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3일 금요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동정(同情)의 그리스도

 

히브리서 214-18

 

대저 자녀들은 함께 살과 피를 갖추었으며, 그도 역시 이것을 갖추셨다’(14상 일역)

 

자녀들

그리스도가 구원하시려는 사람의 자녀들은 함께 살과 피를 갖추었으며’,

살과 피를 함께 하므로 혈육의 성을 동일한 조선(祖先)에게서

이어 받은 자이매.

그도 한 가지로 이것을 갖추셨다

 

사람의 자녀의 구주이신 그() 그리스도도 또한

그들 같이 살과 피를 스스로 취하셨다.

즉 사람이 되어 세상에 임하셨다. 수육(성육신) 하셨다.

 

* 참조 (빌립보서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는 죽음으로서, 죽음의 권위를 가진(잡은), 즉 악마를 멸하시고’(14상 일역)

 

이는그리스도께서 살과 피를 갖추어 세상에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다.

 

죽음으로서, 죽음의 권세를 가진(잡은)

죽음으로서 죽음을 멸하시기 위해서이다.

 

죽음으로서 죽음을 무()로 돌아가게 하시렴에서이다.

혹은, 죽음을 무능케 하시기 위해서이다.

 

* 참조 (디모데후서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죽음은 있대도, 이것에 공포 없게 하시렴에서이다.

죽음이라는 독사에게서 그 독아(fang)를 뽑아,

이것으로 무해한 것으로 되게 하시렴에서이다.

 

멸하고의 역은 나쁘다. 절멸의 의가 아니다. 무능케 하신다는 뜻이다.

악마를 무능케 하여 죽음을 무능하게 하셨다고.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 죄는 악마(마귀)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악마를 무능케 하여, 죽음은 그 가시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 참조 (고린도전서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떻게 하여 악마를 무능케 하셨는가?

이것을 학리적으로 해득하기는 어려웁다.

하지만도 오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죽음이 죽음 아닌데 이른 것을 안다.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를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죽음 아닌 것을 안다.

 

그 설명 여하에 상관없이, 오인은 실험에 의해 그것이 사실임을 안다.

하지만 그 설명의 하나는 확실히 그리스도의 무저항주의 실행에 있다.

 

악에 대항하지 말라’ ‘악을 갚지 말라는 훈계는,

 

* 참조 (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악을 멸하는데 가장 유효한 길로서 오인에게 전해진 것이다.

악인을 멸하는데 가장 선한 방법은,

악인으로 하여금 마음껏 악을 행하게 하는데 있다.

마치 독사로 하여금 그 독분(독물)을 방산케 하여,

이것으로 하여금 마침내 무해케 하는 것과 같다.

 

악마는 하나님의 성자를 죽여, 악마가 악마 됨을 충분히 나타냈다.

그는 자기의 죄로 인하여 망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죽여 스스로 죽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잡은 악마를 멸하시려는데 있어서,

악마를 죽이지 않고서, 악마로 하여금 자기를 죽이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대죄악을 범케 됨으로서, 악마는 마침내 그 권위를 못 쓰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죄의 중재(화해)의 죽음이었다.

사람에 대해서는 동정추찰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악마에 대해서는 그 원위좌절 위한 죽음이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에게 의뢰하는 자의 죄를 사하시기에 이르셨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고 죽음을 죄의 결과로서 보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악마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고,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서

이미 사람을 위협할 수 없게 되었다.

 

죄를 모르는 하나님의 성자의 죽음은,

어느 방면으로 보아도, 죽음의 의미를 일변했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생애 노예 된 자를 해방해 주시기 위해서였다’(15일역)

 

죽음의 공포에 의해 생애를 속박 중에 있는 자를 석방하시기 위해서이다.

즉 죽음의 유설(수감)에서 사람을 석방하기 위해서이다.

 

죽음은 최대의 악주이다.

그는 공포로서 인류를 결박하여, 그 일생을 공포의 연속되게 한다.

죽음은 생생(lively)한 이 인생을 둘러싸는데 비애의 흑포로서 한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인생에 깊은 환희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몸소 죽음을 맛보시고, 죽음으로 죽음 되지 않게 하시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죽음은 없는 것과 동연의 것으로 되었다.

이에 있어서 깊은 웃음은 인생에 임했다.

이에 있어서 높은 찬미는 사람의 입에서 올랐다.

그리스도 강세 이전에, 이른 바 개선적요가라는 것은 없었다.

 

실로 천사를 돕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도우신다’(16일역)

 

도우신다, 손을 잡고 올린다는 뜻이다.

즉 손을 잡고서 소아를 인도한다든가,

또는 물에 빠진 자의 손을 잡아 올려 이것을 도움의 뜻이다.

 

실로 살()과 피()를 받지 않은 천사의 손을 잡아

이를 도우시려는 것이 그리스도 수육(성육신)의 목적이 아니다.

그는 이것을 받은 약한 인류를 도우시기 위해 세상에 임하셨다.

 

그는 실로 너희 아브라함의 자손(히브리서를 받은 그리스도 신자)를 도우신다.

그는 너희들과 다른 자가 아니다.

너희들과 같은 처지 아래 생육하고, 너희 간난을 받아,

너희들과 비통을 함께 한다.

그는 천사의 구주가 아니시다.

약하고, 죄 있는, 울며 슬퍼하는 인류의 구주시다.

 

이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일에 있어서 자비와 충의한 제사상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모든 일에 형제들과 같아지심은, 지당하다’(17일역)

 

이러므로살과 피를 받은 약한 사람의 자녀를 돕는 것이,

그리스도의 수육강세(성육신)의 목적이시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이하, 약간 말의 순서를 변경할 필요가 있다.

 

즉 다음과 같다.

자비하고, 또 하나님께 속한 모든 일에 대하여 충의 한 제사상이 되어

 

제사장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 서서 그 중보자로 된 자.

자비한사람에 대해서는 자비한 자, 동정에 부한 자,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에게 관계된 모든 일에 대하여 충의(충실)한 자,

즉 완전한 제사장이시다.

 

이른 바 자비와 진실이 함께 합하고, 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는’(85:10일역)자시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충의 한 제사장은 적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에 대하여 동정(자비) 깊은 제사장은 아주 드물다.

 

종교가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열심에 달리기 쉽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냉혹해지기 쉬운 자이다.

 

이른 바(소위) 준엄한 독신가란 이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세상에 흔한 그러한 종교가는 아니다.

그는 동정과 열심을 합쳐 가지신 제사장이시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일에

하나님을 제사하는(섬기는) 모든 법에 대하여

 

* 참조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즉 공물(제물), 희생 등에 관한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의 세말까지를 태만하지 않은 완전한 제사장이었다.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속한 것 아니다, 완화하신다.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노를 완화케 하시려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완화케 하기 위한 제물이시다’(요한 제12:2 일역)라고 한다.

 

그는 사람을 설득하고 하나님을 완화시켜 이자의 화평을 꾀(도모)하셨다.

거룩하신 하나님에게도 또한 의분완화의 요가 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형제 같이 되심은만사만단에 있어서,

그의 형제인 사람의 자녀같이 되심은.

 

사람에 대해서는 동정추찰로 충만하시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충실한 제사장으로 되어,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노를 풀기 위해,

그리스도는 모든 집에 있어서, 그의 형제인 사람 같이 될 필요 있었다.

 

지당하다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으셨다.

그렇게 하심은 그의 의무이셨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람같이 아니 되려 해도 않을 수 없었다.

사랑에도 또한 속박이 있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줄()로써 스스로 결박하셨다.

 

대저 그는 친히 시험받아 간난을 받으셨으매, 시험받는 자를 도울 수 있다’(18일역)

 

그는 친히 시험받아

그는 거룩한 분이지만, 또 사람의 자녀같이 종생 악에 시험 받으셨다.

하지만 잘 유혹에 이겨 1회도 죄에 빠지지 않으셨다.

 

그리고 시험받으심으로서, , 유혹의 실험을 가지신 까닭에,

그는 시험받는 자를 도울 수 있다’.

 

여기에 있는 도움이라는 말은, 16절에 있는 도움이라는 말과 다르다.

이것은 소리에 달린다는 뜻이다.

 

간난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그리스도는,

간난에 있는 자의 응원에 향해 가실 수 있다고.

이상 5절을 다음과 같이 개역하여, 그 의의를 일층 명료케 할 수가 있다.

 

대저 자녀는 살()과 피를 함께 받았으므로,

그도 또한 그들 같이 이것을 친히 취하셨다.

이는 죽음에 의해,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 즉 악마를 무용케 하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종생 그 속박 하에 있는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는 실로 천사를 돕는 자가 아니시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돕는 분이시다.

이러므로, 그가 자비하신, 또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일에 대해 충실한 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 위해 완화하게 하시기 위해, 모든 일에 있어서 그 형제같이 되심은,

그의 하실 일이었다.

대저 그는 친히 시험받아 간난을 받으신 것에 의해 능히 시험받는 자를

도우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정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여 홀로 하늘 높은데 계셔서

사람의 간난을 내려다보시는 자가 아니라,

사람의 살을 취하시고, 그 피를 나누어,

사람이 받아야 할 간난을 모두 받으신 자,

그러한 이는 하나님이시기보다도 오히려 친구이다.

두려워할 분이시기보다도 오히려 사랑할 분이시다.

그는 친히 시험받아 간난을 받으심으로서,

시험받은 자의 원조를 청하는 소리에 응하여

곧 그에게로 달려 향해 가신다고.

 

얼마나한 복음인가?

옳다, 그는 오인에게로 달려옴을 필요치 않는다.

 

오인은 다만 그분 있음을 알면 족하다.

그도 고생하셨으매 오인이 고생함은 당연하다.

그는 이 세상 사람에게 증오되셨으매 오인이 증오됨은 당연하다.

 

동정의 그리스도는 동정으로서 오인을 도우신다.

오인은 그리스도 있음을 알 뿐으로서 이미 오인의 고통 모두가 제거된 것을 느낀다.

동정의 그리스도,

옳다, 동정의 그리스도!

 

*내촌감삼의 (19076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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