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2일 목요일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완성과 고난

 

히브리서 210

대저 많은 아들을 영광에 인도하기 위해, 그 구원의 임금(군주)을 고난에 의해 완전케 하신다는 것은, 만물의 귀속되는바 만물을 창조하신이(하나님)에게 합당한 일이시다’(히브리서 2:10일역)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개정개역)

 

 

성서에 위대한 놀라운 말씀이 많이 있는데,

그 하나는 확실히 히브리서의 이 1절입니다.

 

이것을 요약해 말한다면,

사람은 고난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지(will)라는 것입니다.

 

그 일의 전부가 의외입니다.

사람이 완전하게 된다고 하며,

완전하게 되는 길은 고난이라 하고,

그리고 고난에 의해 완전하게 되는 것이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성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 사람이 듣고서,

모두 의외로 느끼는 일로서, 듣고서 다 놀랄 뿐입니다.

 

사람은 원래 불완전한 자, 그것이 온전해진다는,

그것이 불가해의 제1입니다.

 

그리고 가령 완전에 달할 수가 있대도,

그 길이 평안무애(무방자)의 길이 아니라

고난신고의 길이라는,

그것이 불가해의 제2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특히,

그 애자에 의해 택하시는 길이 이것이라는,

그것이 불가해의 제3입니다.

 

이 세상의 아버지로서 아들의 성공을 꾀(도모)하는데 있어서

특히 고난의 길을 택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완전케 하는데 고난으로서 하는 것이,

천지의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합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인은 물론,

박신의 신자가 이것을 듣고서 놀람은 괴이하게 여길 것 못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히브리서의 이 말씀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임금으로서 정하신 예수의 생애가 이대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가장 비슷한 사람,

예언자 예레미야, 사도 바울 같은 사람들의 생애가 이대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총아라 불리면서,

총아다운 취급을 조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멸시되어 사람에게 버린바 되고, 슬픔의 사람으로서 병을 알았다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이사야서 53장 참조)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그들의 생애였습니다. 실로 이상합니다.

하나님께 축복된다는 것은 복되지 못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총아는 하나님의 적으로서의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인생 이에서 더한 불가사의(wonder)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 설명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 죄인의 경우에 있어서는,

고난은 죄를 불태워 버리기 위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 애자를 채찍질(편달)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람의 받는 고난은 징계 이상의 목적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의 받은 고난은 속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와 함께 세상의 죄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므로,

그는 구레네 시몬과 한 가지로,

예수의 십자가의 일단을 짊어짐의 명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 신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문에 고난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약함을 알 때 하나님의 강하심이 해득되는 것입니다.

 

야마나까 시까노스께의 노래에

 

이 위에 더 근심스런 일 쌓여라 한 있는 몸의 힘 시험하련다고 하는 것이 있는데,

 

신자는 조금 말을 바꾸어 합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련다.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고난에 처하여,

하나님에 의해 위로되고, 격려되어,

완전히 이에 이길 수 있어, 신자는 하나님을 알고,

그 만큼 그의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난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의 용적(capacity)을 넓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예리한 끝(chise) 처럼 우리들의 굳은 마음을 뚫려,

거기에 새로이 용기를 만들고,

그 안에 은혜의 이슬을 가득하게 합니다.

고난 적은 사람은 은혜를 받음의 용적(용기)이 적은 사람입니다.

 

고난에 의해 동정(同情)이 더해집니다.

우리는 고생하는 만큼 그것만큼 동정의 구역과 능력을 더하게 됩니다.

동정은 사람을 도움의 비결인 것으로서,

이것 없이 인류의 벗으로 될 수는 없습니다.

 

같은 히브리서의 414절 이하에 이르기를,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대제사장이 아니시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같이 시험 받으셨다. 하지만 죄를 범치 않으셨다.

 

(예수), 구원의 임금(주군)이 고난에 의해 완전해졌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는 고난에 의해 완전한 구주로 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실험도 또한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13절 이하에 이르기를

 

찬양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즉 많은 자비의 하나님, 모든 위로의 하나님, 우리를 모든 고난 중에 위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께 위로 받는 위안으로서, 많은 고난에 있는 자를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 차고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차고 넘친다.

 

고생하여 위로 받고,

위로 받아 고생하는 자를 위로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고난 그것이 대 은혜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만민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히브리서 2:9일역)

 

그에게 있어서, 죽음의 고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고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영광의 달하는 길은 고난입니다.

몇 차례나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실험을 거친 일 없는 자는 하나님의 총아는 아닙니다(1010일 기록).

 

* 내촌감삼의 (19275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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