며

 

( 1:36 보라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2) 침례 요한의 사역의 시작 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 1:14-15 요한이 잡힌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그러나 예수가 침례 요한보다 '앞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1) 침례 요한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예수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 따라서 신분이나 권능에 있어서 당연히 침례 요한과는 비교도 없다.

 

특히 침례 요한은 예수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시인하였으며(3:22-30),

 

예수를 가리켜

 

'나보다 능력 많으신 '( 3:16),

'하나님의 어린양'(29, 36),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 1:7) 등으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침례 요한과 예수는 결코 비교할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침례 요한과 예수가 상호 비교되어 묘사되어 있는 것은

 

(1) 예수의 공생애 직전 침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2) 그에 따라 침례 요한이 메시야로 오인(誤認)되었다는 , 그리고

(3) 초대 교회의 선교 당시에도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등에서 기인한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1) 예수께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2) 요한 사역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 1:16]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충만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 의미하며 14절의 '충만 하더라' 표현과 연관된다.

 

그러나 14절의 '충만 하더라'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은혜가차고 넘쳐서 성도에게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자면, 충만함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며( 1:9)

'측량할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다( 3:8).

 

그리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 비유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있다.

 

이는 ' 받은 은혜가 능력을 발하고 나면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 의미로서 '은총을 받고 받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인 자신을 자각케 된다.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이방 종교와 이방 철학들 그리고 형식주의적 유대교라는 어두움을 뚫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과 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선포하였다.

 

 

 

[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 6절부터 16절까지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충만한 은혜를 묘사한 저자는,

 

이제 구약의 율법 시대와 신약의 은혜 시대의 대조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시대의 특성을 간략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준다.

 

먼저 사도 요한은 율법 시대의 대표자인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특성을 간명하게 규정한다.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3:20),

'몽학 선생'( 3:24)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 율법에 대조되는 은혜와 진리란 단순한 은사의 차원보다 높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될 있고 이는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자신이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있는 것이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의 경우처럼 수동적으로 주어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선교(Mission) 가운데 임했던 것이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써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바로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말씀임과 아울러 교회의 근거를 확고한 참신앙의 반석 위에 세우는 말씀인 것이다.

 

 

 

[ 1: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 문자적으로는 '결코 보이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비록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

 

( 33:11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34:10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한하고 죄악된 인생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33:20 가라사대 네가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자가 없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신데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예수를 죽이려고 정도로 격분하였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10:20-33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말을 듣느냐 하며

21) 혹은 말하되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있느냐 하더라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양은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저희를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아버지 품속에 있는 - 표현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1절의 '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표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암시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까지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구절이다.

 

독생하신 하나님 - 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 상호 연관되는 칭호는 바로 은혜와 진리의 부여자(附與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본성인 은혜와 진리로 교회를 형성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독교가 당시의 이방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율법주의 로마 제국주의에 대항할 있었던 힘의 원천(源泉)이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성도들 사이에 암호로 통용된 물고기 그림에서 당시의 신앙을 발견할 있다.

 

헬라어로 '물고기' '잎뒤스'로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굳건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온갖 박해를 이기고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었듯이,

 

오늘날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ideology) 와중에서도

교회가 있는 기반이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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